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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2787 ─ 1960.04.19.
4·19혁명
“죽은 학생 책임지고 리 대통령 물러가라!”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 이승만과 집권세력들은 권력 유지를 위해 1960년 3월 15일 치러진 정·부통령선거에서 불법을 저질렀습니다. 그들은 부정선거와 불법 폭력으로 재집권을 시도하였고, 이는 국민들의 분노를 불러와 4.19혁명이 일어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선거 직전이었던 2월 28일 대구의 고등학생들과 3월 8일 대전의 고등학생들은 이승만 정권의 불의와 부정에 항의해 거리로 나왔고, 3월 15일 선거 당일에는 마산에서 대규모 시위가 시작되었습니다. 4월부터는 서울과 인천, 대전, 수원 등지에서 대규모 국민 저항이 펼쳐졌습니다. 4월 19일 경무대 앞에서 시민들에게 발포한 독재정권은 4월 26일 이승만 대통령의 하야 발표와 함께 무너져 내렸습니다. 4·19혁명이 진행되는 동안 이승만 정권은 총 186명의 국민을 죽음으로 내몰고, 6,000여 명의 시민을 다치게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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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2408 ─ 1964.03.27.
한일협정반대운동
“총칼로 나라를 뺏고 나라 파는 매국 말라”

 5·16 군사 쿠데타로 권력을 탈취한 박정희 정권은 일본으로부터 청구권 자금을 들여와 경제정책과 정치자금으로 활용하려 했습니다. 일본의 사과와 배상을 바라는 국민 여론과 달리, 경제적인 지원에 초점이 된 굴욕적인 한일협정은 국민들의 분노를 불러왔습니다. 국민들은 1964년 3월부터 전국적인 반대 시위를 시작했고, 6월에는 1만여 명의 시민과 학생들이 모여 경찰 저지선을 뚫고 청와대 외각까지 진출하게 됩니다.
 하지만 박정희 정권은 이듬해인 1965년 2월 ‘한일기본조약’ 에 합의하고, 6월에는 정식 조인을, 그리고 8월에는 국회 비준을 강행했습니다. 이에 야당과 시민, 학생들은 다시 적극적인 한일협정 조인과 비준 반대운동에 나섭니다. 하지만 박정희 정권은 폭력적인 진압과 군대까지 동원한 위수령 선포, 시민과 학생에 대한 구속과 수배, 휴교령, 언론통제 등 폭압적인 방법으로 국민들의 정당한 요구를 억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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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4279 ─ 1969.08.09.
3선개헌반대운동
“3선개헌보다 죽음을 달라!”

 박정희 정권은 권력을 연장하기 위해 헌법에 명시되어 있던 대통령 연임 제한 규정을 폐지하고 3선까지 가능하도록 헌법을 개정하려 했습니다. 여기에 맞서 당시 야당이었던 신민당과 재야인사들이 연합해 ‘3선개헌 반대 범국민 투쟁준비위원회’를 결성하고 투쟁에 나섰으며, 전국의 대학생들도 저항 시위를 전개합니다.
 그러나 박정희 정권은 1969년 9월, 국민들의 의견을 무시하고 끝끝내 3선개헌안을 국회에서 변칙적으로 통과시켰습니다. 하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커다란 성과도 있었습니다. 3선개헌 반대투쟁에서 모든 역량을 끌어 모아 연대했던 민주화 세력이 이후 1970년대와 1980년대 민주화운동의 강력한 동력으로 성장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