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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학생들, 각종 선언문 배포 후 시위 돌입

9월 20일 오후 1시경 서울대학생들은 수백 명이 모인 구내식당 앞에서 「민주민중선언」, 「1979년 학원민주화선언」, 「근로민중생존권 수호선언」 등 3가지 선언문을 배포하고 낭독한 후 시위에 돌입했다. 당일 오후 4시경까지 교내 곳곳에서 격렬한 시위가 계속되었으며 익일 21일 시위가 재개했다. 김용호(철학과 4학년), 윤언균(불문학과 4학년), 김종수(동양사학과 4학년), 오석종(교육학과 4학년) 등 4명이 구속되고 김창희(철학과 4학년)가 수배되었다. 「근로민중 생존권수호 선언」,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인권위원회, 『1970년대 민주화운동』 (Ⅴ), 1987, 1932~1934쪽; 기쁨과 희망 사목연구소, 『암흑속의 횃불』 제3권, 카톨릭출판사, 1996, 521쪽; 긴급조치9호 철폐투쟁 30주년 기념행사추진위원회, 『30년만에 다시 부르는 노래』, 자인, 2005, 561쪽.; 서울대학교, 「민주민중선언」 1979.9.20.,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오픈아카이브 (https://archives.kdemo.or.kr/isad/view/000853310)「1979년 학원민주화 선언」
우리 대학은 짧은 역사에도 불구하고 항상 한국사회의 부침성쇠와 궤도를 같이 하여 왔다,
그 시대시대의 아픔에 동참하여, 부정과 부패엔 혼신의 힘으로 대항하고 대학이 가진 모든 것을 이 사회에 바쳐오지 않았는가! 무릇 후진국의 대학은 민족의 자립과 민주주의의 실현을 위한 투쟁의 제일선에 나서지 않을 때, 도리어 경제적, 문화적, 식민주의의 하수인으로 전락해버릴 수밖에 없다. 그래서 결국은 산학 협동의 탈을 쓰고 제 민족을 타국의 신식민주의 세력에게 팔아먹은 매판적 자본, 매판적 관료의 양성소가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대학 투쟁사는 3.1운동의 열화 같은 민중의 외침을 뒤에 업고 4.19 그 정의의 깃발이 휘날렸던 것과 6.3사태, 3선 개헌반대투쟁, 교련반대, 소위 민청사건 등을 통해 70년대 후반까지 민족의 자립, 민주주의의 수호, 민중의 의지 실현을 위한 대학의 양심은 살아있다는 것을 뚜렷이 보여주고 있지 아니한가!
그러나, 오늘날 대학에 가해지고 있는 모든 박해를 보라! 민중이 주인이 되는 역사의 흐름을 거역하고 소수 관료와 관료독점만의 부귀영달을 위해 계속 강화되어온 박정희 독재체제는 우리나라 민주주의 발전의 선진적인 주자이자 비판적 지성의 최후 보루인 대학을 눈의 가시처럼 여겨 계속 탄압의 마수를 뻗쳐 왔음은 역사가 보여주고 있다. 게다가 오늘날 대학에 가해지고 있는 정권의 최후 발악을 보라! 강의실에 가나 휴게실에 가나 항상 번득이는 형사들의 눈초리는 대학의 민주적 분위기를 침식해 들어오고, 전경들의 군화소리와 페퍼포그는 정당한 민족적 요구를 실현코자 하는 대학의 실상을 은폐 말살하려 하지 않는가?
또 어느 민주주의 사회에 학도호국단이라는 정권의 괴뢰기구가 있었던가?
소위 학도호국단이라는 것은 독재정권이 학생 중 극소수의 반동적인 자와 야합하여 학원을 병영화하고 소위 면학 분위기라는 미명하에 학생들의 의식을 철저히 소시민화시키려는 데 지나지 않는다. 학생들의 자율적 활동을 보장, 지원해 건전한 학내풍토를 조성하기는커녕 저속한 오락물로 일관하는 축제와 무의미한 체육 대회 등은 학도호국단의 저의와 본질을 드러내 줄 뿐이다. 또 사단장의 프랑스 취임여행(?)을 비롯한 간부들의 외유와 수련회를 빙자한 주지육림은 호국단 체제의 반학생적 성격과 그 무용성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랴!
