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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학순 신부, 바티칸에서 귀국 직후 연행

천주교 원주교구 주교인 지학순 신부가 6일 오후 4시 50분 C.P.A. 항공기편으로 바티칸에서 귀국 후 기관원들에게 강제 연행됐다. 지학순 주교는 천주교신자인 민청학련 관련자 김지하(본명 김영일)에게 도피자금을 주고 내란을 선동하는 등 대통령긴급조치 위반혐의가 적용됐다. 전북민주화운동사편찬위원회, 『전북민주화운동사』, 선인, 2012, 92-93쪽. 『한겨레신문』 2020. 5. 28. 지학순 주교 긴급조치 위반 구속사건 한국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 『1970년대 민주화운동과 기독교』, 1983; 한승헌 외, 『유신체제와 민주화운동』, 춘추사 , 1984;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인권위원회, 『1970년대 민주화운동Ⅰ』, 동광출판사, 1987; 기쁨과 희망 사목연구소, 『암흑속의 횃불』, 가톨릭출판사, 1996. 천주교 원주교구 지학순 주교는 민청학련사건 관련자인 천주교 신자 김지하(본명 김영일)의 도피자금을 지원했다는 등의 혐의로 1974년 7월 6일 오후 4시 50분 C.P.A. 항공기편으로 바티칸에서 귀국 후 기관원들에게 강제 연행됐다. 7월 8일 김수환 추기경이 중앙정보부에 감금된 지학순 주교를 면담하기도 했다.
1974년 7월 10일 오후 6시 서울 명동성당에서 시국미사가 열린 가운데 이날 청와대에서 김수환 추기경을 만나고 싶다는 전갈이 왔다. 그리고 그날 밤 지학순 주교는 남산 중앙정보부에서 구금상태로 풀려났다. 7월 15일 지학순 주교는 중앙정보부 조사와 관련해 “①김영일(김지하)에게 돈을 준 문제에 대하여 ②정부에 대한 나의 입장"을 내용으로 하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지학순 주교는 관련 성명을 발표한 뒤 검찰에 출두하였다가 주거제한상태에 놓였다.
7월 23일 연금상태로 성모병원에서 가료 중이던 지학순 주교는 이날 유신헌법의 폭력성과 긴급조치의 인권유린, 비상군법회의 비판을 내용으로 하는 「양심선언」을 발표한 뒤 중앙정보부에 다시 연행됐다. 당시 양심선언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본인은 1974년 7월 23일 오전 형사피고인으로 소위 비상군법회의에 출두하라는 소환장을 받았다. 그러나 본인은 양심과 하느님의 정의가 허용치 않으므로 소환에 불응한다. 본인은 분명히 말해두지만 본인에 대한 소위 비상군법회의에 어떠한 절차가 공포되더라도 그것은 본인이 스스로 출두한 것이 아니라 폭력으로 끌려간 것임을 미리 밝혀둔다.
1. 소위 유신헌법이라는 것은 1972년 10월 17일에 민주헌정을 배신적으로 파괴하고 국민의 의도와는 아무런 상관없이 폭력과 공갈과 국민투표라는 사기극에 의하여 조작된 것이기 때문에 무효이고 진리에 반대되는 것이다.
2. 소위 유신헌법이라는 것은 국민의 불가양도의 기본인권과 기본적인 인간적 품위를 집권자 한 사람의 긴급명령이라는 단순한 형식만 가지고 짓밟는 것이다. 이래서는 인간의 양심이 여지없이 파괴될 것이다.
3. 본인이 위반했다고 기소된 소위 대통령긴급조치 제1호, 제4호는 우리나라의 오랜 역사상 가장 참혹한 기본권 유린의 하나이다. 이것들은 소위 유신헌법의 개정을 청원하거나 건의하는 것을 금지하고 그러한 청원이 있었다는 보도도 금지하며 대통령긴급조치 그 자체에 대한 불만이나 반대의사조차 말 못하게 하며 이러한 금지조항을 위반하면 종신징역 또는 사형에 처할 수 있다는 것이다.
4. 본인이 범했다고 그들이 기소한 또 하나의 죄목인 내란선동은 본인이 그리스도교정신을 올바로 가졌기 때문에 억압받는 청년에게 그리스도교적 정의와 사랑의 운동을 하라고 돈을 준 사실에 대하여 갖다 붙인 조작된 죄목이다.
5. 본인을 재판하겠다고 하는 소위 비상군법회의라는 것은 그 스스로 법과 양심에 따라 독립하여 판단할 수도 없는 꼭두각시다. 저들은 지금 수많은 정직한 사람들을 투옥하고 처형하는데 있어 비상군법회의라 불리우는 형사절차의 이름을 빌리고 싶어 할 것이다. 그러나 울부짖는 피고인들의 목소리는 밖으로 알려지지 않는 동안 통제된 신문들, 통제된 방송들, 통제된 텔레비들에서는 소위 검찰관의 증거 희박한 주장만이 사실로 나타난다.
