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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조사

"나는 당신에 대한 사형선고가 타당한 판결이었는지 알지 못합니다. 당신에 대한 장황한 공소사실이 엄격한 증명을 통하여 밝혀진 것인지 그것도 확실히 모릅니다. 당신이 저질렀다는 행위가 과연 처단법조에 해당되는지도 확인할 수 없습니다. 오직 법관만이 자기 심증으로 흑백을 말할 수 있겠습니다. 신성한 사법판단에 회의를 품는다는 것은 자칫하면 경솔한 억측이 되기 싶습니다. 그런데도 무작정 판결을 예찬하고 승복할 수만도 없는... 그런 갈등을 드물지 않게 격어야 합니다."

"아직은 살아서 숨쉬는 남은 자 잠재적인 범인이요 언젠가는 죽어갈 운명을 알고 있음에 그 가운데는 생각지도 못한 일로 해서 당신의 그 처참한 길을 뒤따를 사람이 없다고 할 수도 없다. 당신의 죽음 아파하는 것은 곧 앞날의 미확정 사형수를 위한 인간의 절규를 높이는 결의기도 하다. 사라져야 할 최후의 야만에 희생된 당신에게 뼈아픈 애도와 위로를 드린다"


이 글은 한승헌 변호사가 중앙정보부의 조작사건 중 하나인 ‘유럽간첩단사건’에 연루된 김규남 국회의원(1929~1972)의 사형이 집행되었다는 신문기사를 보고, 여성동아 9월호에 ‘어떤 조사’ 제목으로 쓴 글의 일부와 마지막 부분이다. 이 글을 발표하고 한승헌 변호사는 반공법 위반 혐의로 구속되어, 사형제도를 비판하는 글이라고 주장했지만, 당시 검찰은 한승헌 변호사가 김 의원을 옹호해 북한의 선전활동에 동조하고 고무·찬양했다며 기소했다. 한승헌 변호사는 집행유예로 풀려나기까지 9개월간 구치소에 수감되었고, 유죄판결 후 8년간 변호사 자격을 박탈당했다.

유럽간첩단사건은 1960년대 동백림사건 직후 발생한 대표적인 공안조작사건으로 해외 유학 중 동베를린을 방문했던 유학생들을 간첩 활동을 했다는 혐의로 체포하고 기소한 사건이다. 이들은 1970년 대법원에서 사형이 확정되어 1972년에 사형이 집행되었다. 1973년 이 사건과 관련하여 서울대 최종길 교수가 중앙정보부에서 조사를 받다가 의문사하였다.

2009년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는 유럽간첩단사건과 관련하여 김규남 등은 중앙정보부의 불법 연행과 강압적인 협작 고문 가혹행위 등으로 인해 허위자백을 하였다고 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중앙정보부 수사관들은 이들에게 권총을 겨누며 협박하는가 하면 무차별 구타와 고문 등을 한 것으로 밝혀졌다. 이들의 유족들은 2009년 재심을 청구하여 2015년 12월 대법원에서 무죄를 확정했다. 1972년 사형이 집행된 지 43년 만이다. 

김규남 의원 등이 재심에서 무죄가 확정되자, 한승헌 변호사도 자신의 사건에 대한 재심을 청구했다. 2017년 6월 22일, 서울중앙지법 형사항소9부는1975년 한승헌 변호사가 반공법 위반으로 징역 1년6월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은 사건에 대한 재심에서 원심 판결을 파기하고 무죄를 선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