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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필-오히라 제2차 회담, 한일협상 내년 봄 조인키로, 청구권문제 이외의 평화선문제 등은 대체적 양해 성립

김종필 중앙정보부장오히라 외상과의 제2차 회담은 예정대로 12일 일본 외무성에서 열려 한일 간 현안 전반에 걸쳐 보다 구체적인 토의를 하였으나, 청구권 문제 등에 “상당한 주장의 차”를 남긴 채 이케다 일본수상 귀국 후에 있을 것으로 기대되는 일본 측 태도의 새로운 진전을 기다리기로 하였다.
김 부장은 또 새로운 정치회담의 개최여부에 대해서 예비회담의 진전에 따라 필요하다면 정치회담 이상의 것이라도 열 생각을 갖고 있으나, 지금으로서는 새로운 이야기가 없는 한 정치회담을 꼭 가져야 할 것인지 자기로서는 말하기 어렵다고 하였다. 이러한 김 부장의 말은 김-오히라 1차 회담 이래 고조되었던 타결 기운이 오히려 후퇴한 인상을 주기도 하나, 김 부장 자신은 여전히 한일교섭이 “고비를 넘었다”는 생각을 버리지 않고 있다고 말하고, 2차 회담의 결과가 자기와 오히라 외상을 통해서 박 의장과 이케다 수상에게 각각 보고된 후에는 어떤 새 진전이 있을 것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김 부장은 청구권문제 이외의 평화선 및 기본조약과 법적 지위문제에 있어서는 많은 진전을 이날 회담에서 보았으며, 원칙적으로 서로의 주장에 양해가 이루어졌다고 말했다. 김 부장은 한일문제 타결의 시기에 관해서 지난번 1차 회담 때에 이야기된 바 ‘내년 봄 조인과 초여름 비준’이라는 예정을 이날 회담에서 서로 확인했다면서, 일본 자민당 내의 회담촉진기운이나 오히라 외상의 적극적인 태도는 교섭의 제1책임자인 이케다 수상을 오히려 앞지르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고 말하였다.
김 부장은 오히라 외상으로부터 이케다 수상이 박 의장에게 보내는 친서를 받았다. 회담의 구체적 내용에 관해서는 일체 발표된 바 없으나, 주로 일본 측 소식통은 청구권 또는 무상공여액에 있어 한국이 3억 5천만 불의 5년 내지 7년 불을 주장했고, 일본은 3억 불의 12년 불을 고집했다고 전했다. 이것은 종래 6억 불 선과 1억 5천만 불 사이에 가로놓였던 차폭 4억 5천만불이 5천만 불로 줄어든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13일자 일본 조간신문들도 김-오히라 2차 회담을 크게 보도하면서 양 측의 주장을 3억 대 3억 5천만 불 또는 2억 5천만 불 대 3억 불로 차액이 5천만 불로 줄어들었다고 보도하고 있다.『동아일보』 1962.11.13 석1면. 이 회담에서 한일 양국은 청구권 총액에 대한 합의에 도달했다. 그리고 단독회담 후 생길 수 있는 해석의 차이를 방지하기 위해 메모를 작성하자는 한국 측의 제안을 일본이 받아들임에 따라 김종필-오히라 메모가 작성되었다. 그러나 이 메모에는 금액의 명목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되어 있지 않았다. 이는 메모가 규정한 금액에 대해 한일 쌍방이 대내적으로 그 명목을 편의적으로 해석할 수 있는 여지를 남겨두기 위한 포석이었다. 일본 측은 이 금액의 제공을 ‘경제협력’ 혹은 ‘독립축하금’으로 발표하였고, 한국 측은 ‘청구권 금액’으로 발표하였다.(배의환, 『보릿고개는 넘었지만: 배의환 회고록』, 코리아헤럴드·내외경제신문, 1992, 216쪽. 김동조, 『회상 30년 한일회담』, 중앙일보사, 1986, 236쪽.(이원덕, 『한일 과거사 처리의 원점-일본의 전후처리 외교와 한일회담』, 서울대출판부, 1996, 173쪽에서 재인용))
김종필-오히라 메모 1. 무상
(1) Korea 측은 3.5억 불(OAOpen Account. 청산계정을 말한다. 이는 상거래 시 수시로 현금을 주고받지 않고 일정한 기간의 거래를 모아서 그 대차를 정산하는 방식이다. 포함)
(2) Japan 측은 2.5억 불(OA 불포함)
이를 양자 간에 3억 불(OA 포함)을 10년 기간의 조상(繰上)이원덕은 조기 제공으로 풀어서 기술했다.(이원덕, 『한일 과거사 처리의 원점-일본의 전후처리 외교와 한일회담』, 서울대출판부, 1996, 173쪽)방식 조건으로 하여 양 수뇌에게 건의한다

