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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복한 김상진 사망

경기도 수원 서울대 농대 교정에서 11일 할복한 김상진이 오전 8시께 수원도립병원에서 2차 수술을 받다 실패해 서울대병원으로 옮기던 도중 사망했다. 병원측은 장간막 관통상 등으로 출혈이 심했다고 밝혔다. 가족이 병원에 도착했을 때 영안실과 그 주변에는 이미 사복경찰과 기관원들이 모든 자리를 메우고 있었다.
김상진의 유해는 12일 저녁 8시께 사망한 지 채 12시간도 안 돼 벽제화장장에서 장례식도 없이 서둘러 화장됐다. 그 사이 유족에게는 “불행한 사태가 돌발해 학생들이 다칠 수도 있다”는 협박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밤 10시가 넘어 벽제에 도착했는데도 화장장 문은 열려 있었고, 기관원들은 굴뚝에서 나는 연기를 확인한 뒤 자리를 떴다. 김상진의 큰 형 김상운이 화장된 유골의 일부를 몰래 숨겨와 중앙청 옆 법륜사에 보관했고, 1976년 4월 ‘한얼’ 회원들이 유족과 함께 벽제 국제공원묘지에 봉분을 만들었다. 김상진의 사망 후 그를 추모하는 집회가 진주, 대구, 목포 등 전국에서 이어졌다. 『동아일보』 1975.04.12. 7면;『한국일보』 2003.10.24.(https://www.hankookilbo.com/News/Read/200310240045275076)
김상진 할복 주요 일지 (1975년) ⚫4월 11일 서울대 시국성토대회에서 김상진이 「양심선언문」 발표 후 할복.
⚫4월 12일 : 김상진 사망.
⚫4월 14일 : 김영삼 신민당 총재, 추도식까지 막은 당국 처사 비난.
⚫4월 15일 : 전남 광주제일고교에서 추도식 연 고교생들 대거 무기정학. 민주회복 국민회의 성명. 신민당 당보 '민주전선’(1975년 4월 15일 자)에 「양심선언문」 실어 배포.
⚫4월 17일 : 광주 제일감리교회에서 300여 명이 모인 가운데 추모 목요기도회. 기도회에서 함석헌 “그가 하려던 말이 무슨 뜻인가 귀를 기울여야 한다”고 발언.
⚫4월 18일 : 가톨릭 학생지도신부단, 서울 명동성당에서 1,500여 명 모인 가운데 추도미사. 총장과 학장에 보내는 유서, 유품 속에서 발견.
⚫4월 19일 : 명동성당서 김상진 추모기도회. 김상진 어머니, 김영삼 신민당 총재에게 ‘소요보다 잊고 싶은 심정’이라고 편지.
⚫4월 22일 : 민주회복국민회의, 명동성당서 추도식. 당국이 주변 교통 전면 차단해 방해. 참가 예정이던 김대중 가택연금.
⚫4월 24일 : 경남 진주 경상대 학생 1,000여 명 교정에서 추모식, 안광출(22·외국어교육과 4) 등 학생 3명 연행.
⚫5월 9일 : 목포경찰서, 「대통령께 드리는 공개장」 등 복사한 전단 111장을 목포교육대 앞에서 학생에 배포한 국민회의 목포지부회원 조영기(21)를 즉심에 넘겨 10일 구류처분.
⚫5월 13일 : 긴급조치 9호 선포.
⚫5월 14일 : 서울대 공대생들, 김상진 장례식 준비하다 당국 개입해 실패.
⚫5월 22일 : ‘오둘둘’ 사건 발생. 서울대 도서관 앞 광장에서 긴급조치 9호 후 첫 대규모 시위. 학생들 김상진 추도식 열려다 교내 진입한 기동경찰대와 충돌. 경찰 현장에서 80여 명 연행해 그중 60명가량 구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