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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도상사 노동자들, 근로조건 개선을 요구하며 파업

2월 설을 앞둔 전날 반도상사에서 귀향하는 노동자들의 소지품을 검사하는 데 항의하던 한 여성노동자가 경비원한테 폭행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에 참을 만큼 참아온 반도상사 노동자들의 분노가 마치 화산이 폭발하듯 터져 나왔다. 1974년 2월 26일 오전 8시30분을 기해 시작된 반도상사의 파업은 하루만에 1,400명 전원을 투쟁에 동참시키며 엄청난 결집력을 보여주었다. 바로 전날 파업을 알리는 유인물이 탈의장과 기숙사 방마다 비밀리에 전달되었지만 전혀 회사 쪽으로 새어나가지 않고 계획대로 진행되었다. 이날은 영하 15도를 오르내리는 한파가 몰아닥쳤는데도 노동자들은 공장 2층 바닥에 앉아 질서정연하게 단식농성에 들어갔다. 노동자 한순임이 호소문 낭독에 이어 구호를 선창했다. “임금 60% 인상, 폭행사원 처벌, 현장과 기숙사 시설 개선, 취업규칙 공개, 강제잔업 철폐, 파업 투쟁에 대한 보복 금지와 사장의 공개서약 등이 관철될 때까지 끝까지 투쟁한다”는 결의였다. 밤 10시 회사측과 합의서를 작성하고 14시간에 걸친 농성이 끝나자 노동자들은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그러나 그건 끝이 아니라 시작이었다. 이튿날부터 회사의 부당노동행위가 시작되었다. 재차 노동자들의 농성, 지도자 연행, 2차 파업으로 이어진 반도상사 투쟁은 4월 15일 섬유노동조합 반도상사지부 결성으로 이어졌다. 이때 한순임이 압도적인 지지를 얻어 지부장에 당선되었다.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1984. 『노동현장과 증언』, 풀빛, 267쪽, 297-308쪽. 이총각, “길을 찾아서, 1,400명 전원이 동참한 반도상사 파업”, 『한겨레』 2013.06.12. 반도상사 노동조합과 노동쟁의 반도상사는 당시 5대 재벌중의 하나인 럭키금성의 계열 회사였다. 반도상사 부평공장은 1969년 5월 준공되었고 이외에도 부산, 김포 공장이 있었다. 반도상사 부평공장은 가발에서 봉제·피혁제품으로 생산을 바꾸게 되었다. 1970년 초 400여 명이던 노동자 수가 연말에는 700여 명으로 늘어나 주야간 2교대 12시간 노동을 하였다. 1971년 3월 공장건물을 신축하면서 노동자가 2,000여 명으로 늘어났다. 노동자들은 1972~1974년 최대의 가발경기 호황으로 인원증가 없이 하루도 쉴 수 없는 곱빼기 철야작업을 하였고, 퉁퉁 불어터진 국수로 점심식사를 대신하였다. 취업규칙은 지켜지지 않았으며, 화장실에 갈 때도 팻말을 가지고 다녀야 했다. 관리자들은 조금만 밉보여도 욕설과 폭언을 일삼았으며 폭행까지 서슴지 않았다.
1974년 2월 26일 1,400여 명의 반도 노동자들은 그동안 참아왔던 울분들을 폭발시키며 자신들의 요구사항을 호소문을 통하여 전 노동자들에게 알리고, 아침 출근과 동시에 전체가 회사 앞마당에 모여 자신들의 주장을 외치기 시작하였다. 노동자들은 “임금인상 60% 지급하라, 폭행 사원 처벌하라, 강제잔업 철폐하라, 근로조건, 복지후생 시설 개선하라, 취업규칙 게시하라, 사장이 직접 해결하라” 등을 요구했다. 저녁 10시, 회사를 대표하는 5인과 노동자 대표 5명, 관계기관의 입회하에 노동자들의 요구사항을 회사측과 합의각서로 다짐을 받았다. 그러나 이후 회사측은 회사를 그만두도록 하기 위해 공개된 노동자 대표들에게 불법부당한 탄압을 자행하였다. 반장이나 조장을 맡은 사람은 직위해제를 시키고, 계속 이곳저곳으로 이동을 시켜 작업을 시키기도 하는 등 악랄한 방법을 모두 동원하였다.
회사는 섬유노조와 짜고 회사 말을 잘 듣는 사람을 노동조합 임원으로 세우려고 시도하였다. 1974년 3월 5일 노조 창립총회 때에 섬유노조 당시 쟁의부장이었던 김상문이 회사 지지파 남자노동자들을 모아 회사경비원을 지부장으로 하여 임원들을 선출하려고 공모를 하다가 발각되었고, 이에 노동자들은 농성투쟁을 전개했다. 1,000여 명의 노동자들은 밤을 꼬박 세워 투쟁을 하였고 6일 새벽 5시에 기동경찰에 의하여 해산을 당했다. 이때 부상자들이 다수 발생하였으며, 노동자들을 대표하는 핵심원 18명이 경찰에 연행되어 3일 만에 풀려났다.
1974년 4월 15일 아침 조회시간, 섬유노조 본조 교선부장이 교육하는 과정에 1,400여 명이 참석하였는데, 노동자 대표들이 중간에 발언을 하여 즉시 노조를 결성하였다. 이때 노동자 대표인 한순임을 지부장으로 선출하고 임원들도 노동자들이 믿을 수 있는 대표들로 선출하여 명실공이 법적으로 보장된 노조를 만들었다. 결성된 노조에 대해 회사측의 지속적인 방해공작과 중앙정보부에 의한 노동자 대표의 수차례에 걸친 구속, 섬유노조의 방해 등이 행해졌으나, 이에 조합원들은 노조를 중심으로 단결해 대항해 나갔다. 특히 반도상사 노조는 섬유노조에 대해 적극적인 투쟁을 전개했다. 1978년 4월 13일 지부 대의원회의에서 규약채택을 반대하였다는 이유로, 섬유본조에서 지부에 보낸 공문, 의무금까지 되돌려 보내면서 본부와의 관계를 단절하였다. 1978년 5월 17일에는 본조 대의원대회 무효소송을 제기하였다(반도·원풍·YH 3개 지부 이름으로). 단, 한순임은 1974년 중앙정보부에 끌려갔다온 후 중정의 공작에 넘어가 동일방직 민주노조를 파괴하는 데 깊이 관여했으며, 산업선교회를 비판하는 강연과 글쓰기에 앞장섰다. 민주노총, 「민주노조 투쟁과 탄압의 역사」, 도서출판 현장에서 미래를, 2001, 53~54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