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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1233 ─ 1987.02.07.
비폭력 평화 투쟁의 길
“박종철을 살려내라!”

 1987년 1월 서울대생 박종철 군이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고문받다 사망하였습니다. 이에 시민들은 고인에 대한 추모식을 열고 ‘진실규명’을 요구했습니다. 1월 26일 명동성당에서는 ‘고 박종철 군 추도미사’가, 2월 7일 전국 16개 지역에서는 ‘고 박종철 군 범국민 추도식’이, 3월 3일 전국의 거리에서는 ‘고문추방 민주화 국민평화대행진’이 연이어 개최되었습니다.
 하지만 전두환 정부는 시민들의 요구를 외면한 채 ‘4·13호헌 조치’를 발표했습니다. 이것은 독재권력의 연장을 공개적으로 선언하는 만행이었습니다. 5월 18일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이 박종철 군 고문사망 사건이 독재정권에 의해 축소·조작되었다고 폭로했습니다. 박종철 군 고문치사 사건과 반민주적 호헌조치에 분노한 시민들은 6월 10일 전국적인 항의 집회를 계획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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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0037 ─ 1987.06.12.
시민 농성, 민주항쟁의 구심점
“살인정권 타도하고 민주정부 수립하자!”

 1987년 6월 10일, 전국에서 ‘고문살인 은폐 규탄 및 호헌철폐 국민대회’가 개최됐습니다. 시민과 학생들이 거리의 곳곳에서 ‘호헌철폐’와 ‘독재타도’를 외치며 대대적인 시위에 나섰고, 오후 4시 경부터는 명동성당에 모인 시민들을 중심으로 역사적인 농성이 시작됐습니다.
 부산에서의 시민농성은 ‘부산 가톨릭센터’에서 진행됐습니다. 6월 16일 국제시장과 남포동 근방에서 시위하던 시민과 학생들이 이곳에 모여 시민항쟁의 불길을 되살리는 새로운 투쟁의 중심지를 만들어 낸 것입니다.
 또 하나의 구심점은 연세대와 세브란스 병원이었습니다. 경찰이 쏜 직격탄에 머리를 맞아 중태에 빠진 이한열 군을 지키기 위해 시작된 이 농성은 7월 초 장례식이 거행되는 날까지 계속되면서 6·10민주항쟁의 꺼지지 않는 불꽃으로 타올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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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0032 ─ 1987.06.26.
거리에서 다시 찾은 민주주의
“모이자! 6월 10일 국민대회에!”

 6월에 들어서면서 비폭력적이고 평화로운 방법으로 민주화를 요구하던 시민들이 본격적으로 직접 행동에 나서기 시작했습니다. 6월 10일 전국 22개 도시에서 개최된 ‘고문살인 은폐 규탄 및 호헌철폐 국민대회’에는 24만 명이, 6월 18일 16개 도시 24개소에서 펼쳐진 ‘최루탄 추방의 날’에는 150만 명이, 6월 26일 34개 도시와 4개 군에서 진행된 ‘민주헌법 쟁취를 위한 국민평화대행진’에는 130만 명이 넘는 시민이 참여했습니다.
 민주주의를 다시 되찾기 위한 시민들의 직접행동은 6월 내내 이른 시간부터 늦은 저녁까지 전국의 거리에서 매일매일 반복되었습니다. 폭력 경찰의 무자비한 진압작전에 때로는 도망도 가고 연행도 되고 크고 작은 부상도 입었지만 마침내 전두환 독재정권으로부터 ‘6·29선언’이라는 항복을 받아내었습니다.
739347
739347 ─ 1987.09.03.
1987, 전진하는 노동자
“노동3권 보장하라!”

 6·10민주항쟁이 진행되면서 노동자들의 참여도 점점 늘어났습니다. 낮에는 시민과 학생이 시위를 주도하고 저녁에는 일터에서 퇴근한 노동자들이 항쟁의 주역이 되었습니다. 도심에서는 ‘넥타이 부대’인 사무직 노동자들이 시민들과 함께했고, 공단이 있는 지역에서는 산업노동자들이 시민항쟁의 가장 최전선에 우뚝 섰습니다.
 노동자들은 거리에서 얻은 6·10민주항쟁의 경험을 자신들의 일터로 가져갔습니다. 민주주의를 위한 저항의 경험은 저임금과 장시간 노동, 병영적 노동통제로 대표되던 열악한 노동환경을 개선하고 노동악법 철폐와 민주적 노사관계 수립, 노동 기본권 증진 등 일터에서의 민주화를 이루는 중요한 초석이 되었습니다. 1987년 7월부터 세 달간 전국적인 규모로 진행된 노동자들의 거대한 투쟁은 6·10민주항쟁의 연장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서울지역 6·10민주항쟁도 │ 이정수 그림
서울지역 6·10민주항쟁
살아있는 민주주의의 역사

