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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광고등학교 학생들, 4·19의 아침을 열다

신설동에 위치한 대광고등학교 학생회 임원들은 4월 18일 고려대학교 학생들이 시위를 하는 것과 경찰로부터 봉변을 당하는 과정을 목격하고 밤을 새워 시위계획을 세웠다.대광고등학교 학생회, 「벅찬 젊은 가슴을 가다듬고」, 이강현 편, 『민주혁명의발자취 : 전국 각급학교 학생대표의 수기』, 정음사, 1960, 107-112쪽 이들은 다음날(19일) 아침 첫 종이 울리면 학생들이 일제히 운동장으로 나오도록 하고, 경로는 동대문을 지나 종로로 해서 세종로를 거쳐 국회의사당 앞으로 가서 연좌하기로 하였다. 결의문 초안도 미리 써놓았다. 또한 빈 밀가루 부대조각을 이어붙여 플래카드도 만들었다.홍영유, 『4월혁명통사』제4권, 천지창조, 2010, 237-240쪽 대광고등학교 학생들의 결의문과 구호 우리는 제2세 국민으로서 아래와 같은 결의를 선포한다.
어디까지나 오늘의 정사를 내일에 물려받을 주인공으로서, 붉게 피 발리고 때 묻은 정사(政事)를 계승받기는 싫다. 그리고 3·15의 불법과 불의의 강제적 선거로 조작된 소위 지도자들은 한시바삐 물러가야 한다.

형제들이여!
대한의 학도여! 일어나라!
피 묻은 국사(國事)를 보고 그냥 있을 수 있단 말이냐!
정의에 불타는 학도이거든, 진정한 일꾼이 되려거든 일어나라!
3·1정신은 결코 죽지 않았다.
우리 조국은 어디까지나 민주 공화국이요, 결단코 독재국가, 경찰국가는 아니다.
법에서 이탈하고, 만행으로 탄압하는 정부를 보고만 있을 수 없어 대광학생들은 평화적인 행위로 시정을 요구하는 바이다.
단기 4293년 4월 19일
대광고등학교 학생 일동
구호
1. 정부는 마산 사건을 책임지라.
2. 학원의 자유를 보장하라.
3. 3·15 협잡선거를 물리치고 정·부통령을 다시 선거하자!
출처 : 대광고등학교 학생회, 「벅찬 젊은 가슴을 가다듬고」, 이강현 편, 『민주혁명의 발자취 :전국 각급학교 학생대표의 수기』, 정음사, 1960, 111-112쪽 ; 홍영유, 『4월혁명통사』제4권, 천지창조, 2010, 239쪽
4월 19일 오전 8시 30분, 드디어 시위가 시작되었다. 3학년 학생들이 선두에 섰고, 2학년과 1학년도 끼어있었다. 처음에는 단숨에 학교 밖으로 달려 나오느라 모두들 여념이 없었는데, 동대문 앞에서부터는 질서가 잡히고 정연한 행렬이 되었다. 이들은 “학생에게는 평화적 데모의 자유가 있다!”, “경찰은 학원에 간섭 말라!”, “민주대한 위하여 학도는 일어나라!”등등의 구호를 외치며 행진하였다.대광고등학교 학생회, 111-122쪽 ; 홍영유, 240-242쪽그러나 종로5가에서 경찰의 첫 저지선에 부딪쳤다. 경찰은 마침 지나가던 오물차 1대를 붙잡아 세우고 그 곁에 백차 2-3대를 세워놓고 방망이를 들고 기다리고 있었다. 학생들을 뒤따르던 선생님 몇 분이 이를 보고 급히 소리쳤다. “앉아라, 앉아! 뭉쳐 앉아라!” 그러나 학생들이 한발 한발 저지선으로 육박하여 백차를 떠밀고 빠져나가려고 하자 경찰들과 푸른 제복을 입은 반공청년단이 방망이를 휘두르기 시작했다. 학생 몇 명이 백차에 실려갔다. 그러는 사이 가로 막았던 차가 밀려나고 학생들은 종로4가 방향으로 쏟아져나갔다. 다시 트럭을 탄 경찰들이 몰려왔다. 화신백화점 앞까지 달려나간 학생들의 뒤로 순경들이 우르르 몰려들어 사정없이 방망이로 내리쳤다. 수가 그리 많지 않던 학생들은 경찰들에게 포위되어 사방에서 발길로 걷어차이고 몰매를 맞았다. 학생들과 함께 있었던 선생님들도 매를 맞고 경찰서로 연행되었다.홍영유, 240-244쪽
오전 9시 10분 경, 교내에 남아있던 200-300명가량의 학생들이 다시 학교 담을 넘어 시위를 강행하였다. 이들은 혜화동 로터리에서 백차를 선두로 3대의 트럭을 타고 온 200여 명의 정·사복경찰들에게 무차별 폭력을 당하고 트럭에 실려 동대문경찰서로 연행되었다.현역일선기자동인 편,『사월혁명 : 학도의 피와 승리의 기록』, 1960, 78-79쪽 ; 조화영 편, 『사월혁명 투쟁사 : 취재기자들이 본 사월혁명의 저류』, 국제출판사, 1960, 88-90쪽비폭력 시위를 하는 학생들에게 왜 폭력을 쓰느냐고 경찰에게 대들던 선생님도 경찰에게 난타 당하고 트럭에 실려 동대문경찰서로 연행되었다. 이들의 함성은 아직 웅성대기만 하고 있던 서울대학교 문리대와 의대 학생들에게 충격을 주었다.홍영유, 244쪽.
대광고 학생들의 시위는 오후에 다시 재개되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학교에 모여 있던 1천 명 가까운 대광고 학생들은 오후 1시 반 경, 다시 나설 준비를 하였다. 이들의 강한 의지에 선생님들도 동행하기로 하고, 떠나는 학생들을 위해 기도도 해주었다. 이번에는 처음의 경험에 비추어 선두에 장대한 운동선수들이 서고, 좌우 옆줄과 맨 뒤에도 주먹이 든든한 학생들로 외곽을 둘러 8열 종대로 스크럼을 짰다. 이들은 교문에서 신설동 로터리를 지나 동대문에서 종로로 들어섰다. 종로2가 화신백화점 앞에서 을지로 입구로 향해 미국대사관 앞을 지나 시청앞 광장에 다다랐다. 이미 군중은 덕수궁 앞까지 가득 찼고, 국회의사당 앞에는 연좌농성을 하는 학생들로 가득 차 있었다. 이때 경무대 앞에서 희생당한 학생을 실은 지프차가 시청 앞으로 질주하여 나오고 있었다. 시위대의 선두는 대한문 앞에서 남대문으로 향하여 행진을 계속하였다. 시경 앞을 지나 한국은행 앞에서 을지로 입구로 돌아 동대문을 거쳐 학교 운동장까지 질서 정연하게 돌아왔다”(홍영유, 246-248쪽 ; 대광고등학교 학생회, 111-122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