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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사제단, 답동성당에서 김병상 신부를 위한 특별 기도회 개최

인천교구 기도회 사건과 관련하여 인천교구 사제단이 답동성당에서 지학순 주교와 사제 60여 명, 신자 1,1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기도회를 개최하였다. 나길모 주교는 강론에서 ‘김병상 신부의 검찰송치는 슬픈 일이나 김 신부의 행동은 양심적인 행동으로 한국 주교단의 가르침에 부합하는 것’이라고 강조하였다. 미사가 끝난 후 정의구현전국사제단은 성명서, 「우리는 왜 이렇게 해야만 하는가?」를 발표하면서 단식기도에 임하는 사제단의 결의를 천명하였다. 기도회 후 16명의 사제들은 일주일간의 단식기도에 들어갔다. 기쁨과 희망 사목연구소, 『암흑속의 횃불』 제2권, 가톨릭출판사, 1996, 231쪽.「우리는 왜 이렇게 해야만 하는가?」 기쁨과 희망 사목연구소, 『암흑속의 횃불』 제2권, 가톨릭출판사, 1996, 335~339쪽.
우리는 오늘 주님의 말씀을 소리 높여 외치시다가 기관에 연행되어 아직 풀려나오시지 못한 김병상(필립보) 부교구장 신부님을 비롯하여 이미 수감 중이신 두 분의 신부님들 그리고 그분들과 함께 감옥에서 영육간 고통 중에 계신 수많은 애국인사들을 위하여, 또한 하루속히 이 땅에 하느님의 정의를 실현하기 위하여 하느님께 우리의 간절한 기도를 바치려고 또다시 이 자리에 모였습니다.
정의의 태양이신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오늘 우리들의 마음을 비추시어 우리로 하여금 사사로운 감정에 사로잡히지 말고 주님 말씀의 봉사자로서 오직 주님의 뜻만을 널리 전파하도록 도와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수년간에 걸쳐 거듭해온 수십 차례의 기도회와 주님의 말씀에 따른 우리들의 양심적인 언행에 대하여 혹자는 도대체 왜 교회가 정부의 비위를 거스르면서까지 이런 기도회를 개최하는가 의아해합니다. 심한 경우 불만을 토로하고 있음도 숨길 수 없는 사실입니다. 이러한 사실이 우리들로서는 가슴 답답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미 수차례에 걸쳐 교회의 입장이 밝혀졌음에도 불구하고 오늘 또다시 우리들은 주님의 말씀과 교회 교도권의 가르침에 의거한 우리들의 해야 할 바를 밝히는 바입니다.
40일간 광야에서 단식하며 기도하신 예수께서는 인류의 구원사업을 위한 본격적인 활동을 개시하시면서 구세주로서 당신의 사명을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의 성령이 나에게 내리셨다.
주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으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셨다.
주께서 나를 보내시어
묶인 이들에게는 해방을 알려 주고
눈먼 사람들은 보게 하고
억눌린 사람들에게는 자유를 주며
주님의 은총의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루가 4,18)
성령을 충만히 받으신 주님께서, 기름 부음을 받으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수행하셔야만 했던 사명이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묶인 사람들에게 해방을 알려 주며 눈먼 사람들을 보게 하고 억눌린 사람들에게 자유를 주시는 일이었다면 그분과 똑같이 성령을 받고 기름 부음을 받아 주님의 왕직, 사제직, 예언직을 수행하도록 불리움을 받은 사제들의 사명 역시 예수님의 사명 외에 다른 것일 수 없고 그리스도 신자들의 임무 역시 다른 것일 수 없다고 우리는 확신하는 바입니다.
따라서 김병상 신부님이나 다른 신부님들도 오직 그 하나의 사명을 충실히 하시기 위하여 노력해 오셨지만 그 결과는 전혀 엉뚱하게도 구속이라는 형태로 나타나고 말았으니 종으로서 두 주인을 함께 섬길 수 없는 우리의 나아갈 길이 뚜렷이 명시되어 있다 하겠습니다.
