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내용 바로가기주메뉴 바로가기

글자 크기 조절

청구권에 대한 법적 근거 논란

12일에 열렸던 제1차 한일정치회담에서 일본청구권에 대해 법적 근거를 들고 나왔다고 한다. 그 내용은 ‘군정법령 제33호’와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 제4조’의 해석이었는데, 최덕신 외무장관고사카 외상 간의 해석논의는 뚜렷한 차이를 나타내는 것이었다고 전해진다.
정통한 소식통은 고사카 외상이 미군정법령 제33호의 공포일자가 1945년 12월 6일이므로 그 발효시기를 일본포츠담선언을 수락한 1945년 8월 9일로 소급시킬 수 없다고 하면서, 12월 6일 이전에 일본으로 반출한 재한 재산은 청구권에 포함될 수 없다고 표명했다고 한다. 이에 대해 최 외무장관은 군정법령 33호가 12월 6일에 공포되었다고 할지라도, 바로 이 군정법령에서 일본의 재산권이 ‘항복일자’인 8월 9일자로 미군에 양도되었음을 명시하고 있다고 반증을 들어 말했다고 한다.『경향신문』 1962.3.13 조1면. 이 회담에서 고사카 외상은 ① 청구권문제는 북위 38도선 이남만의 문제로 북한의 대일 청구권은 제외한다. ② 한국이 몰수한 방대한 재한 일본재산을 고려할 때 한국의 청구권 요구는 낮춰져야 한다. ③ 한국은 몰수한 재한 일본재산의 목록을 일본에 제시해야 한다는 주장을 전개하였다. 이에 한국은 크게 반발하였는데, 특히 한국의 청구권을 38도선 이남에 국한한다는 주장은 ‘한국을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정부로서 인정하지 않는다’는 견해가 되기 때문에 묵과할 수 없는 중대한 문제로 인식되었다.(이원덕, 『한일 과거사 처리의 원점-일본의 전후처리 외교와 한일회담』, 서울대출판부,1996, 155쪽)
미군정법령 제33호 태평양 미육군 총사령부는 1945년 9월 7일 포고1호를 발표하면서 주민의 소유권을 존중한다는 사실을 밝혔다. 당시는 미군이 진주하기 전이었고, 한국에 있던 일본인들이 본국으로 돌아가기 전이었기 때문에 이들의 재산은 소유권이 존중되는 것이었다. 미군정이 수립된 이후인 9월 25일 미군정은 군정청 법령 제2호를 통해 일본의 국·공유 재산 및 개인 재산에 대해서는 8월 9일 이후의 처분이 금지된다는 규정을 발표하였다. 이어 9월 28일 발표된 군정청 법령 제4호는 일본 육·해군이 소유한 재산을 몰수하는 법령이었다. 그런데 10월 30일에 다시 ‘일본인 개인 재산 처분방침 제4조’를 발표하여 일본인의 재산을 한국인들이 구매할 수 있도록 하는 조치를 마련했다. 이것은 일본인의 사유재산에 대해서는 미군정이 그 소유권을 인정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이렇게 초기 미군정의 일본 재산에 대한 정책은 애매한 내용도 많았고, 자주 변경되었다. 이는 미국의 정책이 일본의 국·공유 재산에 대해서는 몰수방침이 명확히 서 있었던 데 반해 사유재산에 대해서는 확실한 정책을 세우지 못했음을 보여준다. 그 이유는 1907년 헤이그에서 제정된 육전법규에 기인하는데, 이 ‘적지의 법규관례에 관한 조약’은 적의 재산일지라도 사유재산인 경우에는 존중한다고 규정하였다. 미군정은 1945년 12월 6일 법령 제33호로 일본의 국·공유 및 사유재산 처분에 관한 최종 결론을 내렸다. 동 법령의 제2조는 다음과 같이 규정되었다.

