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 네거리에서 중앙청으로
9시 20분 경, 광화문 네거리는 들어설 데가 없을 정도로 메워졌다. 약 200명가량의 군인들은 횡렬 2열로 서서 중앙청에 이르는 길이 50미터의 차도와 보도를 완전히 봉쇄하고 시시각각으로 수가 불어가는 군중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때 약 1개 중대가 탱크를 앞세우고 군중 쪽으로 다가왔다. 이리저리 탱크를 피하면서 비켜서지 않던 군중은 갑자기 소복한 여인 하나가 탱크 위에 기어올라 만세를 부르는 것을 계기로 삽시간에 탱크에 기어올랐다. 처음에는 지휘장교와 기관총수가 기어오르는 학생들을 내려 보내려고 애를 썼으나 도저히 가망이 없자 시위대를 실은채 행진하였고, 나중에는 시위대의 말을 좇아 이리 갔다 저리 갔다 하였다. 때때로 군중들의 열광은 도를 넘치는 일도 있었으나 군인들은 공포 1발도 쏘지 않았다.
군중의 수가 점점 가중되면서 일부가 중앙청 쪽으로 꺾어 올라갔다. 시위대는 “경무대로 가자”고 환호를 올리며 제1바리케이드를 돌파, 국제전신전화국(현 KT 본사) 앞까지 진출했다. 이에 따라 군중의 물결과 탱크에 개미떼 같이 달라붙은 학생들이 애국가를 부르면서 뒤따랐다. 그러자 중앙청 정문 앞에 대기하고 있던 강력한 제2바리 케이드에서 최루탄 4개를 발사하여 네거리는 아우성의 도가니가 되었다. 그러나 시위 대가 계속 밀려닥치자 계엄군은약 3분간수 백 발의 공포를 발사하면서 뒷걸음쳐중 앙청 쪽으로 향하였다.
조선일보는 “최루탄 10여 발을 쏘았으 나 허사가 되자약 3분간에 걸쳐 공포를 발사했다”고 보도하였다(『조선일보』 1960. 4. 26 석3면).
오전 10시 15분 경, 군중은 “3천만 동포 총궐기하라!”는 플래카드를 지프차 위에 내세우고, 반공회관 앞까지 진출했다. 제4경비선인 경기도청 앞까지 시위대의 물결이 진출하자 군대가 공포를 발사, 시위대는 반공회관까지 후퇴했다. 군대는 트럭 4대로 경비병을 증강하고 반공회관 앞에 다시 바리케이드를 쳤다. 군중의 물결은 또다시 제1경비선 사병들과 대치하였다. 그러나 곧 불타버린 반공회관 앞에서 중앙청 쪽으로 가는 탱크에도 시위대가 가득 올라타고 환성을 지르며 전진했다. 시위대는 “국민의 군인 환영”이라고 쓰인 플래카드와 함께 “국군 만세!”소리를 외쳐댔다. 시위대가 경기도청 앞에 철조망으로 가설되어있는 바리케이드와 군인의 저지선 앞에서 옥신각신하는 동안 청소년들은 연도에 있는 가옥의 지붕과 담을 타고 중앙청 앞으로 몰려들기 시작하였다.
이때, 일반인과 대학생, 고등학생 등 14명의 군중대표가 탄 차가 계엄사령부의 조재미·이석봉 준장의 안내로 경비망을 뚫고 경무대로 향하였다. 이들은 군중을 향하여 “이 대통령과 만나 요구조건을 말할 테니 기다리시오”하고 외쳤다. 광화문 네거리 외에도 전 시내는 이미 대통령 사퇴와 3·15부정선거 원흉처단을 부르짖는 군중들이 완전히 지배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