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결과
'장준하'에 대한 통합 검색 결과 : 전체 456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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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사료 204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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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준하선생님을 추모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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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번호 : 00831443
날짜 : 1975.10.07
구분 : 문서류 > 문서
기증자 : 박용길
요약설명 : 싸우다 1975년 포천의 약사봉 계곡에서 의문의 실족사를 당한 장준하선생을 추모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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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 장준하 선생 추모 대강연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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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번호 : 00831445
날짜 : 1984.08.09
구분 : 문서류 > 문서
기증자 : 박용길
요약설명 : 장준하 선생 추모 대강연회 알리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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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준하선생 사인규명조사 활동보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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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번호 : 00923448
날짜 : 1993.09.27
구분 : 문서류 > 단행본
기증자 : 김근태재단
요약설명 : 27일 민주당 장준하선생 사인규명 조사위원회에서 발행하고 지음. 1993년 3월 2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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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사료 11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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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준하 영정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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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번호 : 00979472
날짜 : 미상
구분 : 사진필름류 > 사진
기증자 : 장호권
요약설명 : 장준하 선생의 영정사진으로 사용된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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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준하 묘비 방문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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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번호 : 00979476
날짜 : 1988.08.17
구분 : 사진필름류 > 사진
기증자 : 장호권
요약설명 : 장준하 선생의 묘비에 방문한 사람들의 모습이 수록된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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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일 굴욕외교 반대 성토회에 참석한 윤보선, 함석헌, 장준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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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번호 : 00742478
날짜 : 1964.03.21
구분 : 사진필름류 > 사진
기증자 : 경향신문사
요약설명 : 함석헌, 장준하씨 등 연사들은 '정부의 대일외교는 매국외교'라고 규탄하고 '한일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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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상사료 1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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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물사료 5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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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준하 추도식과 문익환 목사 출판기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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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번호 : 00952022
날짜 : 1984.09.06
구분 : 박물류 > 박물
기증자 : 늦봄문익환기념사업회
요약설명 : 장로가 장준하 추도식과 문익환 목사 옥중서한집 출판기념회의 사진과 가족사진 등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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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복음동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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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번호 : 00952046
날짜 : 1960.01.00
구분 : 박물류 > 박물
기증자 : 늦봄문익환기념사업회
요약설명 : 문익환 목사가 복음동지회 활동을 하며 찍었던 사진들을 모아놓은 앨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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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익환 앨범 3[87년 7월~8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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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번호 : 00952067
날짜 : 1987.07.31
구분 : 박물류 > 박물
기증자 : 늦봄문익환기념사업회