2. 유상(해외경제협력기금)
(1) Korea 측은 2.5억 불(이자율 3% 이하, 7년 거치. 20~30년 상환)
(2) Japan 측은 1억 불(이자율 3.5%, 5년 거치, 20년 상환)
이를 양자가 2억 불(10년 기간 조상방식 조건, 거치 7년, 이자율 3.5%, 20년 상환)로 하여 양 최고수뇌에 건의한다.

3. 수출입은행차관을 말한다.에 대하여
(1) Korea 측은 별개로 취급할 것을 희망
(2) Japan 측은 1억 불 이상을 프로젝트에 따라 신장(伸長)할 수 있음.
이를 양자 간에 합의하여 국교정상화 이전이라도 곧바로 협력하도록 추진할 것을 양 수뇌에게 건의한다.『동아일보』 1992.6.22 석1면. 이 청구권 액수는 일본이 불과 몇 년을 침략한 동남아 각국에 지불한 것보다도 적었다. 차관을 제외한 배상금액을 기준으로 버마는 3억 4천만 달러, 필리핀은 5억 5천만 달러, 인도네시아는 2억 2380달러였다. 또 오히라 외상이 ‘독립축하금’, ‘경제원조’ 등의 굴욕적인 명목을 제시했는데도 명확한 반대를 하지 않았다. 특히 김종필-오히라 밀담에서는 “양국 정부는 이상의 조치로 양국 간의 청구권문제가 해결된 것으로 간주한다”는 것에 합의하여, 무상원조 3억 달러로 일제의 침략에 의해 한국과 한국인들이 받은 피해를 포괄적으로 종결지음으로써, 징용이나 정신대, 종군위안부문제조차도 더이상 거론하지 못하게 못을 박았다. 김-오히라 합의는 3년 후 조인된 한일협정에 그대로 반영되었다. 김-오히라 메모는 이후 전개될 한일관계의 모형을 제시하였다. 한일문제는 중대 사안이고 대단히 미묘하고 복잡한 민족감정이 개재되어 있기 때문에 ‘민족적’합의가 절실했다. 그러나 개방적, 공개적 성격이 되어야 했을 한일회담은 밀실에서 처리되었다. 이렇게 밀담이 졸속합의가 된 것은 군부정권이 가진 민정이양 전에 ‘해치워야 한다’는 강박관념과 함께, 화폐개혁의 실패 등으로 국내경제가 매우 나쁜 상태였던 점, 민주공화당 사전조직을 위한 정치자금 조달에 관계된 4대의혹사건 중 3대 의혹사건이 일본 측 자금과 관련된 것이라는 점이 말해주는 것처럼 민정에 참여할 군부가 일본과 검은 뒷거래를 하고 있었던 것이 더 큰 요인이었을 것이다. 김-오히라 합의가 그대로 한일협정 체결로 나타나고 밀담의 진상이 밝혀질 경우, 군부는 1963년 대통령선거와 국회의원 선거에서 결정적인 타격을 입을 수 있을 것이라는 판단이 작용하였겠지만 이 합의는 체결까지 가지 않고 일단 그 수준에서 묶어두었다. 그러나 한일회담 배후의 진상이 조금씩 알려지기 시작하면서 거센 국민적 반발에 부딪혀 한시라도 급했던 한일협정 체결은 의도와는 다르게 무려 3년이나 연기되고 말았다.(서중석, 「박정권의 대일자세와 파행적 한일관계」, 『역사비평』 봄호,1995, 46~47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