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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주교 「제3 시국선언」 발표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이 주최한 인권회복을 위한 기도회가 오후 7시 서울 명동성당에서 전국 14개 교구 신부 88명과 수녀, 일반 신도 등 3,500여 명이 참가한 가운데 열렸다. 사제단은 「제3 시국선언」을 발표하고 “인권회복과 인간회복, 민주회복을 요구하는 것은 횡포로부터 기본적인 인권을 찾고 인간다운 삶을 보장받아 독재정치의 굴레에서 해방되는 것으로, 이는 정치적 요구”라고 밝혔다. 사제단은 이 자리에서 ▲국민투표 거부를 재천명한다, ▲인권회복, 민주회복의 노력은 국민투표와 관계없이 계속한다, ▲지학순 주교의 양심선언운동에 적극 호응한다는 등 7개 항을 결의했다. 『경향신문』 1975.02.07. 7면;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오픈아카이브 (https://archives.kdemo.or.kr/isad/view/00524911) 제3 시국선언 하느님의 진리와 주 예수 그리스도의 길을 따라 우리는 이 땅의 사회정의구현과 인권회복을 위한 기도를 계속하여왔다, 우리의 기도는 암담한 현실 속에서 차라리 몸부림이었고 하나의 실천이었다.
우리의 기도를 계속하면서 우리가 본 것은 광정(匡正)되어가는 현실이 아니라 더욱 비인간화되어가는 역리(逆理)의 현실이었다. 이 사회의 부정의와 비양심의 농도는 엷어져 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확대되고 심화되어 가고 있다. 우리는 기도를 통하여 십자가의 의미를 더욱 절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십자가의 의미는 묵상으로서만 아니라 몸으로서 체득할 것을 현세는 강요하였고, 그러기에 우리는 십자가의 길이 얼마나 험난한 것인가를 뜨겁게 깨달을 수 있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수고 수난을 통한 구원의 길은 더욱더 멀리서 빛났다.
우리 기도에 대한 현세의 대답은 기도의식 자체마저 거부하는 것이었다. 인간의 기본적 인권은 더욱 심한 침해의 과정을 겪어야 했다. 이제 우리 자신도 그 인권유린의 대상으로 되어 가고 있다.
부정과 부패는 척결이 아니라 거의 제도화된 풍속으로서 이 땅에 정착했다. 언론의 자유는 강요된 그나마의 연약한 체질마저 압사될 위험에 직면하고 있다, 우리의 순수한 종교의식인 기도회마저 위협과 도전을 받고 있다.
진리와 양심의 소리에 귀 막은 현세의 권력은 이제 하느님의 뜻을 따르고자 하는 행위마저 봉쇄하려 하고 있다, 악은 그 악의 존립을 위해 그 악의 질과 양을 강화하고 확대하여 가고 있다.
‘폭력은 혼자 존립하지 않는다는 것을, 혼자서 그 명맥을 이어나가지 못한다는 것을 우리 는 알고 있다, 폭력은 그 본질부터가 더없이 긴밀하게 거짓과 얽혀있다. 폭력은 거짓말에서밖에 은신처를 찾지 못하고, 거짓말은 폭력에밖에 의지할 데가 없다. 폭력을 수단으로 택한 인간이면 누구나 필연코 거짓을 그 법도로 삼지 않을 수 없다.’
그리스도교 사랑과 관용의 질서는 그 관용 자체를 파괴하려는 위와 같은 독제체제나 전체주의만은 관용할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결정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이와 같은 체제를 우리가 받아드릴 때 그 현실적 결과는 그리스도의 사랑과 관용에 본질적으로 위배되는 결과가 된다.
양심을 원칙적으로 거부하는 현세의 권력은 하느님과의 양심의 대화마저 권력으로 막으려 하고 있다, 우리는 우리의 기도에서 이 땅에 인권회복 민주회복을 하느님의 소명으로 확인하였다. 인권회복은 정치권력의 무한한 횡포로부터 우리의 기본적 인권을 찾자는 것이다. 이 땅의 인간회복은 인간다운 삶을 보장받자는 것이며, 이 땅의 민주회복은 독재정치의 굴레로부터 해방되자는 것이다, 이것은 정치적 요구가 아니라 인간적 요구이다.
