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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 대통령, 사퇴 용의(用意) 중대성명 발표

이승만 대통령은 26일 오전 10시 30분 경, “국민이 원한다면 대통령직을 사임하겠다”는 중대성명을 발표하였다.이승만 대통령의 사퇴성명 발표시각은 자료마다 조금씩 차이가 있다. 조선일보와 한국일보, 그리고 허정 회고록에서는 ‘오전 10시’라고 기록하였고 (『조선일보』1960. 4. 26 석1·3면 ;『한국일보』1960. 4. 26 석1면 ; 허정, 220쪽), 동아일보와 일부 기록에서는 “이 대통령이 10시 20분 계엄사령부로 하여금 자기의 뜻을 발표케 하였다”고 한다(『동아일보』1960. 4. 26 호외, 1960. 4. 27 조1면 ; 현역일선기자동인 편, 200쪽). 또 따른 기록은 “10시 30분, 라디오의 임시 뉴우스는…”이라고 하였다(동아일보 기자, 264쪽). 그러나 이 대통령의 사퇴성명을 방송했던 방송국의 기록에는 “이 대통령의 하야성명이 이날 오전 11시 경 KBS의 임시뉴스를 통해 전국에 방송되었다”고 한다. 사퇴성명녹음은 당일 저녁 6시 30분, 7시, 7시 30분, 9시 이렇게 모두 4차례 방송되었다(한국방송협회, 『한국방송 70년사』, 1997, 303쪽). 그런가 하면 일부 기록에서는 “이 대통령은 극적으로 이날(26일) 하오 2시 대통령직 성명을 내놓는 동시 하야하겠다고 선언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으며(현역일선기자동인편, 123쪽), 또 다른 기록에서는 “대통령은 상오 10시 서울운동장에서 담화문을 발표하고 국민이 원하는 일은 무조건 수락하겠다고 밝혔다”고 서술하였다(안동일·홍기범 공저, 284쪽).
그러나 당시 한국의 상황에 초미의 관심을 가지고 있던 미 대사관 자료에 의하면, 오전 10시 15분, 김정렬 국방장관이 매카나기 미 대사에게 이 대통령이 마음을 정했다는 전화를 했으며, 10시 20분, 라디오 방송에서 곧 대통령의 중대발표가 있을 것이라는 예고방송이 나왔다고 한다. 이를 듣고 10시 27분 매카나기 미 대사 등이 경무대로 향하는 동안인 10시 30분, 대통령사퇴 성명이 공표되었고, 미 대사 일행은 10시 35분에 경무대로 들어가 10시 40분에 이 대통령과 김정렬, 허정 등과 면담하고 11시 27분에 경무대를 나온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이 글에서는 미 대사관의 자료를 기준으로 하여 사퇴성명이 공식 발표된 시각을 오전 10시 30분으로 기록하였다(Glenn W. LaFantasie, Foreign Relations of the United States, 1958-1960, Vol.ⅹⅧ Japan;Korea, pp.639-644).
•다음은 이 대통령의 사퇴성명 발표와 관련하여 가장 긴밀한 관계에 있던 3인의 기록이다.
김정렬은 자신의 회고록에서 25일 저녁 시위로 인해 26일 오전 1시부터 다시 비상계엄을 연장하기로 한 후 경무대 대기실에서 밤을 지내고, 26일 아침 일찍 이 대통령에게 가 이상의 사태를 보고하였다고 한다. 그러자 대통령은 침통한 표정으로 “사태가 왜 이리 되었느냐?”며 한참 후에 “내가 그만두면 한사람도 안 다치겠지?”라고 하여 사퇴의 뜻을 비추었다고 한다. 그리고는 박찬일 비서에게 자신이 직접 구술한 것을 받아적으라 했는데, 구술이 거의 끝나갈 무렵 송 계엄사령관이 와 이 내용을 듣고는 “이기붕 의장이 공직으로부터 떠난다는 대목을 하나 더 첨부하면 좋겠다”고 하여 이를 포함해 서문과 4개 항목으로 구성된 대통령 사퇴성명서가 만들어졌다고 한다. 성명서가 작성되는 동안 김정렬은 최치환 공보실장에게 모종의 중대한 성명이 나갈테니 미리 예고방송을 해 놓으라고 전달하였고, 성명서가 완성되는 즉시 박찬일 비서가 최 공보실장에게 이를 알리고 발표토록 했다는 것이다(김정렬, 259-264쪽).
