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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위대, 국회의사당 앞에 집결

오후 2시 5분 경, 종로3가 쪽에서 500여 명의 학생들이 몰려오자 힘을 받은 시위대는 이들과 합세하여 경찰의 포위망을 돌파하고 광화문 쪽으로 전진하였다. 어느새 수백 명의 고등학교 학생들까지 이들과 합류하였다. 세종로 네거리에 이를 무렵에는 수만 명의 시민들이 노골적인 박수와 성원을 보내고, 경찰은 당황한 모습으로 시위대의 뒤를 쫓아올 뿐이었다. 1,200-1,300명 정도가 된 시위대는 오후 2시 10분 경 국회의사당(현 태평로 서울특별시 의회) 앞에 총 집결하였다. 이들은 “마산학생 석방하라!”, “기성세대는 각성하라!”는 등의 구호를 부르면서 의사당 앞에 자리를 잡았다. 또한 연행학생들의 즉시 석방과 폭행경찰관의 처단 등을 내무부장관에게 요구하는 동시에 아래의 4개 항목을 정부에 건의하기로 결의하였다.『고대신보』1960. 5. 3 2면학생들은 자신들의 건의에 대한 정부의 답변을 듣기 위해 “행정부 책임자가 나올 때까지 계속 농성 한다”는 결정을 만장 일치의 박수로 채택하였다.『동아일보』1960. 4. 19 조3면한편 학생회 간부 몇몇은 극비리에 조선일보 지하다방에 가서 ‘백만 학도에게 보내는 호소문’을 작성하였다.고려대학교 학생자치위원회, 131쪽 4월 18일 시위대가 국회의사당 앞에서 결의한 대(對)정부 건의안 1. 행정부는 대학의 자유를 보장하라.
2. 행정부는 이 이상 민족의 체면을 망치지 말고 무능정치, 부패정치, 야만정치, 독재정치, 몽둥이 정치, 살인 정치를 집어치우라.
3. 행정부는 명실상부한 민주정치를 실천하라.
4. 행정부는 이 이상 우리나라를 세계적 후진국가로 만들지 말라.

행정부의 책임자가 나올 때까지 계속 농성한다.
출처 : 안동일·홍기범 공저,『기적과 환상』, 영신문화사, 1960, 214-215쪽 ;『동아일보』1960. 4. 19 조1면
백만 학도에게 보내는 호소문 백만 학도여,
지금 우리들 고대생은 구국 대열의 선두에 나섰다.
불의와 부정에 반기를 드는 공통성을 지닌 우리들 학도는 이 이상 머물러 있을 수 있겠는가.
자유, 정의, 진리를 신봉해 온 우리들 백만 학도는 일어서자.>
역사가 우리에게 준 사명을 완수할 시기는 온 것이다.
백만 학도여,
힘을 모아 민주터전 새로 닦자.
훗날 나라 겨레 복되도록 어서 우리 학도 궐기하자.
출처 : 고려대학교 학생자치위원회, 「자유·정의·진리 되찾기 위해」, 이강현 편,『민주혁명의 발자취 : 전국각급학교 학생대표 수기』, 정음사, 1960, 131쪽
경찰은 계속 병력을 증가시키며 시위대 주변의 교통을 차단하려 애썼다. 또한 시위에 호응하려는 군중과 쉴 새 없이 교통 차단석을 뛰어넘어 시위대에 합류하려는 중·고등학생들을 막느라 여념이 없었다. 시위대는 전우가와 애국가 등을 부르며 기세가 더해갔다. 이들을 무마하고 설득하려고 시도하는 경찰간부에게 학생들은 “경찰은 물러가라”고 외쳤다. 시위학생들은일제히 “학원의 자유를 달라”, “마산사건 학생을 석방하라”고 부르짖었는데 그럴 때마다 일반 시민들도 박수를 보냈다. 덕수궁과 시청 앞 보도에 운집한 군중과 중·고등학생들이 이따금씩 경찰 경비망을 돌파하기도 하였는데, 그럴 때마다 우렁찬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어느새 다른 대학교 학생들도 시위에 합류하여 응원연설을 하였다.『동아일보』1960. 4. 19 조3면오후 4시 경, 학생들은 “행정부의 책임자가 나올 때까지 농성투쟁을 하자!”고 외쳤다. 이 무렵 의사당 근처의 한 다방에서는 양동이에 물을 떠서 학생들에게 갖다 주기도 하였다.『동아일보』1960. 4. 19 조3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