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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혁당재건위사건 관련자 8명 사형 확정, 형 확정 18시간 만인 이튿날 사형집행

민복기 대법원장을 재판장으로 한 대법원 전원합의체(주심 이병호 판사)가 8일 ‘인민혁명당 재건위사건’의 상고를 기각함으로써, 사건 관련자 23명 가운데 서도원, 도예종, 하재완, 송상진, 이수병, 우홍선, 김용원, 여정남 등 8명에 대한 사형, 김한덕 등 7명에 대한 무기징역, 나머지 피고인에 대한 징역 15~20년이 확정됐다.
전원합의체 13명의 대법관 가운데 이일규 대법관 1명만 원심재판의 불법성을 들어 판결에 반대했다. 이판사는 일부 피고인에 대한 소수의견을 통해 “비상고등군법회의가 항소심일지라도 1심 판결을 파기하고 새로운 양형을 선고할 경우 직접심리주의에 따라 변론을 거쳐야 함에도, 원심이 검찰관의 공소사실에 대한 진술도 듣지 않고 또 1심에서의 신문을 생략, 변론만으로 결심하여 새로운 양형을 판결한 것은 재판 절차상의 위법이므로 김종대 이창복 황인성 등 17명에 대한 원심판결은 당연히 파기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대법원 판결은 공개재판으로 진행됐다고 했지만, 실제 방청이 허락된 것은 가족, 기자, 국제사면위원회를 대표하는 변호사 등 70여 명의 선별된 사람들뿐이었다. 가족으로는 2·15조치로 석방된 이철 피고인이 어머니 정경조와 함께 나왔고, 인혁당 관련자 우홍선 피고인의 부인 강순희, 서도원 피고인의 부인 배수자 등 20여 명이 공판을 지켜봤다. 국제앰네스티 소속 영국인 변호사 브라이언 로벨과 시노트 신부가 특별방청권을 얻어 방청했다. 외신기자는 방청이 허락되지 않았다. 피고인들은 한 사람도 출두해 있지 않았으며 변호사 한 명만 잠시 모습을 나타냈다.
판결 직후인 9일 새벽 황산덕 법무부장관의 서명으로 확정판결 18시간 만인 오전 5시 사형을 선고받은 8명 전원에 대한 형이 집행됐다. 서울구치소에서 교수형으로 집행됐으며, 형 집행에는 비상군법회의 검찰관, 서울구치소 소장, 제1육군교도소 군의관, 군목, 입회서기, 구치소집행단 등 6명이 관여했다. 9일 오전 4시 55분 서도원을 시작으로 사형이 집행되고, 오전 8시 50분 도예종을 끝으로 형 집행이 마무리됐다.
당국은 형 집행 사실을 가족에게조차 알리지 않았고, 집행 당일 아침 라디오를 통해 처음 전해졌다. 서울구치소 앞에는 이날 오전 면회업무를 중단한다는 공고문이 나붙었고, 기동경찰 100여 명이 정문에 배치됐다. 오전 11시께 구치소 앞에는 유족들이 달려와 “면회 한번 시켜주지 않은 채 판결 하루 만에 이럴 수가 있느냐”며 울부짖기 시작했다. 이수병의 부인 이정숙(29)은 전날 남편의 사형 확정판결이 나자 ‘대통령께 드리는 호소문’을 작성했으나 이를 발송조차 못하고 사형집행소식을 들었다고 안타까워했다.
송상진, 여정남의 시신은 유족의 동의도 없이 화장됐다. 송상진의 경우, 사형집행 다음 날인 10일 서울 응암동 성당으로 향하던 그의 시신을 경찰이 가로막은 뒤 유가족과 4시간 20분가량 실랑이를 하다 크레인을 동원해 영구차를 화장터로 옮겨 화장해 버렸다.
이 사건은 현재까지도 대내외적으로 ‘사법살인’이라는 비난을 받고 있으며, 스위스 제네바에 본부를 둔 국제법학자회(International Commission of Jurists)는 사형이 집행된 1975년 4월 9일을 ‘사법사상 암흑의 날’로 선포했다. 『중앙일보』 1975.04.08. 1면; 『동아일보』 1975.04.10. 1면; 『조선일보』 1975.04.11. 1면; 『한겨레』 2005.12.12.(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86963.html); 『경향신문』 2012.09.14.(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209142211005&code=940202)
대법원 확정판결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인혁당재건위" 21명
▲서도원(53·무직·사형) ▲도예종(52·삼화건설회장·사형) ▲하재완(44·무직·사형) ▲송상진(48·양봉업·사형) ▲이수병(40·학원강사·사형) ▲우홍선(46·한국골든스탬프 상무·사형) ▲김용원(41·경기여고교사·사형) ▲김한덕(블록제조업·무기) ▲유진곤(대신목재 사장·무기) ▲나경일(노동·무기) ▲강창덕(무직·무기) ▲이태환(측량설계사·무기) ▲김창일(극동건설부장·무기) ▲김종대(학원원장·징역 20·자격정지 20) ▲전재권(상업·징역 15·자격정지 15) ▲황현승(광신상고 교사·징역 15· 자격정지 15) ▲이창복(무직·징역 15·자격정지 15) ▲조만호(서적상·징역 20·자격정지 15) ▲정만진(목욕업·징역 20· 자격정지 15) ▲이재형(무직·징역 20·자격정지 15) ▲임구호(학원강사·징역 15·자격정지15)

