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내용 바로가기주메뉴 바로가기

글자 크기 조절

서울대·고려대·연대생 약 5,000명, 대일 굴욕외교에 반대하며 5·16 이후 최대 규모 가두시위

24일 하오 2시경 서울대학교 문리대 학생 약 300명이 ‘사수하자 평화선’, ‘일본제국주의를 말살하자’ 등의 플래카드를 들고 교문을 박차고 데모에 돌입하였다. 이에 앞서 이들은 1시 20분에 학교 교정에 모여 ‘매국외교 중지하라’, ‘매판자본 타파하라’ 등의 벽보를 교문 주위에 붙이고, 박삼옥(정치과 3년) 군이 낭독한 선언문을 통해 “반세기 전 일본 관헌의 총검협박과 위협 속에서 을사보호조약을 체결했던 일본제국주의 전쟁상인들은, 또 하나의 조약 갑진년 대한민국 매매계약을 체결하려 하고 있다”며, “일본제국주의의 잔혹한 압제하에서 피어린 항쟁을 통하여 전취한 해방조국의 민족자주성은 다시 제국주의적 일본독점자본의 독아에 박살되기 한 걸음 전에 있다”고 울분을 토했다. 학생들은 1시 55분쯤 교정 정문 앞에 이완용이케다 수상의 허수아비에 휘발유를 뿌려 화형에 처하는 ‘제국주의자 및 민족반역자 모의화형식’을 거행하며 기세를 올렸다. 화형에 앞서 동대문서 정보계장이 이를 제지했으나 학생들은 듣지 않았으며, 교정 주변에는 사복형사들이 눈에 띄었다.
최희조(정치과 2년)군은 전국대학생에게 보내는 메시지에서 “제2의 을사보호조약인 갑진년 대한민국 매매조약을 지성 있는 대학생으로 좌시할 수 없다. 전국 대학생은 총궐기하자”고 목멘 소리로 외쳤다.
화형식에 이어 “민족반역적인 한일회담을 즉각 중지하고 동경 체재 매국정상배는 일로 귀국하라”, “평화선을 침범하는 일본어선은 해군력을 동원하여 격침하라”, “한국에 상륙한 일본독점자본가의 척후병을 즉시 축출하라”, “박정권은 민족분노의 표현을 날조 공갈로 봉쇄하지 말라”는 등의 결의문(전문은 별도 항목 참조)을 통과시킨 후 학생 500여 명은 “중지하라 매국외교, 박살하라 매판세력”여기서 주목할 것은 3·24 이후의 운동에서 ‘매판’이라는 개념이 강조된다는 점이다. 이는 1960년대 한국경제의 신식민지적 세계시장 편입과정에서 형성된 것으로 한국의 지배적 자본을 지칭하는 것이었으며, 중앙정보부의 정보정치로 나타나는 군사독재와 이들과 결탁한 자본가층을 민중과 대치하여 놓은 것이다.(이종오, 「반제반일민족주의와 6·3운동」, 『역사비평』 여름호, 1988, 58쪽) 이처럼 한일회담문제를 국내 매판자본과의 결탁의 관점에서 보고 이를 비호하고 있는 박정희 정권을 규탄하는 입장은, 지금껏 한일회담으로 형성될 한일관계 자체가 아닌 단순히 정권 측의 굴욕적인 외교적 태도, 즉 청구권의 액수와 평화선문제, 대일 저자세 등을 문제삼아온 야당 측의 그것과는 초기부터 차별성을 갖는다.(홍석률, 「굴욕외교 반대투쟁과 6·3운동」, 『근현대사강좌』 제6호, 1995, 118~119쪽) 앞서 1961년 4·19 서울대 4월혁명 제2선언문에 ‘지금 이 땅의 역사 사실을 전적으로 변혁시키기 위해서는 반봉건, 반외압세력, 반매판자본 위에 세워지는 민족혁명을 이룩하는 길뿐이다.’라는 구절에 ‘매판자본’이 등장하고(김삼웅 편, 『민족, 민주, 민중선언』, 일월서각, 1984, 26~27쪽), 1963년 서울대 4월혁명 제4선언문에도 매판적 정치경제질서에 저항하는 내용이 나오기는 하지만 시위구호에 본격적으로 등장하는 것은 이 시기부터이다.등의 구호를 외치며 교문을 나서 시위에 들어갔다.
