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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민화와 민주화로의 여정

문민화와 민주화로의 여정

설명

1987년 6월민주항쟁은 정치의 민주화뿐만 아니라 사회 전반의 민주화를 촉진시켰다. 1987년 이후는 여러 가지 우여곡절에도 불구하고 민주화가 상당히 진척되고 통일운동이 활발히 전개된 시기였다. 민주화는 이제 어떤 세력도 꺾기 어려운 대세였고, 남북의 접근도 정상회담이 개최될 정도로 발전됐다. 6․29선언 이후 관심은 대통령선거에 집중됐다.
10월 29일 공포된 새 헌법의 가장 큰 특색은 대통령을 직선제로 선출하되 임기 5년 단임제라는 점이었다. 대통령 권한이 재조정되고, 국회의 국정감사권이 부활됐다. 헌법재판소가 신설되고 지방자치 실시가 명문화됐다. 11월에는 여야 합의로 노동관계법 개정안이 통과됐다.
‘1987년 체제’는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 정부를 거쳐왔다. 6월항쟁의 열기가 채 가기도 전에 민주진영은 분열했고 대선에서 패배했다. 대선 패배는 민주화를 향한 걸음을 더디게 했다. 지역감정의 조장과 대결구도로 치러진 대선과 민주진영의 분열은 1990년 3당 합당으로 이어졌고, 독재세력과 민주세력은 뒤섞여버렸다.
노태우 정권은 인맥상으로 신군부를 계승했지만 5공 정권과의 차별화, ‘광주사태’ 해결이 당면 과제였다. 여소야대 국회는 헌정사상 초유의 국정조사권을 발동해 1988년 5공 청문회를 열었다. 5공 청문회는 신군부 쿠데타와 비리의 진상에 대한 여론을 매개로 해서 이루어졌지만 진상규명은 한계가 있었다. 학생들과 재야세력은 전두환의 구속을 강력히 요구했다.
1989년에 들어와 잇단 입북사건 등으로 ‘공안정국’이 출현했지만, 전두환 처단을 외치는 시위가 계속되자 전두환은 국회 증언대에 섰다. 불안해진 극우세력들이 정국을 바꾸고자 1990년 1월 합당했다. 민주진영에서는 1989년과 90년 전국교직원노동조합, 전국노동조합협의회 등을 각각 결성했다.
김영삼 정권은 역사바로세우기에도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두었다. 5․18특별법, 전두환․노태우 재판이 이루어져 두 전직 대통령이 구속됐다. 그러나 광주학살, 12․12쿠데타, 5․17쿠데타의 진상규명에는 미흡했다. 김영삼은 후기로 갈수록 실정을 거듭했다. 김영삼의 차남인 김현철이 월권을 하고 여러 의혹사건에 개입됨으로써 위신이 여지없이 실추됐다. 1997년 1월 노동법 개정에 항의해 민주노총과 한국노총이 파업에 들어가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김영삼 정권은 임기 만료 직전에 IMF 사태를 맞았다. 대대적인 기업의 구조조정으로 수많은 직장에서 대규모 해고사태가 발생했다. 이로 인해 중산층이 몰락하고 일부 부유층은 고금리의 혜택을 받는 ‘빈익빈 부익부’의 양극화 현상이 더욱 심화됐다.
김대중 정권은 김종필과 손을 잡아 대선 승리를 이뤄내 개혁에 일정 제약이 있었다. 또한 IMF의 권고에 순응적이었고, 신자유주의를 추종해 외국자본이 진출할 수 있도록 했다. 김대중 대통령은 취임 초부터 ‘햇볕정책’을 내세우며 북한과의 관계 개선에 심혈을 기울였다.
2000년 남북 특사를 교환하고 드디어 남북정상회담을 가졌다. 김대중, 김정일 두 정상은 6․15공동선언을 통해 통일문제를 자주적으로 해결하고, 남측의 연합제안과 북측의 낮은 단계의 연방제안이 서로 공통성이 있다고 인정하고 이 방향에서 통일을 지향해나가기로 합의했다. 공동선언에 따라 남북이산가족방문단이 교환되고, 경의선 개통식 등 남북 교류협력이 활발히 이뤄졌다.
1987년 6월민주항쟁 이후 한국의 민주화운동은 제3세계의 모범이 되고 있다. 한국인은 민주화와 경제발전을 함께 달성했다는 점에서도 자긍심을 갖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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