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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직교수협의회 「동료교수들에게 보내는 글」 발표

해직교수 18명은 13일 성명서 「동료교수들에게 보내는 글」을 발표하고 지난 3월에 있었던 협의회 발족을 내외에 널리 알렸다. 해직교수들은 성명서에서 모든 교수들은 진실을 말하고 가르쳐야 하며 진정한 민주교육·민족교육을 탄압하는 일체의 행위는 그 누구에 의한 것이든 배격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인권위원회, 『1970년대 민주화운동』 (Ⅴ),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1987, 1988~1989쪽; 기쁨과 희망 사목연구소, 『암흑 속의 횃불』 제3권, 가톨릭출판사, 1996, 212~213쪽.「동료 교수들에게 보내는 글」 기쁨과 희망 사목연구소, 『암흑 속의 횃불』 제3권, 가톨릭출판사, 1996, 253~256쪽.
부당하게 교직에서 추방된 우리는 그동안 비록 학원을 떠나있으면서도 이 나라 대학의 길이 곧 우리 일이라는 충정에는 예나 이제나 다름이 없습니다. 또한 대학다운 대학이 있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진정한 민주사회가 이 땅에 이룩되어야 한다는 신념을 그간의 온갖 시련을 통해 다져왔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우리의 신념과 충정을 좀 더 뜻있게 간직하고자 지난 3월 24일 우선 연락이 가능한 사람들만으로라도 ‘해직교수협의회’를 발족시키기로 결의했고 4.19 열여덟돌을 눈앞에 둔 오늘의 이 모임에서 우리의 간곡한 뜻을 모아 학원 안팎의 여러 동료 교수들에게 전달하고자 합니다.
우리가 학원을 떠난 이래 한국의 대학에는 더러 외형적 발전이 없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교육의 알맹이로 말할진대 교육다운 교육을 거의 찾아볼 수 없는 학원 아닌 학원이 되었다고 말할 수밖에 없겠습니다. 그 원인은 너무나 분명한 것이라고 봅니다. 우리 교육의 대원칙이자 나라의 기본 이념인 민주주의에 등을 돌리고 갈라진 겨레의 하나 됨을 요구하는 민족사의 부름에 귀를 막은 곳에서 진정한 교육이 있을 수 없을 것입니다.
주어진 삶의 진실을 밝히는 일은 대학의 임무이자 인간 양심의 명령입니다. 그리고 옳은 임을 위해 개인의 안위를 돌보지 않는 것은 젊음의 특징이요, 특전입니다. 그러니 진리 탐구의 터전이며 젊음의 본고장인 대학에서 민주주의 아닌 다른 것을 민주주의로 떠받들라고 하고 민족 현실을 외면한 온갖 행태를 마치 민족을 위한 것인 양 몸에 익히라고 강요할 때 학원은 교육의 현장이 아니라 교육하고 교육받는 일을 갖가지 수단으로 가로막고 억누르는 모순의 현장이 되게 마련입니다.
오늘날 정부와 학교 당국이 내세우는 화려한 구호들 자체가 그것을 말해줍니다. ‘공부하는 대학’이란 결과적으로 무엇입니까? 권력이 허용하는 지식만을 전수하고 권력에게 편리한 기술만을 습득하는 것이 곧 대학인의 공부라는 억지가 아닙니까? ‘면학 분위기 조성’은 또 무엇을 말합니까? 대학인으로서 너무나 당연한 비판정신과 자주정신을 봉쇄하기 위해서는 모든 강권이 발동되리라는 공공연한 선언이 아닙니까? 아니 우리 현실에서는 ‘산학협동’이라는 것도 정치권력과 결탁하여 자기네가 부리는 노동자들에게는 옳은 임금도 안 주는 재벌기업체의 손에 학계의 앞날을 내맡기는 무책임한 행위가 아니겠습니까?
이러한 교육부재의 현실은 우리가 아끼는 대학으로 하여금 이제 무슨 이름으로 불러야 좋을지 모를 이상한 곳이 되게 만들었습니다. 삼엄한 병영처럼 조용하기만 하다가 어느 날 갑자기 마치 우리의 아들딸이 아닌 적군을 토벌하는 전쟁터와 같은 수라장이 벌어지기도 합니다. 이런 판국에 학문의 자유를 말하고 스승의 도리를 말하는 일 자체가 차라리 쑥스러울 정도입니다.