그런데 하루 전인 23일에는 문리대에서 민족주의비교연구회라는 학생단체 주최로 ‘한일관계 강연회’를 가진 바 있었고, 이날 하오 일부 학생들이 굴욕외교반대 데모를 하겠다는 설이 있었으나 중지된 바 있었다. 서울대생들은 23일 밤 서울법대 여학생회관에서 비밀간부회의를 열고 24일 상오 11시에 교내행사로 끝낼 예정이었으나 모측의 끈덕진 방해로 오후까지 지연되었던 것이다.
교문 밖으로 나간 시위대는 대기 중이던 약 200명의 경찰기동대와 충돌하였다. 2시 30분쯤 서울 법대생 200여 명이 합세하였다. 경찰의 제지 속에 수의과 대학 앞까지 밀고 가는 도중 곤봉세례 등 혼란 끝에 약 25명이 경찰에 연행되었다. 경찰제지로 더 이상 앞으로 나가지 못한 학생들은 문리대 정문 앞에서 경찰과 대치하였다.
일부 밝혀진 연행자의 명단은 다음과 같다. 송진혁(정치과), 김의종(지질학과), 최일석(사회학과),같은 날짜 경향신문은 사회학과로 동아일보는 사회사업과로 보도됨이진환(국문과), 이성준(고고학과), 김구영(국문과), 김국환(일반인).
경찰과 문리대생이 대치하고 있는 동안 하오 2시 50분쯤 약 100명의 법대생들이 호응, 이들도 데모에 들어갈 기세를 보이자 경찰은 최루탄 1발을 발사하고 가스마스크를 쓰기 시작했다. 경찰과 대치하고 있던 서울대생들은 3시 반쯤 돌을 던지며 다시 교문을 박차고 나와 시민들과 합세하여 수의과대학 앞까지 밀고 나왔다. 경찰은 데모대에 밀려 차츰 뒤로 물러나오고 있으며 데모 참가 시민과 학생수는 500~600명가량이었다.
하오 3시 50분 데모대는 종로5가 효제국민학교 앞길을 꽉 메우고 대치하고 있는 경찰기동대와 옥신각신하고 있는데 경찰기동대는 데모 학생들 150명가량을 연행했다.3월 24일 서울대 학생들의 시위에 대한 보다 상세한 내용은 『새세대』 1964.4.1 3면 참조
▶고려대고려대는 총학생회보다는 단과대 학생회 중심으로 시위계획이 진행되었다. 특히 정경대 학생회장 박정훈, 상과대 학생회장 이명박, 법과대 학생회장 이경우의 활약이 컸다. 3월 18일 고려대생들은 대일굴욕외교반대 강연회를 결정했다가 학교 측의 사정으로 열지 못했다. 3월 23일에는 각 대학교 사이에 보이지 않는 긴박감이 돌았고, 여기에 자극받은 학생회 간부들은 이날 밤 무교동의 K여관에서 심야구수회의를 가졌다. 바로 이 여관은 4·19 당시(고대의 경우 4·18시위 당시)에도 모의 장소로 이용했던 곳이다.(서중석, 「6·3사태: 64년 봄의 한일회담 반대시위」, 『신동아』, 1985년 6월호, 298쪽)생 300여 명은 이날 3시 20분부터 교내 배구 코트에 모여 한일굴욕외교성토대회를 벌인 후 선언문(별항 참조)을 낭독하였으며, 그들은 결의문『경향신문』 1964.3.24 석1면에 게재된 이 결의문은 별도 하단의 ‘고려대학교 3·24 결의문’과 다르다. 고려대학교 100년사 편찬위의 『고려대학교학생운동사』 177쪽도 ‘고려대학교 3·24 결의문’과 동일하다.을 통해 ① 우리의 행동은 반정부 데모가 아니다. ② 한일회담을 거부한다. ③ 김종필 씨는 즉시 귀국하라고 주장했으며, 데모에 앞서 하오 3시에 교내 성토대회에서 채택한 호소문은 다음과 같다.
