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광고등학교 학생들, 4·19의 아침을 열다
어디까지나 오늘의 정사를 내일에 물려받을 주인공으로서, 붉게 피 발리고 때 묻은 정사(政事)를 계승받기는 싫다. 그리고 3·15의 불법과 불의의 강제적 선거로 조작된 소위 지도자들은 한시바삐 물러가야 한다.
형제들이여!
대한의 학도여! 일어나라!
피 묻은 국사(國事)를 보고 그냥 있을 수 있단 말이냐!
정의에 불타는 학도이거든, 진정한 일꾼이 되려거든 일어나라!
3·1정신은 결코 죽지 않았다.
우리 조국은 어디까지나 민주 공화국이요, 결단코 독재국가, 경찰국가는 아니다.
법에서 이탈하고, 만행으로 탄압하는 정부를 보고만 있을 수 없어 대광학생들은 평화적인 행위로 시정을 요구하는 바이다.
대광고등학교 학생 일동
1. 정부는 마산 사건을 책임지라.
2. 학원의 자유를 보장하라.
3. 3·15 협잡선거를 물리치고 정·부통령을 다시 선거하자!
오전 9시 10분 경, 교내에 남아있던 200-300명가량의 학생들이 다시 학교 담을 넘어 시위를 강행하였다. 이들은 혜화동 로터리에서 백차를 선두로 3대의 트럭을 타고 온 200여 명의 정·사복경찰들에게 무차별 폭력을 당하고 트럭에 실려 동대문경찰서로 연행되었다.
대광고 학생들의 시위는 오후에 다시 재개되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학교에 모여 있던 1천 명 가까운 대광고 학생들은 오후 1시 반 경, 다시 나설 준비를 하였다. 이들의 강한 의지에 선생님들도 동행하기로 하고, 떠나는 학생들을 위해 기도도 해주었다. 이번에는 처음의 경험에 비추어 선두에 장대한 운동선수들이 서고, 좌우 옆줄과 맨 뒤에도 주먹이 든든한 학생들로 외곽을 둘러 8열 종대로 스크럼을 짰다. 이들은 교문에서 신설동 로터리를 지나 동대문에서 종로로 들어섰다. 종로2가 화신백화점 앞에서 을지로 입구로 향해 미국대사관 앞을 지나 시청앞 광장에 다다랐다. 이미 군중은 덕수궁 앞까지 가득 찼고, 국회의사당 앞에는 연좌농성을 하는 학생들로 가득 차 있었다. 이때 경무대 앞에서 희생당한 학생을 실은 지프차가 시청 앞으로 질주하여 나오고 있었다. 시위대의 선두는 대한문 앞에서 남대문으로 향하여 행진을 계속하였다. 시경 앞을 지나 한국은행 앞에서 을지로 입구로 돌아 동대문을 거쳐 학교 운동장까지 질서 정연하게 돌아왔다”(홍영유, 246-248쪽 ; 대광고등학교 학생회, 111-122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