"민청학련" 15명
▲여정남(32·경북대졸·사형) ▲이철(서울대·무기) ▲유인태(서울대졸·목재상·무기) ▲이현배(서울대학원생·무기) ▲황인성(서울대·징역 20·자격정지 15) ▲서중석(서울대·징역 20·자격정지 15) ▲정윤광(서울대·징역 20·자격정지 15) ▲정화영(경북대·징역 15·자격정지 15) ▲임규영(경북대·징역 15·자격정지 15) ▲김효순(서울대졸·징역 20·자격정지 15) ▲정상복(KSCF 강사·징역 20·자격정지 15) ▲이직형(KSCF 총무·징역 12·자격정지 12) ▲유근일(중앙일보 논설위원·징역 20·자격정지 15) ▲이근성(서울대졸·징역 20·자격정지 15) ▲이강철(경북대졸·징역 15·자격정지 15)

"파기환송"(형량은 원심)
▲김영준(연세대·징역 20·자격정지 15) ▲송무호(연세대·징역 15·자격정지 15)

대법원 판결 전 사형 확정 등 의혹 민청학련·인혁당 진상규명위원회는 이 사건으로 사형이 집행된 8명 중 유가족이 해외에 있는 2명을 제외한 하재완, 송상진 등 6명의 형선고통지서와 사형집행명령서, 형집행지휘서 6장씩을 국가기록원으로부터 넘겨받아 2005년 12월 12일 언론에 공개했다.
이들 서류를 보면, 비상고등군법회의 검찰부장과 서울구치소로 발송된 ‘다음과 같이 대법원에서 사형선고가 있었으므로 통지한다’는 ‘형선고통지서’에는 1975년 4월 8일 오전 10시였던 대법원 선고보다 7시간 전인 이날 오전 3시 비상고등군법회의 검찰부에 접수됐다는 소인이 찍혀 있다. 대법원의 최종선고가 나기 전 이미 이들은 무슨 이유에서인지 사형이 확정돼 있었던 셈이다. 또 형선고통지서에 찍힌 서울구치소 접수시간은 대법원 선고 4시간 뒤인 4월 8일 오후 2시이지만 누군가가 사인펜을 사용해 4월 8일의 ‘8’자를 ‘9’로 임의로 고쳐놨다.
국방부장관이 발부한 사형집행명령서 역시 서울구치소 접수도장의 날짜가 손으로 쓴 펜글씨로 ‘8일’에서 ‘9일’로 고쳐져 있다. 정당한 이유로 9일로 수정했다면 ‘사형선고가 내려졌다’는 통보가 사형을 집행한 뒤 9시간 정도 뒤(4월 9일 오후 2시-4월 9일 오전 5시 30분)에야 서울구치소로 도착했고 정작 사형을 집행했을 때는 형선고통지서도 없는 상태가 되는 오류가 발생한다.
접수날짜와 시간을 표시하는 소인을 살펴보면, 날짜는 숫자로 찍혀 있지만 접수시간은 원형 도장 둘레를 24등분한 시간 표시 눈금을 화살표가 가리키는 방식이어서 사실상 수정을 할 수 없다.