호소문 강건한 주체성과 확고한 독립성을 창달키 위해 쇄골의 면려와 누한의 정성으로 노력한 우리 고려학원은 이제 또다시 분기하지 않으면 안 된 현실을 슬퍼한다. (중략)
장구한 역사를 낯 붉어지는 지리함으로 퇴색시키는 근본 소이는 자학에 가까우리만큼이나 경솔했던 저자세의 전제함을 명백히 인정한다. (생략) 금일 우리의 호소는 일본과의 국교를 고루한 감정과 배타 인습으로 전제함이 아니요 냉정한 안목과 신중한 사려로 그들의 부드러운 미소를 경계함을 알라.
공공연히 한국근대화의 수훈자임을 자처키 위해 두려움 없는 저주의 망발을 차분한 심정으로 배경하는 것이다.
우리는 반정부가 아니라 반일임을 알라.
이들은 교문을 뚫고 시위에 돌입 “왜 일본을 신임하는가?”라는 플래카드를 들고 아무 저항 없이 신설동 로타리까지 나왔으나, 급거 출동한 300여 명의 경찰관들과 충돌하여 10여 명의 부상자를 내며 더 나아가지 못한 채 연좌데모에 들어갔다.
한편 연좌시위에 들어가기 전 경영학과 학생들과 합세, 1,300명가량이 된 데모대는 하오 4시 20분 협상안을 제기했다. 이들은 ① 오늘의 우리 행동을 관철시키기 위해 학생 측과 정부고위층과의 회담을 수일 내로 갖게 하라. ② 경찰에 억류된 학생을 즉각 석방하라고 주장했다. 고대생들은 하오 5시 15분 신설동 로터리에 자리 잡은 3중의 경찰저지선을 뚫고 물밀듯이 동대문 쪽으로 향했다. 학생들의 행렬 뒤에는 합류한 대광고교생 200여 명고대생들의 시위를 응원하던 대광고교생 500여 명 가운데 약 200여 명은 하오 6시 30분부터 한 시간 동안 반도호텔 앞에서 ‘대일굴욕외교반대’를 외치면서 연좌시위를 감행하다가 7시 30분경 해산했다.(이광일, 「한일회담 반대운동의 전개와 성격」, 『한일협정을 다시 본다』, 아세아문화사, 1995, 102쪽)과 일반시민, 국민학생 등 수천 명의 일반인도 호응했다. 종로5가에 이른 데모대원들은 경찰과 정면출동, 경찰은 최루탄을 발사했다.
한편 경찰관들과 맞서 싸우다가 20여 명이 연행되고 10여 명이 곤봉으로 얻어맞아 머리가 터지는 등 중상을 입었다.밝혀진 부상자 명단은 다음과 같다. 김용운(경영과 1년), 정훈(상과 4년), 나성안(물리과 2년), 백도선(경제과 1년), 오청(상과 1년), 원무수(정외과 3년).
