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전 10시 30분 경, 이승만대통령의 사퇴 성명을 알리는 신문사의 보도 스피커 소리를 들은 시민들은 마치 해방을 맞은 듯한 기분에 수 만 군중이 모여 곳곳에서 환호성을 올렸다. 영도 앞과 서대신동에서 내려오던 시위대원들은 시청 앞에서 합류하여 우남공원 쪽으로 향하였다. 또 10시 40분 경 국제시장 근처에 모인 약 800여 명의 부녀자들이 우남공원 쪽으로 시위를 감행하였다. 이들은 광복동에 있는 자유당 청사 내에 뛰어들어 커다란 자유당 간판을 내동댕이치는가 하면 당사를 완전 점령하였다. 이어 군중들은 당사 한복판에 걸어둔 이 대통령과 이기붕의 사진 및 초상화 등을 모조리 찢어버렸다.『국제신보』1960. 4. 27 조3면, 석3면 ;『동아일보』1960. 4. 27 조3면. 조선일보는 부산시위 참가자 수를 5만 명으로 추산하였다. 또한 이기붕의 초상화를 찢은 것이 아니라 떼어내 피칠을 한 다음 시위군중이 높이 들고 다녔다고 한다(『조선일보』1960. 4. 26 석 3면).
같은 시각, 도청 앞에서는 70-80명의 청소년들이 주류가된 시위대가 인근 주민들과 학생들의 호응으로 삽시간에 도청 앞 도로를 메웠다. 이들은 도청 철문을 뛰어넘고현 관으로 들이닥쳐 돌팔매로 문짝들을 박살냈다. 군대는 증원부대까지 동원되어 겨우 청사 안에 난입한 군중들을 밀어낼 수 있었다.
오전 11시 경 부산시청 앞에 모인 군중들도 시위대를 진압하려고 출동한 탱크에 뛰어오른 학생들이 이 대통령이 사퇴하겠다는 성명서를 발표했다는 말을 전파하자 만면에 희색을 띄우며 만세를 불렀다. 민주당 경남도당에서는 태극기를 달고 “이 대통령은 물러갔다”는 벽보를 써 붙였으며, 각 신문사에서 뿌리는 호외에 시민들은 환호성을 올리면서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동아일보』1960. 4. 27 석3·4면 ;『국제신보』1960. 4. 27 석3면 거리에는 부산대학교와 동아대학교를 비롯해 이전에 시위에 참가하지 못했던 여러 학교들의 이른바 “미안 데모”사태가 벌어졌다.『동아대학보』1960. 5. 1 1면 ; 조화영 편, 230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