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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붕 의장 ‘사퇴고려’담화 발표

이기붕 의장은 23일 오전 11시 자신의 비서 한갑수를 통해 ①보수세력의 합동으로 정당을 개편하고, ②내각책임제를 기조로 한 정치제도의 개혁을 고려하는 동시에, ③부통령의 당선을 사퇴할 것을 고려한다고 발표하였다.『동아일보』1960. 4. 23 호외.
이기붕의 ‘사퇴선언’이 ‘고려’로 된 이유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다양한 설이 있다.
이기붕의 사퇴논의는 그가 6군단으로 피신하였다가 돌아온 다음날인 22일부터 시작되었는데, 그는 아침 8시 그를 방문한 홍진기 내무와 김정렬 국방으로부터 각료들이 이기붕의 사퇴를 합의하였다는 말을 듣고 실신하였다고 한다. 잠시 후 정신을 가다듬은 그는 “내가 무슨 팔자로 정치가가 되어 이 고생을 하는가…”하며 한탄을 하였고, “내가 홀몸이 아니지 않은가? 자유당이 깨지면 어떻게 하나?”하고 걱정을 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그의 사퇴성명은 자유당 간부들에 의하여 ‘사퇴’가 아닌 ‘사퇴고려’로 변조되었다(조화영 편, 『사월혁명투쟁사 : 취재기자들이 본 사월혁명의 저류』, 국제출판사, 1960,340쪽).
•또 다른 기록에서는 이기붕은 22일 오후 3시 경무대로 이 대통령을 방문하여 2시간 동안 요담을 한 후 23일 아침 사퇴 성명을 발표했으며, 이기붕은 사퇴라고 명백히 말했음에도 한희석이 ‘고려’라는 두 글자를 붙여서 발표하였다고 하였다(현역일선기자동인 편, 182-183쪽).
•김정렬에 의하면 이기붕은 이야기를 듣고 잠시 실신하였지만 “내가 뭐 하고 싶어서 하는가. 나는 몸도 약하고, 그걸 할 재간도 없네. 자네들이 이야기 안해도 나는 이미 그만둘 작정이었네”하고 경무대로 이 대통령을 찾아가 의논 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이 대통령은 “그것이 무슨 도움이 되나”하며 언짢아 하다가 김정렬의 진언을 듣고 허락하였다고 한다. 이에 따라 이기붕의 비서였던 한갑수가 밤을 새워 이기붕의 사퇴서를 작성했지만, 자유당 강경파들의 강권으로 ‘사퇴고려’로 발표가 되었고, 이로 인해 민심을 수습하고 국면을 호전시키려던 김정렬 등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고 한다(김정렬, 『김정렬회고록』, 을유문화사, 1993, 252-255쪽).
•조선일보에는 다음과 같이 보도되었다.
“이 성명이 발표되기 3일 전 이기붕 의장은 이재학·임철호·한희석 등 3명의 부의장에게 자신의 사퇴문제를 문의하였는데, 그들은 표면상 사퇴를 만류 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이 의장은 22일 밤 최종결심을 하고 한갑수 비서실장 에게 23일 아침 발표할 사퇴 선언문을 작성케 했는데, 작성자들이 중간에서 다시 사퇴를 만류시키며 “보수합동과 내각책임제를 전제조건으로 사퇴를 고려한다”고 수정한 것이라고 한다. 이날 아침 서대문 이 의장 자택에는 중앙위원회 부의장 한희석 의원이 약 2시간 동안 있었던 사실이 기자에 의해 확인되었다”(『조선일보』1960. 4. 24 조1면).
이기붕의 비서실장이었던 한갑수는 이 문제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서술하였다.
“(23일 아침) 9시 30분 쯤 한희석 부의장과 홍진기 내무장관이 함께 (이기붕의 집으로) 들어왔다. 만송(이기붕)이 한갑수가 쓴 초안을 읽어주니 한 부의장이 “비상계엄 하에서 그렇게 장황하고 눈물 짜는 소리를 하는 것은 맞지 않으니 간단명료하게 합시다”하며 홍진기가 초 잡은 것을 읽으라고 하였다. 시간여를 두고 두 가지 초안을 가지고 논의하다가 한희석의 강력한 주장으로 홍진기의 초안으로 하기로 하였다”는 것이다.
한갑수가 쓴 초안은 다음과 같다.
“친애하는 국민 여러분께
생각하면 할수록 지난 4월 19일은 우리 민족의 슬픈 날이었습니다. 더구나 이 슬픈 날이 불초한 본인의 탓이라고 생각하면 이 하늘 아래 어느 구석 몸 둘곳을 모르겠습니다.