▶연세대생들연세대에서는 3월 13일 시내 모처에서 단과대 간부들이 모인 것에서부터 시위계획이 구체화되었다. 학생회 간부들은 그 뒤 데모 감행 날짜를 잡기에 부심하던 끝에 22일로 결정했다. 그러나 이날은 집회허가와 학교당국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3월 24일 함석헌·장준하의 대일굴욕외교반대 강연이 끝나면 하기로 마지막 결정을 보았다.(서중석, 「6·3사태: 64년 봄의 한일회담 반대시위」 『신동아』 1985년 6월호 297쪽)은 이날 하오 2시 강당에서 장준하 씨의 ‘현시국에 있어서의 대학생의 임무’라는 제목의 강연과 함석헌 옹의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생각하고 어떻게 해야 하겠는가”라는 시국강연회를 가졌다.『동아일보』 1964.3.24 석1면·3면, 『경향신문』 1964.3.24 석1면·7면
서중석은 3·24시위의 의의에 대해 설명하면서, “박정권과 학생들의 숙명의 대결이 시작되었음을 알리는 시위”로 그때부터 1990년대까지 계속된 학생운동의 2단계 출발점이라고 평가하였다. 1960년 4·26 이후 5·16쿠데타까지 학생시위는 빈번하였으나, 거의 다 ‘학내분규’라는 말이 의미하듯 학내문제 때문에 일어났으며, 4·19와 비교할 때 3·24는 상당한 시일에 걸쳐 준비된 것으로 여러 대학이 함께 나온 점에서 4·19와 비슷한 점이 있으나 그보다 더 조직적이었고, 3·24 이후의 주요 시위도 갈수록 조직적인 성격을 띠고 있었으며, 3·24와 그 이후의 학생운동 주동자는 대체로 반정부적 성격을 지녔다는 점에서도 5·16쿠데타 이전과 차이가 있었다고 지적한다.(서중석, 「1960년 이후 학생운동의 특징과 역사적 공과」, 『역사비평』, 역사비평사, 1997년 겨울호, 28~29쪽)

오후 4시 5분 약 2,300명이 시국강연회가 끝난 후 강당 앞 광장에 집결, 한 학생이 데모하자고 외치자 만장일치로 결의에 찬동하고 시위대중 300여 명이 교문 밖까지 나와 함석헌 옹의 뒤를 따라 스크럼을 짜고 노고산동 로타리까지 진출했으나, 경찰의 제지로 더 못 나가고 “특정재벌을 처단하라”, “평화선을 절대 사수하라”, “나라 팔아먹는 김종필은 자숙하라” 등의 구호를 외치며 연좌시위를 벌이며 기세를 올렸다. 또 약 400명의 학생은 신촌역 뒷길로 돌아 신촌 이화여대 입구 큰길까지 진출, 더 가려 했으나 경찰에 의해 75명가량이 연행되고 후속이 끊어지면서 주춤해졌다.서중석, 「6·3사태: 64년 봄의 한일회담 반대시위」, 『신동아』, 1985년 6월호, 296쪽. 당시 『사상계』에서도 ‘민족적 민주주의’를 ‘가식적인 민족적 주체성’이라고 비판하고, 3·24굴욕외교반대운동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하였다. 즉, 한일국교정상화에 반대하는 것은 아니지만, 현 이케다 정부, 자민당 정권의 불투명한 노선에 동조할 의사가 없으며, 그들과 ‘친자관계’를 맺는 굴욕을 용서할 수 없다는 입장을 피력하는 한편, 3·24시위가 ① 현 정부의 석연치 않은 대일굴욕외교의 흑막, ② 반세기 전 망국 화근인 일본의존의 환상, ③ 현 정부의 무정견, 무능, 부패 등의 고발로 기성정권의 기반을 근본적으로 흔들어 놓았다고 하였다. 특히 매판자본화의 경계와 매국상인의 규탄은 정치자금의 ‘무한적’ 사용과 더불어 굴욕외교의 저류를 이루는 의미를 시사해 준다고 역설했다. 이러한 비판과 함께 40년 일제침략은 양보할 수 없는 국교재개 외교의 담보라며 구체적 요구로 ① 평화선은 양보할 수 없다, ② 김-오히라 메모의 정체를 폭로하라, ③ 기본조약을 체결하여 정상화의 기본을 세우라, ④ 원맨쇼 외교의 소영웅주의를 버리라는 것 등을 나열했다. 또한 ‘정상화가 아닌 한일국교는 경제적 노예화의 시작’이라는 점을 강조하는 동시에 ‘총칼로 이 숭엄한 민중의 항의를 막을 수 있다는 우상을 박멸하라’는 주장을 하였다.(「권두언: 우상을 박멸하라-굴욕 외교에 항의한다」 『사상계』 1964년 4월호 8~9쪽)
서울대 제국주의자 민족반역자 화형집행식 선언문 일본제국주의의 잔혹한 압제하에서 피어린 항쟁을 통하여 전취한 해방조국의 민족자주성은 다시 제국주의적 일본독점(자)본의 독아에 박살되기 한 걸음 직전에 있다. 이제 우리는 조국해방투쟁의 영용스러운 전통을 계승하기 위하여, 조국이 부여하고 민족양심세력의 엄숙한 의무를 수행하기 위해서, 일본독점자본의 교활한 음모를 분쇄하기 위해서 민족해방과 자주독립을 쟁취하는 새로운 투쟁대열 가운데서 자신을 발견하려 한다.
