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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선 철폐 고려” 최덕신 단장 밝혀

(마닐라 22일발 AFP합동통신) 동남아친선사절단장 최덕신 중장은 대일관계의 개선을 위해 한국정부는 “평화선의 철폐”를 고려할 것이라고 말하였다.
필리핀 마닐라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최 장군은 현 군사정부가 아시아의 자유국가 중 특히 가장 가까운 일본과의 밀접한 국교를 원하고 있으며, “우리는 대일관계를 개선하기 위해 매일 노력을 계속하고 있는데 이 목적을 위해 모종 조치들이 취해질 것”이라고 밝혔다.『경향신문』 1961.7.23 조1면
평화선 1945년 8월 20일 연합군 최고사령부는 ‘지령 1호 제4항’에 의거하여 모든 일본 어선의 활동을 중지시킨후, 9월 27일 일본 측 어로수역을 지정하고 지정된 어로수역에서만 일본 어선의 활동을 허가했다. 이 경계선이 ‘맥아더라인’인데, 맥아더라인의 설정은 전쟁 전부터 극심했던 일본 어선들의 남획을 막으며 일본의 해양과 어업을 통제·관리하는 한편, 일본과 주변국의 불필요한 충돌을 방지하기 위한 점령정책의 일환이었다. 하지만 맥아더라인의 규제는 불철저했다.
한편, 1951년 연합국과 일본 사이에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이 체결되었는데, 한국은 이 조약에 전승국 자격으로 참여하고자 했으나 영국과 일본의 반대의견을 받아들인 미국의 거부로 배제되었다. 이 조약으로 일본의 주권회복과 함께 맥아더라인의 철폐가 기정사실화되자 한국은 강화조약 발효 이전에 한일 간 어업문제를 해결할 방안을 마련하기 시작했다.
당시 상공부 수산국이 마련한 방안은 한국 주변의 주요 어장을 한국의 ‘어업관할수역’으로 선포하여 일본 어선의 남획을 규제하는 것이었다. 외무부는 이 방안에 독도를 포함시키고 명칭도 ‘어업보호수역’으로 바꾼 안을 내놓았다. ‘어업보호수역’안이 대통령의 재가를 기다리는 동안 어업문제를 비롯한 한일문제의 각종 현안들을 타결하기 위해 미국의 주선으로 1951년 10월 20일 제1차 한일회담 예비회담이 시작되었지만, 이 회담은 별 성과 없이 끝났다.
그런데 이승만 대통령은 한국 어업의 보호라는 경제적 성격뿐만 아니라 북한, 소련, 일본 등의 해상침략 저지라는 안보적 성격까지 살릴 수 있는 보다 강력한 방안을 요구했다. 이에 ‘어업보호수역’의 의미를 넘어서 ‘주권’과 ‘영해’의 문제가 적극적으로 검토되기 시작하였으며, 그 결과 1952년 1월 18일 ‘인접 해양의 주권에 관한 대통령의 선언’(약칭 ‘해양주권선언’)이 선포되었다.
‘해양주권선언’은 4개의 조항으로 이루어졌는데, 그중 제3항에 규정된 ‘한국의 주권이 미치는 수역의 경계선’이 바로 50~60해리에 달하는 ‘평화선’이다.
즉, 평화선은 경제적, 안보적 측면에서 철폐가 예정된 맥아더라인을 대체하기 위한 것이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곧 시작될 제1차 한일회담 본회담을 앞두고 일본 측을 압박하기 위한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1952년 4월 25일 강화조약 발효 3일 전에 맥아더라인은 철폐되었다.
평화선이 선포되자 일본은 평화선이 불법이라고 주장하면서 철폐를 강력히 요구하는 한편, 평화선을 넘어 어업을 계속하였고, 이에 맞서 한국은 평화선을 침범하는 일본 어선들을 나포하고, 강경책으로 일관하였다.
