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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과 하나 된 시위대

밤 8시 경, 어둠은 짙어졌는데 시위군중은 더 많아졌다. 이즈음 시위대의 주력은 17-18세의 소년층이었다. 처음에는 2대만 동원되었던 탱크는 늘어가는 군중과 비례하여 6대로 증가되었다. 그러나 경비군들은 시위를 제지할 수 없었고, 경비대열을 유지하지 못하였다. 시민이나 학생들도 시위질서를 갖추지 못하였다. 조직 없는 시위군중 속엔 대표자가 없어 흥분한 군중들을 진정시킬만한 주인공도 없었다. 이와 같은 사태를 무마하기 위해 군은 병력을 계속 증가하였다. 나중에는 사단장 조재미 준장까지 출동하였지만 군중은 급거 출동한 탱크와 다수군대에 오히려 환호와 박수를 보냈다. 사단장과 연대장은 최루탄 사용을 금지했다. 군인들이 멘 총대는 군중들에게는 아무런 자극을 주지 못하고, 그저 1개 대대 병력이 한 줄로 시위대를 막아 중앙청 쪽으로만 행진을 하지 못하도록 막았을 뿐이다.
시위군중 중 다수를 차지하는 10대의 소년들은 탱크에 뛰어올라 만세를 부르는가 하면 헌병 지프차에 올라타고 소리 높여 구호를 부르기도 했다. 사단장이 군중들에게 “구속된 전 학생을 오후 7시에 무조건 석방하였다”며 해산할 것을 당부했다. 그러나 대다수의 군중은 여전히 흥분상태에서 분산되지 않고 열광하였다. 이날 밤 종로 일대와 동대문 및 성북경찰서의 경찰들은 전부 철수해 경찰의 모습은 어디에서도 볼 수 없었다. 밤이 깊어질수록 군중의 열기는 더 높아져만 갔다. 일부 시위대는 스크럼을 짜고 서대문 방면으로, 종로 방면으로, 시청 방면으로 움직였다. 밤하늘이 터져라 사방에서 외치는 함성은 서울 하늘을 진동시켰다.『동아일보』1960. 4. 26 석1면 ; 현역일선기자동인 편, 『사월혁명 : 학도의피와 승리의 기록』, 1960, 115쪽 ; 동아일보 기자, 256-266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