제2조 - 1945년 8월 9일 이후 일본정부, 정부의 기관, 국민, 회사, 단체, 조합, 정부의 기타 기관 또는 정부가 조직하거나 감독하는 단체가 직접 또는 간접적으로 전부 또는 일부를 소유 또는 관리하는 금, 은, 백금, 통화, 증권, 은행감정 채권 및 유가증권 그리고 본 군정청 관할 내에 존재하는 그 밖의 모든 종류의 재산 및 그 수입에 대한 소유권은 1945년 9월 25일부로 미군정청이 취득하고 동재산 전부를 소유한다.

이 법령에 의해 일본의 국·공유 재산뿐만 아니라 개인의 사유재산까지 모두 미군정청에 귀속되었다. 이처럼 미국이 헤이그 육전법규의 규정을 위반하면서까지 사유재산을 적산화한 이유는, 한국경제를 일본으로부터 분리된 독립적 구조로 만들고자 하는 것이 당시 미국 대한정책의 기본 목표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서 일본인들이 남기고 간 재산을 이용하는 것이 필수적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1948년 초 미·소 간 전시협조체제가 붕괴되고 냉전이 본격화되자 미국은 일본을 경제적으로 부흥시켜 아시아에 있어서의 대소 방파제를 구축한다는 방향으로 정책을 전환하였다. 이에 따라 미국의 대일 배상정책은 근본적으로 전환되었고, 한국의 대일 배상 요구의 가능성도 희박해졌다.
대한민국 정부수립 후인 1948년 11월 미국과 ‘재정 및 재산에 관한 최초협정’이 체결되었으며, 이 협정의 규정에 따라 군정청 법령 제33호의 제2조에 의해 미군정청에 접수되었던 일본정부 및 일본인의 재산은 한국정부에 이양되었다.
제1차 한일회담에서 한국이 제기한 8개 항목의 대일요구는 이 미군정법령 제33호 2조에 근거하고 있다.
이후 한일회담 진행 과정에서 미군정법령 제33호의 효력에 대한 한일 양국의 주장은 차이를 드러냈다. 효력발생 시점에 대해서 한국 측은 1945년 8월 9일로 소급하여 모든 재한 일본재산은 몰수되었고, 군령공포일인 12월6일 전에 반출된 것에 대해서도 반환청구권이 있다고 주장하였지만, 일본 측은 “법률이 해당 법령의 효력 발생 시에 있어서 적용 범위 내에 존재하지 않는 대상에는 법률상 효력이 미치지 않는다는 것이 법리상 원칙이다. 12월 6일 군령 공포 당시 이미 한국 내에 존재하지 않았던 재산 및 권리를 접수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입장이었다. 즉, 일본 측은 12월 6일 이후의 것에만 재한 일본재산의 소유권을 인정한다는 주장이었다.위의 글은 다음의 문헌을 참고하여 작성. 박태균, 「한일회담 시기 청구권문제의 기원과 미국의 역할」, 『한국사연구』131, 2005,41~46쪽. 이원덕, 『한일 과거사 처리의 원점-일본의 전후처리 외교와 한일회담』, 서울대출판부, 1996, 17~22쪽, 126~127쪽.이원덕, 「한일회담과 일본의 전후처리 외교」, 『한국과 국제정치』 Vol.12 No1, 1996, 42~44쪽. 이원덕, 「한일회담에서 나타난 일본의 식민지지배 인식」, 『한국사연구』131, 2005, 101~103쪽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대일 강화조약) 일본과 연합국 사이에 제2차 세계대전을 종결시키는 강화조약의 체결을 앞두고 한국정부는 한국이 강화조약의 정식 서명국이 된다는 전제하에 전쟁 배상적인 성격을 가진 대일요구를 준비해 왔다. 1951년 초 미국은 한국을 강화조약에 참가시키려는 방침을 가지고 있었지만 영국과 일본은 미국의 이러한 방침에 반대하였다. 영국은 “한국은 일본과 전쟁을 한 적이 전혀 없으며 따라서 조약의 많은 규정은 한국에 적용될 수 없다”고 주장하면서 한국을 제외시키려 하였다. 일본은 한국이 서명국이 될 경우, 100만 재일조선인을 연합국민으로 인정해야 하며, 이들은 보상받을 권리를 취득하게 되어 일본이 난처한 지경에 빠지게 된다며 반대하였다. 당시 일본은 전후 일본에 있었던 조선인들을 대부분 공산주의자로 생각하면서 사회불안 요소로 규정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들의 입지를 강화시켜주는 정책을 실행하려 하지 않았다.
결국 미국은 영국과 일본의 견해를 수용하여 한국을 서명국으로 참여시키려던 정책을 바꿨다. 강화조약에의 한국제외 결정이 통고된 이후에도 한국은 서명국이 되려는 노력을 계속하였지만, 비공식적인 옵저버의 자격으로 강화회의 참석이 허용되었다.
그런데 재한 일본재산의 처리문제를 규정하고 있는 강화조약 초안 제4조는 한국에 매우 불리한 내용을 담고 있었다.