본인은 지난 3·15선거가 부정이니 아니니 하고 이 자리에서 변명할 의사는 조금도 없습니다. 그것이 부정이었든 아니었든 간에 불초 이기붕이 ‘부통령당선’이라는 사실만 없었더면 이런 사태는 있었을 리 만무한 것만은 명백한 일입니다. 설혹 지난 선거가 부정이 많았다 치더라도 이기붕이란 인물이 국민의 두터운 신망을 받고 존경을 받는 인물이더라면 이런 사태가 일어날 리는만무했던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할 때 국민 앞에 송구하고 미안하기 그지없을 뿐입니다.
불초 이기붕은 국민 앞에 머리를 조아려 사과드리며 이에 부통령 당선을 사퇴하는 동시에 일절의 공직으로부터 물러나서 남은 생애를 한 사람의 평민으로 조국 발전에 이바지할 것을 결심하였습니다.
본인을 아껴주시는 여러분 가운데는 이기붕이가 명리(名利)에 눈이 어두워 추한 모습을 이끌고까지 살지는 않으리라는 것을 알아주실 분도 계시리라고 믿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소요스러운 것은 남의 웃음거리가 될 뿐 아니라 공산야수들에게도 하나의 침략의 기회를 주게 될 것이니 국민 여러분은 깊이 살펴주시기 바랍니다.
이번 일에 적지 않은 사상자와 공공기물의 파괴가 있었다는 것은 가슴 아픈 일입니다. 다시는 이런 슬픈 일이 없어야 하겠습니다.
과거 수 년간 본인 미미한 정치생활에 있어서 또는 사적 생활에 있어서 지도와 성원을 베풀어주신 여러분께 충심으로 감사하며, 이번 선거에 있어서 본인의 당선을 위하여 애써주신 국민 여러분과 자유당 동지 여러분께 깊이 사과의말씀을 드립니다. 위대하신 이승만 대통령께서 영도하시는 가운데 이 나라 이 민족의 무궁한 번영이 있기를 빌겠습니다.
본인은 언제까지나 국가 민족을 위하여 충성을 다하시는 국민 여러분과 함께있을 것을 맹서합니다.
4293. 4. 22(전날짜로 하고 23일에 발표할 작정이었음) 이기붕”(한갑수, 「우남과 만송」, 『신동아』1965. 9월호, 255-257쪽).
발표한 담화문은 다음과 같다.
이기붕 의장 ‘사퇴고려’담화 전문 본인은 현 사태의 수습과 정국의 안정을 기하기 위하여 보수 세력의 합동으로서 정당을 개편하고 내각책임제를 기조로 한 정치제도의 개혁을 고려한다. 이 점에 있어서는 우리 당의 총재이신 이 대통령과도 이미 합의를 본 바 있다. 본인은 부통령의 당선을 사퇴할 것도 고려한다. 출처 :『동아일보』1960. 4. 23 호외, 1960. 4. 24 조1면 ;『서울신문』1960. 4. 23 1면 이날 이기붕은 “마음의 준비가 되어있지 않다”는 이유로 기자들의 회견요청을 거절하고, 비서 한갑수를 자신의 집 정원에 내보내 이 성명을 발표하게 하였다. 성명에는 그가 정계에서 은퇴할지의 여부는 전혀 밝혀져 있지 않으며, ‘부통령 당선의 사퇴를 고려한다’는 것이 어떤 시기나 상황을 전제한 것인지의 여부도 나타나있지 않았다. 이 성명에는 이승만 대통령이 12년 동안 계속되어온 대통령 중심제를 드디어 포기하였다는 것이 뚜렷이 나타나 있기는 하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내각책임제가 종전의 국무총리제의 강화 정도인 것인지 순수한 내각책임제의 실시를 말하는 것인지도 분명하지 않았다. 이에 『조선일보』는 그의 성명이 오히려 정당개편과 내각책임제 개헌에 자신이 적극 참여할 수도 있다는 인상을 주고 있다고 평하였다.
이기붕 의장은 성명을 발표하기 전 이날 아침까지 연 3일 동안 경무대로 이 대통령을 방문, 요담하였다.『조선일보』1960. 4. 23 석1면
그런데 주한미군사령부가 신뢰할만하다고 평가한 정보 보고에 의하면 이기붕의 사퇴고려 성명은 22일 이기붕이 이승만과 만나 서로 이야기한 내용과 다르다고 한다. 즉 22일 이기붕은 이승만 대통령을 만났을 때 자신의 사퇴 문제만을 언급하고, 내각제 개헌 문제는 이야기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대통령에게 한 말과는 달리 23일 갑자기 사퇴를 ‘고려’하고 내각책임제 개헌을 언급하는 성명서를 발표하여 이승만 대통령을 극단적으로 분노하게 만들었다고 미군 정보기관은 보고했다.「주한미군사령부가 합동참모부에 보낸 전문」, 1960. 4. 24, April 2/2, box75, Central Decimal Files 1960, RG2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