1974년 7월 23일
천주교 원주 교구 주교 지학순
지학순 주교 구속사건과 관련해 1974년 8월 5일 대전교구 기도회에 참석한 사제들은 시국사건 등과 관련해 사제들의 종합적인 대응이 필요하다는데 의견을 함께 한다. 그리고 9월 23일 원주에서 개최된 성직자 세미나에서 신부 3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사제모임 결성과 명칭이 합의,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이 이날 공식 출범하기에 이른다.
한편, 1974년 8월 9일 내란선동 및 대통령긴급조치 위반사건 관련 비상보통군법회의 결심 공판에서 민청학련 배후지원자로 지목된 지학순 주교는 징역 15년에 자격정지 15년이 구형된다. 이어 12일 비상보통군법회의는 검찰 구형대로 징역 15년에 자격정지 15년형이 선고됐다. 이후 지학순 주교를 비롯한 구속자 석방과 관련 가톨릭교회와 학생, 민주화인사들의 대대적인 구명운동이 이어졌다.
결국 1975년 2월 15일 박정희 대통령의 ‘2.15석방조치’에 따라 대통령긴급조치 위반 피고인 203명 중 인혁당 관련자 등 반공법 위반자 34명을 제외한 석방대상자 169명(보석중인자 등 20명 포함)이 15일부터 17일까지 모두 석방된다. 지학순 주교도 2월 17일 구속집행정지로 출감했다.
지학순 주교는 2020년 9월 17일 46년 만에 열린 재심에서 긴급조치 위반혐의에 대해 무죄를 선고받았다.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34부(허선아 부장판사)는 이날 지학순 주교의 대통령긴급조치 위반 등 혐의의 재심 선고공판에서 긴급조치 위반혐의에 대해 무죄를 선고했다. 다만, 연금상태에서 밖으로 나가려다 공무원을 밀치는 등 특수공무방해 혐의에 대해선 징역 1년 6개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했다. 지학순 주교는 1993년 세상을 떠났으며, 1997년 그의 뜻을 잇기 위한 지학순정의평화기금이 조성돼 매년 정의평화상이 수여되고 있다.
◇ 지학순 주교 구속사건 일지 민주운동기념사업회, 『민주화운동관련 사건사전편찬을 위한 기초조사연구사업(70연대) 보고서』, 2003, 239쪽.
-1974년 7월 6일
지학순 주교, CPA 항공기 450편으로 해외여행에서 귀국중 김포공항에서 긴급조치 1호, 4호 위반과 민청학련사건과 관련 "자금제공, 내란선동" 등 혐의로 중정에 연행
-1974년 7월 7일
명동성당, 지학순 주교 석방을 위한 기도회 개최
-1974년 7월 10일
지학순 주교 임시 석방
-1974년 7월 15일
지학순 주교, 명동성보병원에서 연금 중 「나의 견해」 발표 ①부정부패 ②현 체제의 3권 분리 파괴 및 1인 장악 ③1인의 장기 집권 ④인간의 기본권 침해 등을 이유로 현 정부에 반대한다고 성명
-1974년 7월 16일
비상보통군법회의 검찰부, 지학순 주교 “내란선동 및 긴급조치 1, 4호 위반”혐의로 기소
-1974년 7월 22일
수녀회 대표 600여 명, 지학순 주교 석방요구 기도회
-1974년 7월 23일
지학순 주교, 연금장소인 명동 성모병원서 기자회견 갖고 「양심선언」 발표. 「양심선언」 발표 후 중정에 다시 연행 구속. 양심선언 내용: ①국민의도와 관계없이 비민주적으로 성립된 소위 유신헌법은 무효이고 진리에 반대되는 것 ②국민기본인권, 기본적 인간품위를 집권자 1인 자의대로 짓밟는 것 ③긴급조치는 자연법 유린의 하나 ④본인은 억압받는 청년에게 그리스도교적 정의와 사랑운동으로서 돈을 줌 ⑤비상군법회의는 곧 꼭두각시다 등
-1974년 8월 1일
지학순 주교 내란선동사건 공판, 비상보통군법회의 제3심판부(재판장 유병현 중장), 민청학련사건에 관련 자금지원 혐의, 지주교 공소사실 시인
-1974년 8월 12일
비상보통군법회의, 지학순 주교에 대해 징역 15년에 자격정지 15년 선고
-1974년 9월 13일
수감 중인 지학순 주교, ‘옥중 메시지’ 발표, “역사와 현상에서 부정, 불의 거슬러 주저함 없이 복음 증거함이 교회사명, 괴로움 가득한 현실에서 촛불 들고 나아가자”고 호소
-1974년 10월 22일
국제엠네스티, 지학순 주교 등 13명에 대한 특별지원 운동 전개
-1975년 2월 17일
구속 집행정지로 석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