교련의 허구성은 우리의 의식을 철저히 매카시즘의 노예로 만들고, 자유로운 비판기능을 마비시켜 버리려는 정권의 유지책이라는 점에서 발견된다. 또한 77년 2학기 및 78년 1학기에 일어난 특정학급 집단 F사건에서 보듯이 복무기간 단축금지 조항의 소급적용 등은 교련이 반공을 빙자해 대학의 민주적 분위기를 압살하며, 정권을 연장 유지하려는 수단임을 명백히 보여주는 것이다, 79년 1학기부터 거론되고 있는 총장의 휴학 명령권도 대학에서 민주주의의 싹을 제거하려는 의도임이 분명하다,
이에 반해 학생의 자율적 기구인 학내언론 및 학생 학술 행사, 서클활동 등은 어떠한가. 단대학보는 극심한 원고 검열과 필요 이상의 규제조치로 아직 창간호도 발간치 못한 곳도 있으며, 대학신문은 지난 1학기 내내 당국의 기사 검열과 어용화 정책에 항의하는 기자들의 총사퇴로 편집부가 공전되자, 당국은 교수와 대학원생들을 주축으로 학생여론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신문제작을 아무 거리낌 없이 해내며 소위 문제기자들을 군대에 가도록 권유한다 하여 학교 밖으로 내쫓는 작태를 연출했다. 또 자율적인 서클활동은 복잡한 등록 절차에 의해 사실상 부정당하고 있으며, 각 단과대학의 자율적 행사인 심포지움도 원고삭제, 예산부족, 시기부적절 등의 명분으로 봉쇄당하고 있으니, 학내에 남은 활동이라곤 사이비 호국단의 기만적 활동이외에 도대체 무엇이 있겠는가?
이상의 학원사찰, 학도호국단, 교련, 휴학 명령권들을 통한 조직적 탄압과 학내언론, 학술행사, 자율적 서클활동 등의 말살행위는 박정희 독재정권과 그 하수인들의 반역사적, 반민주적, 반민중적, 반민족적 성격을 드러내 줄 뿐이다, 대학의 양대지주는 교수와 학생인 바, 작금의 대학 현실은 교수와 학생을 이간시키고 있지 않은가?
대학 행정기구의 비대화로 예산 등의 모든 권한은 행정기구로 집중되는 데 반해, 학내 사태의 모든 책임은 분담 지도제라는 미명하에 말단 교수에게 떠맡기는 저간의 정치적 조작은 교수와 학생을 이간시키며, 인간적 신뢰의 바탕을 두어야 할 사제 관계를 헛돌게 만들고 있는 것이다. 교수 재임명제의 저의 또한 명백하다. 이는 학문적 양심에 따라 발언하는 지식인의 능동적 태도까지도 학생 지도 능력 부족, 연구업적 부실 등의 기만적 이유를 붙여 탄압하려는 제도적 장치가 아니고 그 무엇이겠는가?
대학이 민족사에 있어서의 제 역할을 되찾고 사제 간의 올바른 관계가 정립되기 위해서도 이와 같은 분담지도제와 교수 재임명제도는 반드시 철폐되어야만 한다. 그리고 교수 스스로도 반동적인 정권을 합리화하는 이데올로기 제공자의 입장을 벗어나려는 노력을 보임으로써 이 극복되어야할 시대를 걸어가는 동반자의 자세를 보일 것을 교수들 앞에 진지하고도 충심으로 촉구한다. 우리 스스로도 방관자적 태도를 버리고, 자신의 생활방식부터 이 시대의 요구에 일치시켜 나가야 한다. 카드놀이에만 열을 내는 풍조는 관심의 다양성이라는 말로 호도되어질 수 없다. 그 시간, 그 장소, 그 정신을 좀먹어 들어오는 허무주의, 패배주의의 음험한 기운을 뉘라서 부정할 텐가? 더욱이 학내사태의 무관심과 극히 개인적인 실존적 문제에만 탐닉하는 태도도 후진사회에서 대학이 맡아야 할 선진적 역할을 외면하고 매판자본의 봉사계급으로 전락할 운명을 자초하는 것이 아닌가? 대학생이 민중계층에 대해 상대적 특권계층임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아니 민중의 피땀 위에서 우리는 생활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만큼 대학생들은 보이지 않는 민중의 염원에 부응해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각 방면에서, 한국 사회내의 민족 가치실현을 추구해야 할 책임을 더욱 크게 지는 것이다. 그리고 민족적, 민중적 요구의 연속선상에서 학원의 민주화를 위한 노력도 우리 자신에게 귀착되어야만 한다. 모든 반민족적 모순의 발현으로서의 학원탄압은 우리의 주체적 힘이 응집됨으로써 극복될 것이 아니겠는가? 전 대학인의 창조적인 지성과 민중 지향적 결단이 합쳐질 때 대학의 민주화가 실현될 수 있음은 물론 우리 사회가 혼돈과 부정의의 과거를 극복하고 민중이 이 사회의 주인이 되는 역사를 실현해 나가는 데 하나의 초석이 놓여질 것이다. 긴 독단의 잠에서 깨어나 이제는 자각과 회한의 눈을 뜰 시간이다. 우리는 관념적이고 주관주의적인 일체의 학문태도를 거부하고 한국의 구체적인 현실과 학원의 사태에 주목한다.