제4조 - 제2조와 제3조에서 일본과 일본인의 재산 및 상기 지역을 현재 관리하고 있는 당국과 그주민(법인포함)에 대한 일본과 일본인의 청구권(채무관계 포함)의 처리, 그리고 상기당국과 주민의 재산 및 일본과 일본인에 대한 청구권(채무관계 포함)의 일본에 있어서의 처리는 일본과 상기 당국간의 특별한 협정에 의해 결정한다.

제4조는 한국내의 귀속재산 문제를 한일 양국이 직접 협정에 의해 해결하도록 규정하여 장차 열리게될 일본과의 교섭에서 일본 측이 재한 일본재산의 소유권을 주장해 올 가능성을 제기했다. 따라서 한국정부는 제4조의 수정을 강력히 요구했으며, 미국 역시 미군정이 제정한 법령을 번복할 수 없었기 때문에 샌프란시스코회담을 위해 성안된 문서 초안 제4조의 내용에 (B)항을 신설하여 미군정 법령의 효력을 인정하는 내용으로 수정했다.

(B)일본은 제2조 및 제3조에 규정된 지역의 미합중국 군정에 의해 또는 그 지령에 의해 행하여진 일본과 일본국민의 재산처리의 효력을 승인한다.

제1차 한일회담에서 일본은 위 (B)항이 국제법상 점령군에 허용되지 않는 처분까지 승인하는 것은 아니라며 조약해석에 이의를 제기하며 역청구권을 주장하였다. 1907년 ‘헤이그 육전법규’ 제46조의 적지사유재산 불가침의 원칙을 원용하여 재한 일본인 재산은 그 처분에 의해 발생한 대가 및 과실에 대해 원권리자인 일본인에게 청구권이 있다는 것이었다.

한편, 강화조약 제4조에서 주목해야 할 점은 ‘청구권’이라는 용어가 한일의 특수한 과거관계를 처리하는 개념으로서 국제조약에 등장했다는 사실이다. 이후의 청구권 교섭은 이 제4조의 내용을 전제로 진행되었는데, 한일 양 정부는 1950년대의 교섭에서 제4조의 해석을 둘러싸고 격렬하게 대립하였으며, 1960년대에는 제4조에 규정된 청구권을 ‘경제협력’ 방식으로 처리하게 되었다. 그러나 제4조는 청구권을 양국간의 특별협정의 주제로 한다는 것을 제시했을 뿐, 청구권의 내용과 의미와 성격을 분명하게 규정하지는 않았다. 청구권이 식민지 지배, 전쟁으로 인한 피해의 청산을 규정한 개념은 아니었다.
이 조약의 정식명칭은 ‘일본국과의 평화조약’이며, 1951년 9월 8일 조인되고, 1952년 4월 28일 발효되었다.위의 글은 다음의 문헌을 참고하여 작성. 오오타 오사무, 『한일교섭』, 선인, 2008, 97~106쪽. 박태균, 「한일회담 시기 청구권문제의 기원과 미국의 역할」, 『한국사연구』 131, 2005, 50~53쪽. 이원덕, 『한일 과거사 처리의 원점-일본의 전후처리 외교와 한일회담』, 서울대출판부, 1996, 26~42쪽. 이원덕, 「한일회담에서 나타난 일본의 식민지지배 인식」, 『한국사연구』131,2005, 103~104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