한국전쟁을 밑천으로 재기한 일본의 제국주의적 전쟁상인들은 다시 한국을 장악하려는 음모를 책동하고 있으며 정부는 한국어민의 생명선이며 국가존망의 국방선이며 한국 최대의 미개발보고인 평화선을 방해하여 36년간의 압제와 착취의 대가를 6억 불로 흥정하고 있다.

이것이 일본제국주의자가 반세기에 걸쳐 한국을 강점하면서 백만 장정을 징용으로, 군대로, 노예노동으로 강제 사역시키고, 민족문화의 재보를 착취해 가고, 마지막 순간까지 금괴를 도탈해가고, 은행권을 남발하는 단말마의 만악을 자행하던 대가이다.
무상원조, 어업협력, 정부차관, 민간차관 등등의 허다한 조건이 붙은 6억 불이 일본제국주의가 음모와 학살과 억압으로 한국을 병참기지로, 상품시장으로, 식량보급지로 착취해 간 제국주의자들의 반성이다.
민족문화를 절변시키고, 오늘의 이 빈곤을 강요하는 파행적 경제구조를 남겼고, 살인적 정치탄압을 자행한 일본제국주의자들의 참회가 이 위장된 6억 불이란 말인가?
이제 일본제국주의는 새로운 독점시장과 수탈의 광장을 찾아 다시 흉악한 독아를 드러내고 있다. 반세기 전 일본관헌의 총검의 협박 위하 속에서 을사보호조약을 체결했던 일본 제국주의 전쟁상인들은 또 하나의 보호조약-갑진년 대한민국 매매조약-을 체결하려 하고 있다. 피어린 항쟁으로 해방된 조국 자주민족의 양심은 이 또 하나의 이완용을 애국자로 표창할 것인가? 매국노로 처형할 것인가?
현재와 같은 유치한 단계의 한국 어업이 거대한 일본자본에 예속되고 양보된 평화선 내에서 2년 이내에 어업협력조의 2억 불을 되찾아 갈 수 있으며, 벌써 국내 상품을 압도하는 제국주의의 상표는 취약한 민족자본을 잠식 예속시켜 저들의 매판자본화하며, 일본 독점자본의 저속한 광고문화는 민족의식을 마비시키고 민족문화의 맹아를 말살하게 됨은 너무나도 명약관화한 사실이 아닌가? 이러한 경제, 문화, 사회 전반적인 예속관계하에서 정부는 민족의 주체성을 약속할 수 있는가? 한일회담 조기타결을 서두르는 정부는 과연 민족의 주체성을 보장하기 위한 무슨 준비를 하고 있는가?
이것은 민족주체성을 성명하는 정부의 입버릇처럼 명백한 기만이다. 민족의 이익과 긍지를 배반하고 모든 민족적 양심의 반대 속에도 굴욕외교를 강행하는 정부가 일본자본의 시녀로 타락하지 않는다는 아무런 보장도 없다.
이제 민족의 양심적 자주역량은 일본제국주의의 독아로 조국을 유인하는 한일회담을 즉각 중지할 것을 요구한다.
과학적 근거에서 청구권이 수락되고 대등한 입장에서 국교를 시작할 수 있을 때까지 여하한 형태의 일본제국주의의 침략도 한국민족은 항구적이며 거족적인 반대투쟁을 계속할 것이며, 제국주의자를 타도하고 그 음흉한 음모를 분쇄하는 성스러운 민족자주독립의 전열 속에 양심적 민족영양은 대오를 정비한다. 민족의 해방과 자립은 그를 다해서 투쟁하는 민족에게만 주어진 영광이며, 이것만이 민족의 번영과 민족사에 전진을 약속하는 유일의 길임을 확신한다.