사람이 안식일 법을 위하여 있지 않고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서 있다는 청천의 벽력같은 선언을 하셨기 때문에 당시 고위층에게서 크나큰 미움을 받아 급기야는 죽기까지 하셔야 했던 예수님. 그 예수님처럼 법이 인간을 위해서 있지 않을 때 그 법은 효력이 없고 이미 법으로서의 가치를 상실했다고 주장하시면서 주님의 말씀을 선포하신 김병상 신부님은 어쩌면 그 법을 요구하는 사람들에게서 미움을 산 것은 당연한 일인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법이라는 칼자루를 쥐고 있는 권력과 타협한다거나 심지어 아부하는 행위는 그리스도의 제자들로서는 도저히 양심상 용납될 수 없음을 잘 알고 있기에 우리는 김 신부님과 함께 입을 모아 우리의 믿음을 말과 행동으로 만인 앞에 고백하는 바입니다.
교황 바울로 6세께서는 세계교회를 위한 사목헌장 27항에서 ‘온갖 종류의 살인, 집단 학살, 낙태, 안락사, 고의적인 자살과 같이 생명 자체를 거역하는 모든 행위와 지체의 상해, 육체와 정신의 고문, 심리적 탄압과 같이 인간의 완전성을 침해하는 모든 행위와 또는 노동자들이 자유와 책임을 가진 인간으로 취급되지 못하고 단순한 수익의 도구로 취급되는 노동의 악조건과 같이 인간의 존엄성을 해치는 모든 행위 등은 실로 파렴치한 노릇’이라고 단정하셨습니다.
이미 수년 전 소위 인혁당 사건으로 인하여 고귀한 생명들이 공개재판도 받지 못한 채 형장의 이슬이 되었던 일이나 정계의 모모 인사들이 소문도 없이 사라진 일 등 감히 상상도 못할 일들이 속출했었음을 우리는 압니다. 이러한 행위들은 규탄받아 마땅하다는 교회의 가르침을 믿기에 우리가 그것들의 시정을 부르짖음은 지극히 당연합니다.
그러므로 ‘교회가 언제 어디서나 참된 자유를 가지고 신앙을 선포하고 인간의 기본권과 영혼들의 구원이 요구될 경우에는 우리는 마땅히 정치 질서에 관한 일에 대해서도 윤리적 판단을 내려야 한다’ (사목헌장 76)고 사목헌장은 말합니다.
그러나 교회는 역사적으로 볼 때 교회의 정치 참여 내지는 의사표현이 잘못이라는 그릇된 생각으로 말미암아 너무도 오랜 동안 교회 특유의 권리인 윤리적 판단을 내리기를 주저했음을 시인하면서 부끄러워합니다. 이제라도 어떤 정치 질서에 대해서 윤리적인 판단을 내리고 잘못을 지적, 비판하고 시정을 촉구하는 일은 우리 가톨릭 교회의 의무이며 권리입니다.
정치 질서에 대한 교회의 어떠한 의사표시와 시정 요구도 용납할 수 없다는 현 정부의 태도는 우리 역사에 커다란 오점을 남기는 일입니다. 교황청 정의평화위원회는 “교회가 인권을 옹호해야 할 임무를 맡고 있다는 것은 교회가 인권에 대한 어떠한 침해에 대해서도 과거의 것이든 현재의 것이든 혹은 일시적인 것이든 영속적인 것이든 적극적으로 반항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교회와 인권 78)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또한 교황 바울로 6세는 1973년 12월 유엔에 보낸 메시지에서 “모든 말 없는 불의의 피해자들에게 나는 나의 반항과 탄원의 소리를 보낸다”고 역설하시면서 말 없는 불의의 피해자들이란 종교적 자유를 압박당하고 있는 이들, 폭력에 의하여 제거되고 있는 정치범들이라고 따로 지적하셨습니다.(교회와 인권 79)
제단에서 설교하는 성직자의 설교 내용이 성당 안에까지 공무로 들어온 기관원에 의해서 기록되어 상부에 보고되는 일, 천주교 신자라고 해서 이유 없이 회사를 쫒겨나야만 했다는 일 등은 지금 이 땅에서 행해지는 종교의 자유를 억압하는 행위가 아니고 무엇입니까?