이 인간적 요구에 대해 정치적 응답이 이른바 국민투표이다. 국민투표는 국민의 '최소한의 인간적 요구를 원점으로 환원시키는 것 이외의 아무것도 아니다. 국민투표의 과정과 결과는 현재 상황과 법제, 그리고 그것을 획책하는 사람들의 속성으로서는 예정된 포석일 수밖에 없다.
신임을 묻는다면 심판받는 사람으로서의 겸허한 자세가 전제되어야 한다. 체제에 대해 심판을 받겠다면 그 체제의 제물인 애국적 민주인사의 무조건 석방이 선행되어야 한다. 위협과 독선보다 참 인간에로의 회귀가 수반되어야 한다.
그러나 보라, 주권자의 국민을 우롱함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국민투표라는 각본의 예정된 결말이 의미하는 바는 현 집권층의 보다 차원 높은 비인간화와 국민에 대한 비인간적 폭력의 정당화이다. 이것이 국민적 양심의 요구에 대한 진정한 대답이 될 수 있는가...
이제 우리는 십자가의 의미를 실감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 속에 있다. 하느님의 교회는 양심을 거부하는 무리에게 눈엣가시로 투영되고 있다, 하느님의 교회는 폭풍 속의 언덕 위에 지금 놓여있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양심과 진리의 발언은 계속될 것이다, 이 땅의 사회정의 실현을 위한 우리의 기도는 멈추지 않을 것이다, 우리 모두 괴로움이 가득한 이 어두운 현실에서 촛불을 밝혀 들고 우리 자신과 우리에게 맡겨진 양 떼들의 길을 비추어 갈 것이다.
오늘의 현실이 빚어낸 억압에 찌들고 생존에 신음하는 어진 약자들은 우리와 화해하고 있는 우리의 형제이다. 강요된 비참 속에 체념을 씹고 있는 근로자와 농민을 위하여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해야 할 때이다, 가톨릭 노동청년회와 가톨릭 농민회의 활동은 곧 우리의 그것이며 착한 사마리아인의 행동이라고 믿는다.
인권회복, 인간회복, 민주회복은 체제와 정권의 차원을 뛰어넘는 인간적 양심의 요구이다. 우리의 양심은 외친다. 우리 겨레는 지금 노예로 가는 길목에 끌려가고 있다. 양심의 요구를 거부함은 사탄의 길을 선택함을 의미할 따름이다, 우리는 모든 현세의 음모와 박해에도 우리의 기도를 계속할 것이다. 우리의 관심과 행동은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복음에 대한 공동의 신앙에서 울어 난 것임을 확신한다.
우리의 결의 우리는 제3 시국선언의 정신에 따라 다음과 같은 우리의 결의를 밝힌다.
1. 우리는 대구대교구 기도회에서 발표한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의 국민투표 거부결의를 재천명한다.
2. 우리는 하느님의 뜻과 우리의 양심에 따라 인권회복, 인간회복, 민주회복의 노력을 국민투표와 관계없이 계속한다.
3. 우리는 지학순 주교의 양심선언을 거듭 지지하며, 또한 인간의 양심을 탈환하고 방위하는 양심선언 운동에 적극적으로 호응한다.
4. 가혹한 언론탄압에 뒤이은 종교와 신앙의 자유에 대한 위협으로부터 하느님의 교회와 양심, 그리고 우리의 신앙을 지킨다.
5. 우리는 부정과 부패, 독재와 정보정치를 거부하며 이 사회에 충만한 부조리와 비리를 고발, 광정(匡正)한다.
6, 우리는 하느님의 모든 백성과의 화해에 솔선하며 특히 억압받고 찌들은 약자에의 관심과 화해에 주력한다.
7. 우리의 기도와 실천은 하느님의 뜻에 따라 비폭력, 무저항, 평화적인 방법으로써 계속한다.
1975년 2월 6일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