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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철동

  • 면담자 : 양라윤

구술자소개

  • 구술자 : 박철동
  • 구술일자 / 장소 : 2010년 11월 30일/광주시 치평동 구술자 자택
  • 구술시간 : 1시간 40분 7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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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술내용 요약

구술자 서수현은 1930년생으로 평안남도 평양 출생이다. 구술자의 부친은 목사였는데, 북한의 김일성 정권이 들어서자 기독교에 대한 탄압 때문에 가족들을 두고 월남을 하게 된다. 4남 2녀 중 장남이었던 구술자는 어머니와 함께 가족들 생계를 꾸려나가며 어렵게 생활하다가, 아버지를 찾아 열여덟 살에 홀로 월남한다.
월남한 구술자는 1년 정도 장돌뱅이를 하면서 어렵게 생활하다가 목포 문태중학교 3학년에 편입시험을 보고 중학교를 다니게 된다. 그러다가 6‧25전쟁이 나면서 광주에 연합대학이 생기게 되자 구술자는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교육학과에 입학하게 된다. 2학년까지 낮에는 연합대학에 다니면서 공부를 하고, 밤에는 미군부대 교환수로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생활하다가 3학년 때 서울대학교가 다시 서울로 옮기게 되자 서울에서 생활하게 된다. 당시 대학교를 졸업하기 위해서는 6개월 동안 SO훈련을 받아야만 했는데, 구술자도 SO훈련을 받기 위해 광주로 내려오게 된다. 그러나 신체검사에서 떨어진 구술자는 갈 곳이 없어 절에 들어갔다가, 친교가 있던 숭일고등학교 교장이 떠올라 숭일고등학교 교사 자리를 알아보게 된다.
숭일고에서 독일어 교사로 재직하게 된 구술자는 1960년 당시 3학년 1반 담임과 학생지도부 부과장을 맡고 있었다. 당시 이승만 정권은 경찰들의 학원사찰과 정치적 이용이 있었는데, 숭일고에서도 경찰이 교무실에 근무하면서 선생님들과 학생들의 동향을 살폈다고 한다. 예컨대 3‧15 선거 국면에서는 경찰들이 선생님들에게 가정방문을 하고, 투표참여 여부를 조사하여 파악하라는 지시까지 있었다고 한다. 특히 학생지도를 담당하고 있던 구술자는 경찰의 학생 사찰에 대해서 몇몇 학생들에게 귀띔을 해주며, 행동을 조심할 것을 당부했다고 한다.
4월 16일 숭일고 3학년 학생들 10여 명을 중심으로 시위 모의가 이루어지는데, 구술자는 이들의 시위 모의에 대해서 사전에 알고 있었으며 학생들에게 폭력적인 시위가 되지 않기를 당부했다고 한다. 4월 19일 오후 1시경 숭일고생들이 무리를 지어 운동장에 모여 교문을 나서려하자 학교 측에서는 교문을 잠그고 학생들이 나가지 못하도록 하였다. 이를 본 구술자는 학생들의 시위를 드러내놓고 지지할 수 없어 우회적으로 담 뛰어 넘지 말라는 소리를 해, 학생들이 담을 뛰어 넘어 학교 밖으로 진출할 수 있도록 했다고 한다. 
숭일고 학생 200여 명 정도가 시위에 참여하기 위해 시내 쪽으로 나가게 되는데, 구술자는 학생지도 담당으로서 학생들을 보호할 책임을 느끼고 학생들을 뒤쫓아 시내로 나가게 된다. 구술자는 시내 동방극장 쪽에서 조대부고생들과 숭일고생들이 합류하게 되고, 시청 쪽에서 학생들이 부상당하는 것을 목격하게 된다. 이후 학생시위대가 여러 방향으로 흩어지게 되자 사태를 파악하고 수습하기 위해 학교로 돌아가게 된다. 
숭일고에서는 교무회의를 통해 4‧19에 참여한 학생들의 징계 문제를 논의하게 되는데, 학생들의 뜻에 암암리에 동의하던 선생님들 사이에서 강력한 처벌보다는 경미한 경고 정도로 징계를 내리기로 합의하게 된다. 20일 휴교령이 내려진 상태에서 시위에 참여했던 일부 학생들이 서수현의 집에 찾아와 이후 문제들을 상의하자, 구술자는 학교 측의 결정과 상황에 대해서 학생들에게 알려주고 독려했다고 한다.
이후 광주에서 교사로서 시위에 참여할 수 없었던 구술자는 휴교령이 내려진 상태에서 서울로 올라가 개인적으로 시위에 참여하게 된다. 광주에서 할 수 없었던 정권에 대한 규탄과 답답한 마음을 서울 시위에 참여함으로써 조금이나마 자신의 뜻을 풀고자 했다고 했던 것이다. 


5. 참고자료

四‧一九革命負傷者會 光州‧全羅支部 湖南 四‧一九 三十年史 編纂委員會, 『湖南 四‧一九 三十年史』, 三和文化社, 1995
四‧一九革命負傷者會 光州‧全羅支部, 『湖南 四‧一九革命 資料史』上, 코리아기획인쇄,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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