또한 현 정부 체제나 법질서에 대해서는 우리가 외치는 인간 기본권의 신장에 입각한 올바른 지적과 우리의 의사를 제대로 표현할 수 없는 실정은 언론의 탄압이 아니고 무엇이며 어처구니없게도 해고되어 거리를 방황하는 160여명의 기자들은 무엇이 낳은 산물입니까?
그렇기때문에 그리스도를 따라 이웃에게 봉사하며 진리를 위해 목숨을 바치겠다고 다짐한 성직자들이라면 적어도 교황님의 이러한 외침이 그분 개인의 외로운 독백이 아니라는 것을 중명하기 위해서라도 일심단결하여 전 세계를 울리는 함성을 이루어야 하겠기에 우리는 교황님과 함께 그리고 김 신부님을 비롯한 우리의 많은 형제들과 함께 이 땅에 수많은 말 없는 피해자들에게 우리의 반항과 탄원을 보내기를 주저하지 않는 바입니다.
인권이 참으로 침해당하고 있을때에 교회는 결코 중립적인 태도를 취할 수 없습니다. 말 없는 피해자들의 편에 서서 투쟁하여야 합니다. 세계정의평화위원회 위원장이신 로이 추기경은 “우리는 사람보다는 하느님께 더 순종해야 한다는 원칙에 입각하여 독재적 이념을 바탕으로 하는 어떠한 법에도 불복종 내지는 항거할 권리와 의무가 있다” 고 밝히고 이 권리야말로 독재정권의 가르침이나 행위에 반대하는 권리이며 불의와 종교적, 윤리적, 사회적 억압에 대한 도덕적인 저항을 할 수 있는 권리라고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부는 함세웅 신부님에게 해서는 안되었던 저항을 한 죄인으로 판단했습니다. 이러한 현실 속에서 우리가 걸어야 할 노선은 주어진 의무로서 마땅히 해야 할 사명이기에 크리스찬 국민으로서 먼저 사람에게 보다 하느님께 대한 양심적인 순종을 부르짖는 것입니다.
필리핀의 마닐라에서 열렸던 아시아 주교회의 역시 ‘참다운 인권의 실현을 증진시킴과 동시에 언제 어디서나 어느 누구에 의해서나 인권을 유린당하는 이들을 수호하기로 결의'했습니다. 아니 멀리 외국의 예를 들지 않더라도 1975년 2월에 발표한 한국 주교단의 메시지는 ‘부정부패, 사회부패, 인권유린 등을 고발하는 교회의 발언권은 계속 행사되어야 하며 교회는 정치 질서에 대한 윤리적 판단을 내려야 한다’고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사목헌장의 말씀을 재천명하고 있습니다.
진정 한국 주교단의 메시지가 한낱 구호에만 그치는 그 무엇이 아닐진대 우리는 교회의 목소리를 우렁차게 삼천리 방방곡곡에 울려야 하며 여하한 정치체제 하에서라도 윤리적 판단을 내려야 하는 신성한 권리와 의무를 충실히 수행해 나가야 합니다.
이상에서 우리는 우리 주님의 말씀과 교회의 가르침에 비추어 우리나라의 현 실정이 이러한 오늘날 과연 우리가 왜 정의의 실현을 소리 높여 외쳐야만 하는가를 살펴보았습니다. 때문에 우리는 아름다운 십자가가 높이 달려 있는 튼튼한 교회당 안에서 안일한 마음으로 예수를 믿으면 사후에 하느님 나라로 간다는 달콤한 설교만 계속하고 있을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물론 우리의 동료 사제이자 부교구장이신 김병상 신부님과 수감 중인 다른 많은 형제들이 하루 빨리 우리의 품으로 돌아오기를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정부가 요구하는 것은 그분들이 굳게 간직해온 고고한 신념과 그에 따른 모든 언행을 백지화시키고 그분들이 잘못을 시인하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언제든지 석방시켜 주겠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소원은, 아니 지금 옥고를 치르시는 그분들의 소원은 결코 그런 식으로 해서 석방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바라는 것은 정부가 자신의 과오를 인정하고 회심의 표지로 김 신부님과 수많은 애국인사들을 무조건 석방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제 주님 앞에 또다시 이 기도회를 엽니다.
1977년 9월 12일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