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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 ‘수도권 선교자금’ 수사

서울시경 소속 형사 4명이 오전 10시 검사 최명선, 판사 김창수의 기명으로 발부된 압수수색영장을 들고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 사무실로 가 수도권특수지역선교위원회 사업에 관한 서류를 압수하고 NCC 총무 김관석 목사, 회계 이창섭, 직원 이경배 등 3인을 연행했다. 오후에는 수도권특수지역선교위원회 위원장 박형규 목사, 수도권 실무자 권호경 목사, 한국교회사회선교협의체 사무총장 조승혁 목사 등 3인도 연행했다. 박·권 두 목사는 1973년 남산 부활절 예배 내란예비음모사건으로 구속되었다가 풀려난 뒤, 1974년 권목사는 긴급조치 1호, 박 목사는 긴급조치 4호 위반으로 다시 투옥됐고, 2.15조치로 막 석방된 상태였다. 경찰은 이들이 서독세계급식선교회(BFW)로부터 받은 20만3,000마르크(당시 한국 화폐로 2,700만 원)의 원조자금을 빈민촌 급식 등의 원래 목적에서 벗어나 구속자가족 돕기 등에 사용해 업무상 횡령과 배임 등 혐의로 입건했다고 발표했다. 경찰은 연행한 6명 가운데 이창섭이경배는 풀어주고, 7일 박형규·조승혁 목사를, 9일엔 김관석, 권호경 목사를 차례로 구속했다.
이들이 받은 혐의는, 조목사의 경우 1972년 9월 세계급식선교회로부터 광주단지·동인천·남대문시장·성동구 송정동 등 수도권 4개 지역의 의료시설·장학사업·빈민구제자금 등으로 6만1,200달러(3,060만 원)를 요청한 뒤 45회에 걸쳐 10,151,418원을 받아 구속자 생활비로 5만5,000원을 유용했고, 1974년 12월 부평공단의 삼원섬유 노조 분회장 유해우(21)가 업무방해 및 폭행 혐의로 구속됐을 때 담당 홍성우 변호사에게 착수금을 준 것을 비롯해 1,000여만 원을 유용했다는 것이었다. 박목사는 원조금 중 1974년 11월 20일까지 23회에 걸쳐 약 689만 원을 받아 자신의 긴급조치위반 사건 변호사 착수금으로 19,800원, 잡비 및 개인 활동비로 550여만 원을 쓰는 등 585만 원을 횡령한 혐의였다. 김목사는 원조자금으로 인혁당·민청학련 구속자가족 생활비, 변호사착수금 등으로 130만4,000원을 유용한 혐의였다. 권목사는 생활비로 56만 원을 쓰고 활동비 등으로 94만 원을 지출했으며 또 2월 20일 청계천교회 정진영 목사를 폭행한 혐의도 받았다 『동아일보』 1975.04.04. 3면; 『경향신문』 1975.04.04. 7면; 『동아일보』 1975.04.07. 7면; 『한겨레』 2009.07.27.(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368081.html)
수도권특수지역선교위원회 선교자금 사건 수도권 빈민선교사업에 대한 세계급식선교회(BFW: Brot fuer die Welt)의 지원은 1973년 김관석 목사가 독일을 방문해 세계급식선교회 아시아 담당 책임자 볼프강 슈미트(Wolfgang Schmidt) 목사를 만나면서부터 시작됐다. 슈미트 목사는 앞서 한국을 방문했을 때 김목사 안내로 청계천 주변을 둘러본 뒤 빈민선교를 위한 원조를 약속했다. 그런데 1974년 9월 활빈교회 민병길 목사와 청계천교회 정진영 목사가 원조금 중 일부를 내놓으라고 요구하면서 문제가 시작됐다. 판자촌 주민을 동원해가며 농성과 난동을 부렸고, 결국 활빈교회는 100만 원을 받아갔다.
그러던 중 2.15조치로 석방된 수도권선교위 실무자들이 건강검진을 위해 입원해 있던 세브란스병원으로 청계천교회 정목사가 찾아가 권호경 목사의 병실에서 소란을 피우다 눈 옆에 가벼운 상처를 입게 됐다. 정목사는 여러 병원에서 진단서 발급이 거절되자 동대문경찰서의 공의(公醫) 병원으로 찾아가 전치 3주 진단서를 받아 입원했다. 이어 권목사를 비롯해 이규상·신동욱 전도사, 모갑경·허병섭 목사 등 5명을 횡령 등 혐의로 고소했다.
