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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생시위대, 방송국 점령 기도

시위가 절정에 달한 오후 2시반 경, 태평로 일대의 시위대는 아카데미극장(현 코리아나 호텔 자리) 뒤쪽에 있는 서울중앙방송국 제2방송국의 점령을 기도하였다. 시위대는 탈취한 소방차 2대를 앞세우고 방송국 안으로 들어가려 했으나 문총회관(현 태평로 조선일보 뒤에 위치) 앞에서 경비 중인 군인들을 보고는 발걸음을 돌렸다.현역일선기자동인 편, 102쪽.
군인들이 시내 요소에 경비를 서기 시작한 것은 밤 10시 반 이후 서울시내에 배치된 후이기 때문에 이 시각은 아직 군인이 나올 시각은 아니었다. 따라서 이 기록은 경비병을 군인으로 착각한 것일 가능성이 있다.

무방비 상태였던 남산의 제1방송국에도 수 백 명의 양정고등학교 학생들이 몰려들었는데, 이들의 목적은 그저 시위사실을 정확히 방송해달라고 요구하기 위한 것이었다. 방송국 간부들은 학생들 앞에 나가서 “국영방송으로서는 어쩔수 없지 않느냐”고 설득하였다.한국방송협회,『한국방송 70년사』,1997, 303쪽그러는 사이 근처의 수도방위사령부(현 필동 한옥마을)에서 출동한 헌병들이 이들에게 계엄령이 선포되었음을 알려주었고, 학생들은 질서를 지켜가며 구호와 주장을 외치다가 학교로 돌아갔다.이 내용은 당시 양정고 3학년으로 시위에 참여했던 박종환의 증언이다. 그는 너무 오래되어 구호와 주장이 무엇이었는지는 기억하지 못하였다(홍영유, 『사월혁명통사』 제6권, 천지창조, 2010, 97-98쪽).
일부 기록에는 “5-6명의 경찰이 총을 쏘며 막으려 하였으나 학생들은 이를 무릅쓰고 건물 안으로 뛰어들었다. 그러나 내부시설을 알지 못하여 어리둥절 하다가, 뒷문으로 들어온 해병대원 수 십 명의 설득으로 그곳을 빠져나왔다”고 기록되어 있다(현역일선기자동인 편, 102-103쪽).
김정렬은 자신의 회고록에서 “마침 학생들이 남산 중앙방송국을 점령하려 한다는 정보가 들어와서 일단 축대수리관계로 남산에 주둔하고 있던 공병 2개 중대를 바로 투입하였다”고 하였다(김정렬, 238-239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