송요찬은 26일 아침 9시 경, 경무대로 가 이날 밤을 새운 김정렬과 함께 이 대통령을 면접하였는데, 이 대통령은 “사태가 어떤가?”하고 질문하였으며, 그는 “총을 쏘지 않고는 수습할 수 없는 단계에 이르렀습니다”하고 보고하였다. 이 대통령은 “총을 쏘아서야 되나. 자네는 어떻게 생각하는가?”하고 반문하였으며, 이에 대하여 송요찬은 “저도 절대 동감입니다”라고 말하였다. “그러면 어떻게 하나”하는 이 대통령에게 송요찬은 “지난번 대통령께서 발표하신 성명이 두 가지 부족한 점이 있습니다. 이기붕씨와 손을 끊는다 하셨는데 아직 일부에서 권력을 다시 더 연장시켜보려는 움직임이 있으며, 또한 이번 선거를 다시 한다는 말씀이 빠진 것 같습니다”하고 진언하였다. 이때 이 대통령은 “국민이 나를 그만두라면 듣겠으며, 국민들이 하자는 대로 하겠다”라고 말하고 박찬일 비서를 불러 성명서를 적어보라고 하였다(육군본부군사감실 편, 41쪽). 허정에 의하면 26일 아침 6시 경 이 대통령에게 사퇴를 권고할 결심을 하고 경무대로 가보니 이승만은 이미 사표를 결심하고 구(具)비서에게 “국민이 원한다면 대통령직을 사임하겠다”는 성명서를 구술하고 있었다고 한다. 이 대통령은 구술을 마치고 나서 매카나기 미 대사와 매그루더 유엔군 사령관을 부르라고 김정렬에게 말하였는데, 이는 성명발표에 앞서 사퇴를 통고하기 위해서 였다고 한다(허정 회고록, 218-220쪽).
동아일보 기자 최원각은 당시의 긴박한 상황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서술하였다. “이승만이 사퇴를 결심할 때 김(정렬) 국방장관과 송(요찬) 계엄사령관, 그리고 박(찬일) 비서관이 있었다. 이 사퇴 결정이 이루어지고 성명이 정서되는 동안 세종로 일대에서 데모대는 시시각각으로 경무대를 향하여 밀려오고 있었으며, 미 대사는 이 대통령을 방문할 준비를 갖추고 있었고, 또한 학생대표들이 계엄사령부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이렇게 긴박한 상태에서 ... 김(정렬) 장관이 최(치환)공보실장을 불러 중대성명이 있으니 방송국과 연락하라고 하여 방송국은 중대성명이 발표된다는 말을 되풀이 하면서 정서가 끝나 이 대통령이 결재할 것을 기다렸다. 이리하여 전화를 통한 구두연락으로 이 역사적인 사퇴성명은 발표된 것이다. 이리하여 14명 중 5명의 학생대표가 이 대통령을 면접하였고, 미 대사 매카나기씨도 10시 반에 이 대통령을 면접하였다. 이때는 벌써 하야성명이 발표된 후였으며, 결사적으로 경무대를 향하고 있는 데모대를 해산시키기 위하여 모든 스피커가 동원되어 하야성명을 발표하고 있을 때였다. 미 대사 매카나기씨의 면접지연은 … 미 대사관의 압력에 의하여 했다는 오해를 받을까보아 취해진 지연전술이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고, 또한 경무대는 데모대에 대한 공포에 떨고 있었던 것이다”(최원각, 「계엄령 하의 비사」, 조화영편, 『사월혁명 투쟁사 : 취재기자들이 본 사월혁명의 저류』, 국제출판사, 1960, 347-349쪽).
이날 발표된 이 대통령의 성명은 다음과 같다.
이승만 대통령 사퇴 성명 나는 해방 후 본국에 돌아와서 여러 애국 애족하는 동포들과 잘 지내왔으니 이제는 세상을 떠나도 한이 없으나 나는 무엇이든지 국민이 원하는 것만이 있다면 민의를 따라서 하고자 한 것이며, 또 그렇게 하기를 원했던 것이다.
보고를 들으면 우리 사랑하는 청소년 학도들을 위시해서 우리 애국 애족하는 동포들이 내게 몇 가지 결심을 요구했다 하니 내가 아래서 말하는 바대로 할 것이며, 내가 한 가지 부탁하고자 하는 것은 우리 동포들이 지금도 38 이북에서 우리를 침입코자 공산군이 호시탐탐하게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명심하고, 그들에게 기회를 주지 않도록 힘써주기를 바라는 바이다.

1. 국민이 원한다면 대통령직을 사임하겠다.
2. 3·15선거가 많은 부정이 있다고 하니 다시 선거하도록 지시하였다.
3. 선거로 인연한 모든 불미스러운 것을 없이 하기 위하여 이미 이기붕 의장에게 공직에서 완전히 물러나도록 하였다.
4. 내가 이미 합의를 준 것이지만 만일 국민이 원한다면 내각책임제 개헌을 하겠다.
출처 :『동아일보』1960. 4. 26 호외, 1960. 4. 27 조1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