이렇게 된 데에는 교수들만으로 어쩔 수 없는 수많은 법률적 제도적 제약과 역사적 원인이 있었음을 우리는 누구 못지않게 잘 압니다. 또한 우리 현실에서 양심대로 불의에 항거하는 제자들이 겪게 될 고난을 예견하는 교수로서 학생들에게 면학만을 촉구하는 것은 스승된 도리라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거기에 멈추지 않고 교수가 곧 외부기관에 의한 학생 감시의 촉수가 되고 심지어 기동타격대의 보조역으로까지 떨어진다면 이는 스승이 되기를 그만둔 정도가 아니고 평범한 인간으로서의 자존심마저 내동댕이친 꼴이 아니겠습니까. 더구나 교육자로서의 자포자기 행위에 해당되는 학생 제적을 당사자의 해명 한마디 안 듣고 대량으로 단행하는 대학 당국자들은 과연 어떤 교육관과 인생관을 가졌기에 그런 용기가 나는 것인지 놀라울 따름입니다. 심지어는 학교 측에서 정부 당국이 요구하는 숫자 이상을 앞질러 제적했다가 뒤늦게 번복하는 사례마저 있었다는 말을 들을 때 우리는 정말 웃어야 좋을지 울어야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어찌 이것이 직접 결정에 나선 몇몇 당국자만의 책임이라고 하겠습니까. 적어도 학생에 대한 사형선고에 해당하는 이 제적 문제에 한해서는 그냥 묵과하는 것만으로도 이미 교육자의 본분을 어겼다는 비난을 막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희생된 제자와 동료들의 운명에 무관심했다는 사실만으로도 곧 대학의 현실을 지성인다운 냉철한 눈으로 보지 못했다는 비판을 면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그들은 지금의 학원에서 없어진 민주교육, 민족교육을 있게 하려다가 희생된 것이지 결코 있는 교육을 없다고 하거나 없게 하려다가 처벌된 사람들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지난 몇 년간 교직을 잃고 각자 다른 길을 걸으면서도 우리가 교육자요 교수라는 긍지를 잃지 않을 수 있었던 것도 바로 그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오히려 강단과 연구실을 떠남으로써 이 사회 구석구석에서 새로운 역사의 물결이 일고 있음을 체험할 수 있었습니다. 이 새 역사의 일부가 되고자 우리 나름의 작은 힘을 보태기도 했습니다.
작년 12월 2일 해직교수 12명의 이름으로 발표한 ‘민주교육선언’을 비롯하여 이영희 · 백낙청 교수의 필화사건에 대한 12월 6일자의 성명, 본 해직교수협의회의 발족과 더불어 한국기독자교수협의회와 공동으로 낸 ‘언론인들에게 보낸 공개장’ 등 집단적인 의사표시도 했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특히 현직 또는 전직의 모든 동료 교수들과 새 역사의 대열에 동참하는 기쁨을 기대하면서 다음과 같은 우리의 주장을 밝히고자 합니다.
1. 모든 교수는 진실을 말하고 가르쳐야 한다.
2. 진정한 민주교육, 민족교육을 탄압하는 일체의 행위는 그 누구에 의한 것이든 배격되어야 하며 이러한 행위를 조장하는 제도적 장치는 전부 철폐되어야 한다.
3. 모든 현직·전직 교수들은 교육자적 양심에 입각하여 부당한 학생 처벌에 저항하고 이미 희생된 학생들의 복권·복직을 요구해야 한다.
4. 이들 학생의 완전 구제와 동시에 대학인으로서의 그 본래의 사명에 충실하다가 해직된 교수들이 아무 조건 없이 전원 복직되어야 한다.
5. 필화사건으로 구속되어 1심 재판 중인 이영희 전 한양대 교수의 조속한 석방을 거듭 촉구하며 이영희 교수에 대한 반공법 적용이 학문의 자유에 대한 위협일 뿐더러 민족 현실의 정직한 논의를 봉쇄하는 결과가 될 수 있음에 유의하고 이의 시정을 강력히 요구한다.
1978.4.13.
해직교수협의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