평화선 선포 이후 1955년까지 평화선 분쟁은 한일관계에 있어서 가장 뜨거운 이슈였다. 1950년대 후반에 접어들며 평화선은 대일 협상카드의 역할을 하기도 했지만, 평화선 분쟁은 1950년대 한일관계에 있어 가장 뜨거운 이슈였다. 이 과정에서 미국은 평화선 자체를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한국에 더 비판적이었다.
이후 박정희 정권은 정권의 정당성 확보를 위해 경제개발에 사활을 걸었는데, 1957년부터 미국의 원조가 감소하자 일본으로부터 경제개발에 필요한 자금을 도입하고자 했다. 그는 이승만 정권과는 달리 한일회담에 적극적으로 임했으며, 한일문제의 현안은 평화선에서 청구권으로 옮겨오게 되었다.
1962년 11월 12일 김종필-오히라 메모가 작성되면서 청구권문제는 사실상 타결되었지만, 청구권 합의의 이행을 위해 평화선 문제가 함께 해결되어야 했다.
그러나 한국 국민들은 이미 평화선을 영해로 인식하고 있었고, ‘해양주권선언’이라는 명칭에서와 같이‘주권’의 개념으로 이해하고 있었다. 따라서 박정희 정권은 평화선이 영해를 규정하는 선이 아니라는 것을 적극 홍보했지만 평화선이 불법이라는 국제사회의 비난과 함께, 한국 어민의 생명과 주권을 걸고 일본과 흥정한다는 한국 국민들의 거센 비난을 피할 수 없었다. 아울러 한국인들에게 평화선은 대일 민족감정의 상징이기도 했다. 실제로 ‘평화선 사수’는 한일회담 반대 시위에 가장 많이 등장한 구호였다.
박정희 정권은 청구권 타결을 위해 평화선을 ‘양보’해 버렸다. 1965년 6월 22일 체결된 한일협정 중 어업협정의 주요 내용을 보면 한국 어민만이 배타적으로 어업을 할 수 있는 어업수역(전관수역)은 공해를 포함하여 12해리까지 설정되었고, 40해리까지는 한국과 일본 어민이 같이 조업하는 공동규제수역으로 설정되었다. 결국 어업협정은 일본의 요구를 거의 들어준 셈이었는데, 어업 격차 해소는 청구권 자금 중 9만 달러의 어업협력자금을 받는 것으로 처리되었다.
그러나 어업협력자금과 공동규제수역 설정은 한국어민들에게는 전혀 실리가 없었다. 그 이유는 어업협력자금이 결국 평화선 수역 내에서 조업으로 취득된 이익금 중 남는 돈을 주는 격이라는 것과 공동규제 수역에서의 조업은 한일 간 어업기술력의 차이로 한국어민들에게 큰 타격이 될 것이라는 점 때문이었다. 한편, 이 협정에서 평화선은 전혀 언급되지 않았는데, 이는 타협이 어려운 평화선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한일 양국의 정치적 결정이었다. 즉 한국 정부는 한일협정에서 평화선이 언급되지 않았기 때문에, 한일협정 체결 이후에도 여전히 평화선이 남아있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한일협정 체결에도 불구하고 아직 사라지지 않았다는 한국 정부의 주장은 억지에 불과했다.위의 글은 다음과 같은 문헌을 참고하였다. 오제연, 「평화선과 한일협정」, 『역사문제연구』 14, 역사비평사, 2005, 13~42쪽. 이원덕, 『한일 과거사 처리의 원점-일본의 전후처리 외교와 한일회담』, 서울대출판부, 1996, 47~49쪽·84~89쪽. 박진희, 「한·일 양국의 한일협정 반대운동 논리」, 『기억과 전망』 16, 2007, 337~342쪽.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한국민주화운동사 1』, 돌베개, 2008, 394쪽. 조윤수, 「‘평화선’과 한일어업협상」, 『의제로 본 한일회담』, 선인, 2010, 434~443쪽. 오오타 오사무, 『한일교섭』, 선인, 2008, 155~158쪽. 『동아일보』 1962.5.3 석3면, 『동아일보』 1962.5.4 석2면, 『동아일보』 1962.5.6 석2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