요약설명 : 박용수가 87년 7월부터 87년 10월까지 찍은 문익환 목사의 사진 앨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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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료 컬렉션 1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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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료 콘텐츠 18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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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준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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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설명 : '못난 조상’이 되지 않기 위해' 장준하 선생의 삶은 조국의 독립과 민주화를 위한 길과 같은 것이었다. 국민 대다수가 침묵할 수밖에 없었던 유신시절 그는 ‘재야 대통령 장준하’로 불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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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재야 대통령’ 장준하 의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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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설명 : “장준하가 실족해 추락사했다.”고 보도했다. 장봉진 기자는 보강 취재를 더 한 다음 기사를 쓰기로 했다. 취재에 응한 인근 주민들은 사고 지점을 가리켜 “불과 보름 전에야 군사보호 지역에서 해제된 곳”으로 원래 등반 코스가 아니라고 말했다. 그날 오후, 취재를 마친 장 기자는 기사를 써서 데스크에 넘겼다. 다음날인 19일, 동아일보 사회면 톱으로 「장준하 씨 사인에 의문점 」이라는 제목의 기사가 실렸다. “실족사로 처리된 죽음에 깊은 의혹이 제기된다.”는 것이 보도의 핵심이었다. 전날의 여러 언론 보도와 딴판인 동아일보 기사로 의정부 지청은 발칵 뒤집혔다. 경찰의 수사 결과를 뒤집는 의혹 보도에 따라 목격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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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총무님, 총무님, 우리들의 총무님_ 김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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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설명 : 불구하고 사람들은 한림에 대해 잘 알지 못했다. 당시 한일회담반대투쟁의 주도 인물이었던 장준하와 백기완 정도만 한림에 대해 아는 정도였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한림을 교사려니 생각했다. 한림은 앞에 나서지 않은 채 사람이 필요하면 사람을 구해오고 돈이 필요하면 돈을 구해오는, 말 그대로 민주화운동에 없으면 안 되는 사람이었다. 우리나라가 반드시 민주화되어야 한다고 믿는 한림이지만 딸 윤만은 다치지 않기를 바랐다. 가급적이면 이 역사의 광풍을 피해 가기 바랐다. 그날, 악수를 하고 집을 나선 윤은 집에 돌아오지 않았다. 그렇게 헤어진 딸을 몇 달 만에 군사 법정에서 만난 것이다. 학생들의 시위가 예년보다 심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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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술 아카이브 3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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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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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담자 : 한승동
일자/장소: 2021.10.25. / 서울시 종로구 민주언론운동협의회
요약설명 : 김재규와 장준하, 10‧26 사건의 배경, 송건호 편집국장의 사직, 동아투위의 투쟁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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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대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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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담자 : 권형택
일자/장소: 2019.6.21(1차),7.2(2차)/함석헌기념사업회
요약설명 : 관계, 장준하와 함석헌, 씨알의 소리 박선균 목사 대신 중정에서 고문 당한 사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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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홍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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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담자 : 신동호
일자/장소: 2013.9.3./현대사기록연구원
요약설명 : 전개, 장준하·백남억 등 초청 한일문제 강연회 개최 과정, 5.27시위의 주체와 성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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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지사료 114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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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준하, 고려대에서 ‘민족적 민주주의’ 비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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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자 : 1963.11.5
분류 : 한일협정반대운동 > 야당·재야·일반
요약설명 : 하오, 1962년도 막사이사이상 언론부문 수상자인 장준하 〈사상계〉사 사장은 고대학생총회가 마련한 학술사상 강연회에서 “우리에게 없는 것은 정책이지 민족주의가 아니다”라며, 박정희정권의 ‘민족적 민주주의’박정희는 대통령선거 당시 벌였던 윤보선 후보와의 사상논쟁에서 이른바 ‘민족적 민주주의’를 내세웠는데, 그것이 민족주의 정치노선을 상징하는 담론으로 인식되면서, 지식인들과 대학생들이 민족적 민주주의에 큰 관심을 가졌다. 그러나 이러한 관심은 얼마 후 박정희 정권의 한일협정 추진 과정에서 거대한 분노로 바뀌게 된다.(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한국민주화운동사 1』,돌베개, 2008, 386쪽) 한편 민주주의라는 말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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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 교섭은 식민화 초래” ‘대일굴욕외교반대범국민투쟁위원회’, 전국 유세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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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자 : 1964.3.15
분류 : 한일협정추진 > 야당·재야·일반
요약설명 : 경계하라) 지금과 같은 굴욕적 자세로 타결될 때 한국은 일본의 경제적 식민지가 된다. 일본은 침략근성을 버리지 않았다. ▶윤보선(한일회담을 즉시 중지하라) 박정희 정권은 국가와 민족을 위해 한 일은 하나도 없다. 평화선은 국방선이며 우리의 사활을 결정하는 주권선인데 절대로 이를 양보할 순 없다. 지금의 회담을 즉각 중단하고 새로운 바탕에서 새로운 회담을 열어야 한다. ▶장준하(일본의 경제실력과 한국경제부흥) 미국 경제의 예속을 못 벗어난 일본자금으로 한국의 부흥은 불가능하다. 정보정치를 하는 박 정권에 돈 대줄 나라는 일본밖에 없다. 그것은 한국을 일본의 시장으로 확보하기 위해서다. 평화선을 양보하면 3년 내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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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일굴욕외교반대범국민투쟁위원회, 4만 청중 매국외교 규탄 “평화선, 3억 불과 바꿀 수 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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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자 : 1964.3.21
분류 : 한일협정반대운동 > 야당·재야·일반
요약설명 : 주장했다. 이날 굴욕외교반대강연에서 윤보선, 조재천, 이상철, 조영규, 함석헌, 장준하 등 연사들은 ① 단 3억 불로 평화선을 팔 수는 없다. ② 현 정부가 추진하는 대일협상은 일본의 경제적 식민지화를 초래할 우려가 있다. ③ 한 정권의 수명을 연장시키기 위해 국가백년대계를 그르칠 수는 없다는 점 등을 들어 대일외교의 부당성을 지적하고, 청구액 27억 불, 전관수역 40해리를 내용으로 하는 야당 측 대안을 받아들일 것을 정부에 촉구했다. 그들은 만일 단 3억 불에 평화선을 양보한다면 일본은 평화선 안에서 5년을 넘지 않는 동안에 그보다 더 많은 액수의 고기를 잡아갈 것이라고 경고했다.강연회가 열리기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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