이 고소는 유신정권이 기독교교회협의회(NCC)와 수도권선교위에 개입할 수 있는 결정적인 빌미를 제공했다. 갑자기 청량리 경찰서장이 정목사 병실을 찾아가 병문안을 하는가 하면, 시경은 이 사건에 대한 인쇄물을 만들어 언론사에 돌리고, KBS는 TV 뉴스에 정 목사의 입원 장면을 보도했다. 당국은 구속자 석방운동과 인권운동, 산업선교운동 등이 기독교를 중심으로 한 종교계가 주요한 역할을 한 것으로 판단해 김관석, 박형규, 권호경, 조승혁 목사 등을 예의주시하고 있던 참이었다.
박형규 목사가 재판에 출석한 뒤 서대문구치소로 돌아오는 모습. 김관석은 교회 인권운동의 대표적 기구인 기독교교회협의회(NCC)를 대표하고 있었으며, 박형규와 권호경은 도시빈민을 선교대상으로 삼고 있는 수도권특수지역선교위원회 주요인물이었다. 조승혁도 기독교 사회행동단체들의 연합체인 한국교회사회선교협의체의 주요인물인 동시에 산업선교의 선구적 인물이었다. 당국이 이들을 겨냥한 것은 결국 기독교의 민주화운동과 인권운동, 사회선교 활동을 봉쇄·저지하려는 데 목적이 있었다. 횡령과 배임이라는 파렴치한 죄목은 이들의 명예를 훼손해 이런 목적을 달성하기에 최적이 아닐 수 없었다.
기독교계는 즉각 대응에 나섰다. 수도권선교위는 박목사를 대신해 문동환 목사가 위원장 서리를 맡았다. 교회협의회는 ‘선교자유수호 임시대책위원회’를 조직하고 박세경·이태영·이세중·홍성우·황인철 등 5명으로 변호인단을 구성했다.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도 4월 8일 명동성당에서 인권회복 기도회를 열고 민주인사들의 명예를 실추시켜 기독교계의 민주화운동에 제동을 걸려는 음모라고 규탄했다.
교회협의회의 6개 가입교단도 기도회를 여는 등 교회운동으로 전개해 나갔다. 국제기구와 각국의 책임 있는 교회지도자들도 잇따라 한국을 방문했다. 5월 30일에는 4명으로 구성된 세계교회협의회(WCC) 임원들이 한국을 찾아와 6월 2일까지 머물면서 진상을 확인하고, 법무부장관과 문공부장관을 만나 석방을 촉구했다. 7월 5일 3차 공판 때는 슈미트 목사가 독일에서 날아와 직접 증언대에 섰다. 그는 “원래 인권운동에 쓰라고 준 돈으로, 아주 만족스럽게 쓰였다”고 증언했다.
그러나 검찰은 김목사 징역 3년, 박·권목사에게 징역 5년, 조목사에게 징역 4년을 구형했고, 9월 6일 서울형사지법 대법정에서 열린 선고공판에서 재판부는 “피고인들에 대한 공소사실 중 업무상 횡령 내지 배임부분에 있어 인정할 수 없는 부분이 많이 있으나, 빈민구호를 구실로 받은 외국 원조자금을 국가보위를 해친 긴급조치 위반자들의 뒷바라지로 사용해 그들을 도운 것은 엄벌해야 한다”며 김목사와 조목사에게 각각 징역 6개월, 권목사에게 징역 8개월, 박목사에게 징역 10개월을 선고했다.
김목사는 더 이상의 재판이 무의미하다고 판단해 항소를 포기하고 9월 17일 가석방으로 풀려났다. 항소심이 끝난 뒤 이미 만기일을 넘긴 조·권목사는 출감할 수 있었고, 박목사는 남은 형기를 모두 채우고 1976년 2월 14일 출소했다.
