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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하 구출위원회, '김지하 문학의 밤’ 행사 개최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주축의 '김지하 구출위원회'가 오후 6시부터 동대문 성당에서 '김지하 문학의 밤' 행사를 개최하였다. 개회사로 지학순 주교가 「김지하 문학의 밤을 개최하며」를 발표하며, 김지하의 석방을 기원하였다. 그리고 함세웅 신부가 메시지를 통해 김지하의 석방을 촉구하였다. 이후, 서울과 원주 등 전국 9개의 도시에서 '김지하 문학의 밤' 행사가 개최되어 그의 석방을 요구했다. 본 행사는 주로 김지하의 작품 낭독, 강론, 기도 등으로 구성되었다. 한국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 『1970년대 민주화운동과 기독교』, 한국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 1983, 357, 359~360쪽.「김지하 문학의 밤을 개최하며」 기쁨과 희망 사목연구소, 『암흑속의 횃불』 제3권, 가톨릭출판사, 1996, 201~202쪽.
우리 민족의 시인 김지하는 국내외적으로 알려져 있지만, 그의 40 평생의 과거와 오늘의 형편을 잘 아는 사람은 별로 없을 듯해서 먼저 그 생애에 대한 소개로서 이 모임의 개회사를 대신하겠습니다. 말하자면 이 모임은 곧 우리가 시인 김지하의 면모나마 이해하는 기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물론 그 사람은 현재 감옥에서 억울한 옥살이를 하는 사람입니다. 그의 감옥살이는 다 합치면 현재 6년에 가깝습니다.
대학 시절에는 6.3사태 데모의 주동자라 해서 100일간을, 1970년에는 〈오적〉 사건으로 100일을, 1972년에는 〈비어〉 사건으로 마산에서 연금 생활 100일을, 1974년 4월부터 이제까지 5년간이나 민청학련 사건으로 인해 서대문구치소에서 엄중한 감시 아래 독감방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민청학련 사건으로 군사비밀재판에서 사형선고를 받았다가 무기형으로 감형되어 1975년 2월에 특사령으로 형집행정지 처분을 받고 나왔으나 27일 뒤에 다시 투옥된 것입니다. 그가 다시 기소된 것은 옥중의 작품 메모 수첩의 내용이 용공적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재판과정에서 법정투쟁을 통해서 그가 무죄임이 밝혀지자 항소 제기로 재판이 사실상 중단된 채 1974년 4월 민청학련 사건의 형집행정지를 취소, 지금까지 계속 구속을 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김지하는 다 아는 바와 같이 저항 시인이며 잘못한 것은 잘못했다고 하고 나쁜 것은 나쁘다고 하는 솔직한 자유인입니다. 그런데 우리에게는 이런 일이 금지되어 있고 불의 앞에서 비굴해야 되는 현실입니다. 실로 통탄할 일입니다.
나도 감옥살이를 해 봐서 알지만, 감옥살이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더구나 4년씩 감옥에 처넣어 두는 것은 일제가 독립투사를 구속한 만행보다 더 악랄한 일입니다. 오로지 한 번뿐인 남의 생애를 그렇게 처참하게 짓밟는 일을 어떻게 그렇게 함부로 할 수 있는가를 생각할 때 실로 가슴이 아픕니다.
그의 부모 처자들이 바로 우리 집앞에 살고 있기 때문에 나는 그들을 자주 만나고 또 그 집의 형편을 잘 알고 있습니다. 김지하는 외아들입니다. 그가 1973년 4월에 결혼했기 때문에 부인도 있고 네 살 박이 아들 원보가 하나 자라고 있습니다. 그러나 남편 없는 외로운 세월을 보내는 부인은 서울 친정에 가서 많이 지내며 그의 어머니는 아들의 옥바라지를 하느라 서울에서 여기저기 떠돌면서 집에 있는 날이 거의 없습니다. 그래서 아버지는 외로이 빈 집을 지키고 있으며 아들 때문에 고혈압이 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한 집안이 권력에 의하여 산산이 부셔져버린 것입니다. 참으로 너무 비참합니다. 네 살 짜리 손자가 할아버지에게 “아빠 왜 안 와, 아빠 왜 안 와'’ 하며 졸라대는 소리를 듣게 되면 그저 눈시울이 뜨거워질 뿐입니다.
오늘 우리가 개최하는 김지하 문학의 밤이 어려움을 무릅쓰고 이렇게 성황을 이루는 것도 따지고 보면, 우리가 하루속히 김지하와 함께 살게 되기를 기원하기 때문입니다. 아무쪼록 이 뜻깊은 모임이 부디 김지하가 그의 가족과 우리 민족에게로 되돌아오게 하는 크나큰 염원의 자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1978년 12월 21일
지학순 주교 개회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