자! 이제는 우리 스스로 학원을 지켜야 할 때다.
자! 이제는 우리 스스로 이 땅위에 민중의 삶을 회복할 때다.
침묵은 타협일 뿐이다. 나가자! 학우여! 우리는 반드시 승리한다.
1979년 9월 20일
서울대학교 학생회
「근로민중생존권 수호선언」
근로민중이여 ! 그리고 민주학우여 !
우리는 우리를 부정해온 외세의 식민지적 위협과 강탈, 지배자의 부패와 부정에 의한 수탈, 착취에 맞서 싸워온 이 겨레의 자손이다. 갑오농민의 ‘피터진 함성’으로부터, 우리 귀에도 생생한 청계천 피복 노동자 전태일의 ‘인간 최소한의 요구’ 실현을 위한 분신자살로 대표되는 70년대에 이르기까지 이 땅 위에서 농사짓고 생산해 온 근로민중의 인간다운- 생활을 위한 정당한 투쟁은 지배자의 엄청난 폭력과 기만에도 불구하고 근세사를 일관하여 포기되지 않았으며 또 결코 짓밟힐 수도 없는 것이다. 왜? 그것은 사람이 생산을 위한 마소나 기계일 수 없고 말 못하는 노예일 수 없기 때문이다.
농촌에서는 국내의 독점자본과 농협의 횡포에 의해 농민의 피땀 어린 농산물이 생산비에도 못 미치는 가격에 수매됨으로써 살길을 찾아 이농하는 사람들로 농촌은 텅텅 비게 되었다. 오늘의 농촌을 찾아가 보라! 과연 젊은이가 몇 사람이나 남아 있는지! 이는 농촌에서 도저히 살 수 없다는 애끊는 하소연임을 증명하지 않는가!
공장에서는 어떠한가? 살길을 찾아 이농한 농민과 도시 노동자의 아들 딸들이 저임금과 열악한 노동환경 속에서 신음하고 있다. 불 속에서 타는 전태일의 인간다운 생활을 찾기 위한 외침과 똥물로 유린당한 동일방직 여공의 민주노조를 위한 투쟁의 함성이 근대화의 쇠망치 소리 깊숙이 스며 있지 않은가! 근로민중의 생계의 문제는 단순히 그들의 먹고 사는 문제로 그치는 게 아니라 그들의 생산을 기반으로 한 전체 사회 구성원의 안녕과 생존의 문제다. 따라서 정당한 노동운동의 파괴는 단순히 노동자의 권리 파기뿐만이 아니라 근로민중을 기반으로 한 전체 사회 구성원의 생존에 궁극적으로 연결되는 것이다.
그런데 오늘의 노동자의 현실을 보라 ! 700만 노동자의 대다수가 단지 못 배웠다는 이유로 잠자는 시간과 식사시간 이외에는 작업에 몰두하기를 강요당하면서도 배운 자의 한 달, 아니 하루의 용돈도 되지 않는 살인적인 저임금을 받을 뿐만 아니라 열악한 작업조건에 의하여 알게 모르게 직업병에 시들어가는 처참한 상태에 있지 않은가! 이런 상태에서 최소한의 생계를 위한 노동자들의 투쟁의 정당성을 부정할 자 누가 있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동자들의 정당한 투쟁을 악랄하게 탄압 파괴하는 저들은 도대체 어떤 작자들이며 그리고 그 정체는 무엇인가?
근로민중이여! 그리고 그들의 아픔을 같이 하려는 민주학우여!
반민족적 매판자본가를 기반으로 한 박정희 군사 독재정권은 경제자립이라는 민족의 간절한 희구에는 아랑곳없이 외세의존적 수출주도형 성장정책을 밀고 나감으로써 노동자와 농민에게 저 임금, 저곡가를 강요해 왔다. 여기서 소위 긴급조치라는 도깨비방망이는 이러한 정책에 반대하는 근로민중과 모든 민주세력의 정당한 투쟁을 위기감 조성으로 압살하려는 것일 뿐이다. 또한 ‘국가보위에 관한 특별조치법’을 ‘정권보위에 관한 특별조치법’ 으로 도용하여 노동3권을 말살한 것도 근로민중의 피땀을 딛고 서서 외국 신식민주의의 하수인으로 전락한 현 정권의 반민중적, 반민족적 성격을 노정한 것이 아니고 무엇이랴!