한편 성공회대 한홍구 교수에 따르면, 이 사건 수사는 경찰이 담당했지만 배후에는 중앙정보부가 있었다. 조승혁 목사를 조사한 서울지검 공안부 이재권 검사는 수사 초기에 “오늘 조사는 다 끝내고 오늘밤 석방될 것입니다. 고생 많이 하셨습니다”라고 인사까지 했는데 그때 중앙정보부 문호철 검사가 이 검사의 방에 왔다가 이 말을 듣고 이 검사에게 ‘당신이 뭐냐, 당신이 정치하는 것이냐, NCC 횡령사건을 누가 석방시키라고 그래’라고 거세게 항의해 분위기가 바뀌었다”고 한다.
중앙정보부는 재판진행에도 깊이 간여했다. ‘구호금 횡령사건 담당판사 ㄱ 동향보고’라는 1975년 5월 22일 자 정보부 문서에 따르면, 사건 담당 ㅇ검사는 5월 21일 오후 2시께 서울형사지법 복도에서 우연히 ㄱ판사를 만나 처음으로 인사를 나눴는데, ㄱ판사가 검사에게 “공소장을 보니 무죄가 되기 쉽겠더라”는 등의 언동을 하였다는 것이다. 보고서는 “ㄱ판사의 언동내용을 분석하건대 동 사건을 무죄선고할 가능성이 농후하다고 판단되며 만약 무죄가 될 경우 사건 관련자들이 의기양양하여 이 사건에 대해 국제기구를 통해 악선전함으로써 국위손상이 우려되고, 종교탄압의 인상을 짙게 하며, 반체제 위해분자(교계) 등의 대정부 비난 구호로 삼을 계기가 조성될 우려가 있다”고 예상했다. 6월 3일에서 5월 30일로 앞당겨졌던 첫 공판도 정보부의 개입으로 WCC 진상조사단이 한국을 떠난 뒤인 6월 10일에야 열렸고, 7월 5일 3차 공판 때는 슈미트 목사의 증언으로 상황이 급반전하자 정보부가 판사에게 공판 진행을 늦추도록 압력을 넣으면서 유죄증거를 보강하려 했다. 또 선교자금 지출명세를 기록한 장부를 찾기 위해 김동완·허병섭 목사를 연행해 추궁하기도 했다.
주요 일지
(1975년)
⚫4월 3일 : 김관석, 박형규 권호경 조승혁 이창섭 이경배 연행.
⚫4월 4일 : 이창섭, 이경배 방면.
⚫4월 5일 : NCC ‘선교자유수호임시대책위원회’ 구성, 석방 성명.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당국의 보복이며 비열한 탄압행위” 성명.
⚫5월 28일 ~ 6월 22일 : 세계교회협의회(WCC) 바이체커 대표 등 4명이 내한.
⚫6월 10일 : 첫 공판 5분 만에 폐정.
⚫7월 5일 : 3차 공판에 원조금 제공자인 슈미트 목사가 증인으로 출석해 증언.
⚫7월 25일 : 추가 조사가 필요했던 중앙정보부 재판 일정 늦추도록 압력 넣어 5차 공판은 피고인 증인 호명만 하고 공판 종결.
⚫8월 2일 : 6차 공판에서 김관석 징역 3년, 박형규 5년, 조승혁 4년, 권호경 5년 구형.
⚫8월 16일 : 7차 공판에서 재판부가 선고 대신 갑자기 직권으로 증인 2명을 채택하며 변론 재개 선언.
⚫8월 21~25일 : 중앙정보부, 선교자금 지출명세(내역) 장부 찾기 위해 김동완(21일)·허병섭(25일) 목사 연행, 수도권특수선교협의회 회계담당 손학규 행방 추궁하며 구타. 허병섭 전치 2주 부상.
⚫8월 30일 : 8회 공판에서 검찰 전과 똑같은 구형 되풀이.
⚫9월 6일 : 재판 1심 선고.
⚫9월 17일 : 김관석 항소 포기해 가석방.
⚫9월 27일 : 수도권특수지역선교위 “무죄판결을 통해 사법부 신뢰 회복 촉구” 성명.
⚫10월 11~13일 : 공판기록 유인물로 만들어 배포했다는 이유로 NCC 이경배 김원식 이대용 연행.
⚫10월 22일 : 한국교회사회선교협의체 항소심과 관련해 석방촉구 건의서 법무부장관과 고등법원에 발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