 서울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역동적인 역사를 만들어 온 곳입니다. 대한민국의 수도답게 이곳은 정치와 경제, 문화, 예술의 중심지이면서 동시에 ‘4·19혁명’과 ‘6·3한일협정반대운동’, ‘6·10민주항쟁’과 ‘촛불집회’의 주요 무대였습니다. 서울을 보면 우리 역사와 민주주의가 어떻게 발전해 왔는지 알 수 있습니다.
 1987년 6·10민주항쟁에서 ‘명동성당’은 시민항쟁의 구심점이었습니다. 이곳에서 시민들은 ‘고 박종철 군’을 추모하고, ‘고문치사 사건’에 대한 진실규명 투쟁을 진행하였으며, 농성장을 설치했습니다. 뜨거운 6월의 한 달 동안 을지로나 퇴계로, 명동 등 서울의 거리는 전두환 독재권력에 저항하는 항쟁의 장소였습니다. 이렇게 서울은 시민들의 힘으로 민주주의를 되찾아 오는 해방의 공간이었습니다.
대전지역 6·10민주항쟁도 │ 이정수 그림
대전지역 6·10민주항쟁
시민과 학생이 함께 만든 대동 세상

  대전에서 6·10민주항쟁은 대전역과 옛 충남도청 사이 1.5km의 중앙로를 중심으로 펼쳐졌습니다. 이곳은 대흥동성당과 동양백화점, 소청1번가, 홍명상가, 중앙데파트, 대전극장통, 아카데미극장 등이 자리하고 있는 곳입니다. 대전지역에서 6·10민주항쟁이 본격화한 것은 6월 10일 개최된 ‘박종철 고문살인은폐 규탄 및 호헌철폐 국민대회’였습니다. 이날 대전 시위는 밤 12시까지 이어졌습니다.
 대전에서 가장 기념비적 시민항쟁의 날은 6월 15일입니다. 학내집회를 마친 7천여 명의 충남대생이 유성에서 대전역까지 장장 10km를 행진했고, 중앙로에서 목원대와 한남대 학생들, 그리고 시민 1만 여명과 만나 ‘호헌철폐를 위한 범시민대회’를 개최하였습니다. 6월 한 달 동안 대전에서는 50만 명이 넘는 시민들이 6·10민주항쟁에 참여했습니다.
인천지역 6·10민주항쟁도 │ 이정수 그림
인천지역 6·10민주항쟁
노동자가 앞장선 시민 항쟁

 인천지역에서 6·10민주항쟁은 시민과 학생, 그리고 노동자가 중심이 되어 진행되었습니다. 인천은 경인선 철로 북쪽으로 공단이 모여 있고 남쪽으로 일반 시가지가 펼쳐져 있습니다. 이러한 지역 특징으로 인해 인천에서의 시민항쟁은 주로 시민과 학생, 노동자들이 쉽게 집결할 수 있는 부평역과 동인천역 주변, 그리고 공단 지역에서 진행되었습니다.
 인천은 항구이면서 교육도시인 동시에 노동자들의 도시입니다. 이러한 이유로 인천의 6·10민주항쟁에서는 노동자들의 활약이 두드러졌습니다. 대우자동차와 콜트악기, 한독시계, 동서식품 등이 모여 있는 부평공단에서 퇴근 시간이 되면 노동자들은 반독재 투쟁전선의 맨 앞에 나서곤 했습니다. 이러한 노동자들의 시민항쟁은 7월 이후 전국적으로 시작된 노동자대투쟁으로 확대되었습니다.
광주지역 6·10민주항쟁도 │ 이정수 그림
광주지역 6·10민주항쟁
오월에서 시작된 민주주의

 광주지역에서 6·10민주항쟁은 5월부터 시작되었습니다. 5·18민주화운동 7주기를 맞아 ‘4·13호헌조치 반대 및 민주헌법 쟁취 범도민 운동본부’가 발족하였고, 이에 맞춰 오월정신 계승과 학살 책임자 처벌, 진실규명 운동이 전개된 것입니다. 6월 19일, 원각사 집회에 4만 5천여 명이 넘는 시민과 학생이 집결하면서 광주에서의 6·10민주항쟁은 뜨거워지기 시작했습니다.
 6월 21일에는 일요일인데도 불구하고 오후부터 시내에서 시민과 학생들이 거리를 점거하였고 저녁에는 1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광주공원에 집결했습니다. 광주에서 가장 큰 행사는 7월 초 옛 전남도청 앞 금남로에서 열렸습니다. 경찰의 최루탄에 맞아 사망한 이한열 군을 추모하기 위해 1980년 5월 이후 처음으로 광주 시민들이 다시 금남로에 모였습니다.
부산지역 6·10민주항쟁도 │ 이정수 그림
부산지역 6·10민주항쟁
부마민주항쟁에서 6·10민주항쟁까지

 박정희 유신 정권의 기반을 뒤흔들었던 1979년 부마민주항쟁은 전두환 독재 권력의 몰락을 재촉한 1987년 부산에서의 6·10민주항쟁을 통해 역사적 소명을 완수할 수 있었습니다. 부산에서 펼쳐진 두 번의 시민항쟁은 모두 서면 로터리와 범내골 로터리, 부산역, 남포동, 대청동을 무대로 펼쳐졌습니다. 일자형 간선도로로 연결되어 있어 시민과 학생들이 모여 시위하기에 가장 좋은 장소였기 때문입니다.
 부산에서의 6·10민주항쟁은 치열했습니다. 특히 명동성당 농성에 이어 시작된 ‘부산 가톨릭센터 농성’이 부산 지역 시민항쟁의 구심점이 되면서 6·10민주항쟁의 열기는 더욱 높아졌습니다. 사상공단과 영도 조선소 노동자들이 시민항쟁에 적극 동참했고, 이는 향후 전개될 7·8·9노동자대투쟁의 실천적 토대가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