게다가 노동자들의 위기상황을 적극적으로 타개하고 그들의 생존문제의 해결에 앞장서야 할 노총의 정권과 야합한 저 파렴치한 행태를 보라! 60년대 말 정치투쟁을 선언했던 노총이 이제는 노동귀족화·어용화되어 노동자들의 참담한 상황을 오히려 호도하며 노동자들의 정당한 투쟁을 오히려 억압하고 있지 않은가?
매판자본가를 위한 현 정권의 수출주도형 성장정책은 저임금, 저곡가에 의하여 근로민중을 착취하고 그로 인해 노동자의 생존권을 극악의 상태로 몰고 갈 수밖에 없다는 것을 YH사태는 명백히 보여 주고 있지 않은가? 이것은 정상적인 가치생산의 과정에 의한 기업의 발전이 아니라 온갖 특혜금융의 지원 하에 근로민중에게는 상대적으로 현격히 낮은 경제잉여를 분배하고 열악한 근로조건의 자기파멸적 희생을 강요함으로써만 경제성장을 이룩할 수 있다는 한국 경제체제의 왜곡된 논리를 명백히 보여 주고 있는 것이며, 제2율산사태를 재생산해 낸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YH 사건으로 대표되는 작금의 불황사태는 정부가 되뇌이고 있는 것처럼 오일 쇼크에 책임이 전가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경제 성장과정의 일시적이고 부분적인 마찰도 아니라는 것은 삼척동자도 다 아는 사실이다. 더욱이 민중의 몽둥이인 깡패경찰을 동원해 생존권의 확보를 위한 여공들의 정당한 외침을 짓밟아버리고 급기야는 김경숙양의 가엾은 생명까지 빼앗아간 박정희 독재정권의 폭거는 자신의 한계를 드러낼 뿐이다. 이제는 폭력밖에 자기 유지책이 없다는 사실은 민중에 버림받은 정권의 비참한 말로를 드러내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사건의 직접 당사자인 장용호는 조흥은행에 40억 원 이상의 부채를 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노동자들의 피땀의 대가인 15억 원 이상의 자산을 미국으로 빼돌려 개인격인 향락에 사용함으로써 기업체의 도산을 자초하고 말았다. 우리가 이미 보았던 것처럼 허구적인 수출주도형 성장정책은 이런 악질 기업가를 필연적으로 낳을 수밖에 없다. 더구나 이번 사태에서 장용호가 보여 준 ‘인권침해' 운운의 발언은 우리를 더욱 분노케 하는 기만적인 술책일 뿐이다.
또한 가증스런 노총의 태도를 보라! YH 여공의 처절한 생존의 주장을 받아들이고 함께 맞서 싸워야 할 노총산하 섬유노조는 관계기관과 한편이 되어 노동자를 헐뜯고 파렴치한 결의문을 남발하는 작태를 저지르고 있다. 우리는 노총에서 소위 ‘공장 새마을운동’, ‘대화’, ‘협조’ 운운하는 데 아연실색하지 않을 없다. 그들이 미풍양속으로 내세운 한국적 노사관계란 노동자의 의식을 봉건적으로 만들어 노동운동을 간접적으로 탄압하려는 이데올로기적 술책에 불과하다.
우리는 저임금에 시달리는 노동자들의 쌈지돈을 긁어모아 정부에 아첨하는 노총을 규탄한다! 이것이 한국적 노조의 실상이 아니고 무엇이랴! 민주노조는 민주사회 구성에 있어서 뺄 수 없는 요소다. 민중의 이해와 지지기반에 선 정권만이 민주주의를 실현할 수 있는 정치집단이라고 볼 때 민주학생이 현 파쇼체제하에서 노동운동에 지지를 표명하는 것은 필연적이다. 모든 노동운동사를 보라! 투쟁 없이, 피 튀기는 투쟁 없이 노동자들의 요구가 성취된 적이 있는가? 한국에서도 민주 민중운동이 성장하고 있다! 그들의 적극적 투쟁에 전폭적 지지를 표명하며 측면 지원할 것을 결의한다.
1. 실업, 해고사태 중지하고 노동자의 생존권을 보장하라!
2. 악덕기업주 장용호를 소환 처단하라!
3. 섬유노조위원장 김영태를 파면하고 민주노조 결성 보장하라!
4. 도시산업선교, 신민당 탄압을 중지하라!
5. 김경숙양의 사인을 밝히고 국민 앞에 사과하라!
1979년 9월 20일
서울대학교 학생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