이에 대해 진상규명위 유진숙 부위원장은 “최종선고가 나기도 전에 선고통지서가 비상고등군법회의에 접수된 것은 정권에 의한 명백한 ‘사법살인’의 증거”라고 주장했다. 그는 또 “선고가 난 지 4시간 만에 서울구치소에 형선고통지서가 접수된 것도 행정 절차 등을 따져볼 때 물리적으로 불가능하다”며 “누군가 이 점을 의식해 8자를 9자로 조작했지만 미처 접수시간은 못 고친 것”이라고 말했다. 사형집행명령부에 나와 있는 피해자들의 최후진술(유언)도 조작됐을 가능성이 크다고 판단했다. 사형집행명령부에는 도예종이 “조국이 하루빨리 적화통일 되기를 바랄 뿐”이라고 말한 것으로 기록됐고, 8명 모두 “종교의식을 거부한다”고 돼 있다. 유가족들은 “종교의식을 거부한다는 내용은 당시 가톨릭에서 구명운동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의도적으로 변조한 것”이라며 “‘적화통일 만세’라는 말도 중정에서 조작한 것”이라고 의혹을 제기했다.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도 2002년 당시 교도관 김모를 통해 “도예종이 했다는 ‘적화통일’ ‘종교의식을 거부한다’는 등의 말을 들은 바가 없다”는 증언을 들었다고 밝혔다. 다른 교도관들도 “종교의식을 거부한다고 말하는 것은 수명을 단축시키는 일이기에 상식적으로 맞지 않고, 그런 이야기를 들은 적이 없다”고 했다.

이 사건을 조사한 국정원 과거사건진실규명을통한발전위원회는 다음과 같이 결론을 내렸다. 국정원 과거사건진실규명을통한발전위원회, 『과거와 대화 미래의 성찰-국정원 「진실위」보고서·총론(Ⅰ)』, 「인민혁명당 및 민청학련사건 발표문」, 2007, 166~199쪽>
1. 인혁당재건위사건 수사과정에서 고문, 강압적인 수사 등 관행적이고 폭넓은 인권 침해 행위가 자행되었음을 부정하기 힘들고,
2. 중앙정보부가 초기부터 인혁당재건위를 인지하고 조직사건을 만들려는 의도를 가졌던 것으로 보이지는 않으나, 중앙정보부의 수사는 다분히 임기응변적이어서 수사종결 시까지 ‘혐의와 증거의 불일치’를 극복하지 못했으며,
3. 유신정권과 사법부는 관련자들을 부당한 군사법정에서 강압적인 수단으로 정권의 요구에 따라 처단한 것은 무엇보다 가장 용납할 수 없는 국가폭력 행위이며,
4. 공판과정에서 피고인의 반대신문 차단, 피고인들의 증인 신청 기각, 발언 저지 등 재판의 공정성을 의심할 수 있는 조치가 있었는데 공판조서는 심문내용과 다르게 작성되었고, 군법회의 법을 근거로 피의자들에 대한 접견금지명령을 내려 피의자의 가족 및 변호인 접견권을 침해하였으며,
5. 확정판결 18시간 만에 사형집행이 이루어진 것과 관련. 대법원에서 상고가 기각되면 집행명령을 내리라는 대통령의 지시가 이미 전달되어 있었다는 의혹이 증언을 통해 제기되었고, 또 여러 정황으로 미루어 그렇게 판단하는 것이 충분히 가능하며, 조작된 최후진술이 사형수들의 용공성 부각 등 언론의 여론조작에 동원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