민족양심의 표현과 정의의 실천을 우리들 생애의 필연성으로 자각해 온 우리는 이 엄숙한 민족자립을 위한 투쟁대열을 과감스러이 전진시킬 것이다.
전진하는 민족사는 우리를 정의의 편으로 옹호할 것이며 제국주의자에 반대하는 모든 민족자주영양은 우리를 열렬히 성원할 것이다.
1964년 3월 24일
서울대학교 제국주의자 민족반역자 화형집행식『대학신문』 1964326 3면
서울대학교 3·24 결의문 ① 민족반역적 한·일회담을 즉각 중지하고 동경체재 매국정상배는 일로 귀국하라!
② 평화선을 침범하는 일본어선은 해군력을 동원하여 격침하라!
③ 한국에 상륙한 일본 독점자본가의 척후병을 즉시 축출하라!
④ 친일주구의 국내 매판자본가를 타살하라!
⑤ 미국은 한일회담에 관여치 말라!
⑥ 제국주의 일본 자민당 정권은 너희들의 파렴치를 신의 앙화(殃禍)를 입어 속죄하라!
⑦ 박정권은 민족분노의 표현을 날조·공갈로 봉쇄치 말라!
⑧ 오늘 우리의 궐기를 역사는 증언하려니와 우리의 결의와 행동이 ‘신제국주의자’에 대한 반대투쟁의 기점임을 만천하에 공포한다.
1964년 3월 24일
서울대학교 제국주의자 및 민족반역자 화형집행식『6·3동지회, 『6·3학생운동사』, 역사비평사, 2001, 459쪽
고려대학교 3·24 선언문 우리는 오늘 공화당 정부와 일본이 진행하고 있는 굴욕적인 한·일협상을 좌시할 수 없어 여기 또다시 섰다.
4·19의 혈흔이 아직 사라지지 않았고 6·6의 봉기가 결실조차 못 본 오늘 상아탑의 전위는 또다시 피 어린 투쟁을 벌여야 하는 현실을 저주한다.
일제의 악랄한 수탈과 착취가 이 강토를 폐허의 초토로 유린했건만, 현금 또다시 일제의 망령이 우리의 심장을 파열시킨다.
공화당 정부가 내걸었던 민족주의는 어디로 사라져 가버리고 우리의 우방 미국이 덮어씌운 면사포가 정부를 현혹한다.
우리는 정부에게 묻는다.
단군조선 개국 이래 최악의 빈곤의 구렁텅이에서 기아의 사선을 방황하는 민족을 구할 자신이 그다지도 없는가.
이것이 비밀회담이 타결될 당위인가.
이것이 민족이 생존할 유일한 활로인가.
일본 제국주의의 악랄한 독점자본가들이 이 국가에 경제적 식민주의의 질곡과 철쇄를 덮어씌우려 한다.
평화선에 둘러싸인 우리의 푸른 바다를, 반만 년에 가꿔온 우리의 금수강산을 일제에 매도하려 한다.
우리는 자부한다.
일제의 철쇄에서 해방한 어엿한 독립국가인 조국을 갖고 있음을.
그러나 여기에 대등한 주권국가로서의 외교가 그 꼴이어야만 하는가.
우리의 구한말의 쓰라린 역사를 또다시 반추해야 된단 말인가.
우리는 절규한다.
우리의 피 어린 노력으로 우리끼리 살아보자고.
중국, 일본, 미국은 차례로 우리의 종주국이었다. 우리는 종주국 없이 한 번 살아보자.
이것이 우리의 핏덩이 같은 절규이다.
일제의 망령을 박멸할 때까지 우리는 영원한 투쟁의 대열에 참여할 것을 여기서 엄숙히 선언한다.
1964년 3월 24일6·3동지회, 『6·3학생운동사』, 역사비평사, 2001, 459~460쪽
고려대학교 3·24 결의문 조국은 바야흐로 일인의 농간에 의해 쓰러져가는 위기에 직면했다.
겨레의 양심이 살아 있고, 민족혼이 불멸하는 우리들 항일본산의 후예들은 이제 한·일굴욕외교의 전적 책임을 정부에 묻는다.
만약 한 촌의 정신이라도 있다면 조국의 앞날을 위해 민족정기 앞에 할복하라.
4·19의 후예들은 말한다.
4·19는 살아 있다고!
1964년 3월 24일6·3동지회, 『6·3학생운동사』, 역사비평사, 2001, 460~461쪽
고려대학교 대정부 건의문 1. 우리는 민주주의의 최후의 보루임을 알라.
1. 조국과 민족이 너희들 일인의 것이 아님을 알라.
1. 한·일굴욕회담이 현 정부의 유일한 탈출로가 아님을 알라.
1. 우리의 자유의사를 무력행사로 짓밟지 말라.
1964년 3월 24일6·3동지회 『6·3학생운동사』 역사비평사 2001, 461쪽
고려대학교 3·24 구호 1. 평화선은 생명선이다. 2. 한국에 있는 일인 상사를 즉각 철수시켜라.
3. 국민의사를 존중하라.
4. 우리들의 자유의사를 무력행사로 짓밟지 마라
5. 한·일회담은 즉각 중지하라.
6. 조국은 너희들 일인의 것이 아님을 알라.
7. 연행된 학생들을 즉각 석방하라.
1964년 3월 24일6·3동지회, 『6·3학생운동사』, 역사비평사, 2001, 461쪽
연세대학교 3·24 선언문 국가는 백년대계요, 민족은 인격체다. 민중은 역사의 바탕이요, 대학은 민족양심의 최후 보루다.
우리 연세대학교는 아래 사항이 관철될 때까지 성명운동과 더불어 범학생운동, 대대적 국민운동을 전개시킬 것을 엄숙히 선언한다.
1. 민족긍지를 상실한 대일굴욕외교를 즉시 중단하라.
1. 백만 어민의 생명선이요, 국방의 절대선인 평화선을 그 알량한 청구권과 바꾸기 전에 한·일관계의 근본적 해결책을 강구하여 국민 앞에 명시하라.
1. 4·19이념과 민족자립경제의 반역적 망국체결을 처단하고 그 재산을 국가에 환수하여 민족자본화하라.
1964년 3월 24일6·3동지회 『6·3학생운동사 역사비평사 2001, 461~462쪽
연세대학교 3·24 결의문 갈가리 찢겨 죽어만 가는 우리 동포에게 우리 학생들이 이제 또다시 한번 줄 것은 오직 힘찬 결의와 과감한 행동이다. 우리에게는 3·1정신을 이어받은 4·19의 젊은 혼이 알알이 살아 있다.
총칼의 울타리 속에 동포를 몰아넣은 현 정부는 또 부족하여 36년의 굴욕적인 소와 말의 생활에서 흘린 애국 선혈, 삼천만의 선혈과 통곡이 채 가시기도 전에 만신창이 된 이 나라 이 민족을 이제 또다시 누구에게 넘기려는가?
굴욕과 반예속의 역사를 또 한 번 되풀이하지 않기 위하여 우리는 현 한일회담의 조기타결이나 우리 자신의 힘을 보여주지 않는 매국적 회담을 결사반대한다.
이에 우리 연세 5천 건아는 감연히 학창을 터져나와 전 민족에게 우리의 힘찬 결의를 엄숙히 고한다.
〈결의사항〉 1. 국민의사 무시한 매국적인 한일회담이 중단될 때까지 우리는 투쟁을 계속한다.
2. 삼천만의 생명선인 평화선을 일보도 양보할 수 없다.
3. 악덕재벌을 타도하고 민족자본을 육성하라.
4. 양식인의 의사를 비인도적 무력으로 짓밟지 말라.
5. 감금된 궐기학생은 즉시 석방하라.
6. 4·19정신에 위배되는 모든 정치적 망동을 삼가라.
1964년 3월 24일
연세대학교 학생 일동『연세춘추』 1964.3.30 1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