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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대, 대구대, 경북대생도 시“한일회담 즉각 중지 등 관철 안 되면 계속 투쟁” 정부·학생대표 회담 결렬위

25일 상오, 중앙청 제1회의실에서 열린 정부 학생대표 연석회의문교장관의 장황한 발언을 듣고 있던 고려대 학생대표가 일어나 “우리는 문교장관의 강의를 들으러 여기 모인 것이 아니다”고 소리치면서 ① 한일회담 즉각 중지, ② 대통령과의 연석회의, ③ 구속학생 전원석방, ④ 체일대표 소환 등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으면 계속 투쟁하겠다는 결의문을 낭독하고 퇴장, 잇달아 서울대, 연세대 대표 등 대부분의 학생대표들이 퇴장함으로써 결렬, 하오 1시 10분 산회했다.
서울시내 37개 대학 대표 98명『동아일보』 1964.3.25 석1면. 경향신문은 36개 대학의 92명으로, 이광일은 56개 대학의 92명으로 기술했다.(『경향신문』 1964325 석1면 이광일 「한일회담 반대운동의 전개와 성격」 『한일협정을 다시 본다』 아세아문화사 1995 103쪽)과 고광만 문교, 김용식 무임소, 양찬우 내무차관 등이 모인 이날 회의에서 개회 벽두 고 문교장관이 등단, “냉정한 지성을 되찾아 의사의 발표를 신중히 해 달라”는 요지의 발언을 30분가량이나 계속하자, 고대 총학생회장 구자신(경제과 4년) 군은 “획일적인 문교행정도 확립 못 하는 문교장관의 강의를 들으러 여기 나온 것이 아니다”라고 외치면서 고대 총학생대표의 결의문(하단 별항)을 낭독하고 퇴장했다.
뒤이어 서울대 총학생회 대표도 “공화당 의장에 매달린 국무위원들과는 얘기하고 싶지 않다. 대통령을 직접 만나게 해 달라”고 요구하면서 퇴장, 뒤이어 연대 대표를 비롯한 각 대학 대표들이 계속 퇴장하였다. 학생들의 요구사항 중 구속학생 석방은 이미 이날 정오쯤 다 이루어졌다.
이날 고대 학생대표가 낭독한 결의문은 다음과 같다.
결의문 ① 한일회담을 무조건 중지하고 체일 중인 대표를 즉시 소환할 것 ② 대통령과의 연석회담을 개최할 것 ③ 구속학생을 전원 석방할 것 ④ 이상의 요구가 즉시 행동으로 관철되지 않으면 우리는 우리의 투쟁을 계속할 것을 선언하며 이 회장(會場)을 퇴장함『동아일보』 1964.3.25 석1면. 3월 25일부터 정부의 데모진압 방침은 급격히 바뀌었다. 24일에는 경찰들의 곤봉에 수십 명의 학생들이 중경상을 입었는데, 25일에는 청와대 입구만 삼엄한 경계를 하고 약 20발의 최루탄을 쏘았을 뿐 전연 제지하지 않았다. 오히려 부산 같은 곳에서는 경관들이 시위대를 호위해주는 인상을 주었고, 학생들도 스스로 시위를 끝내고 해산하였다. 박정희 대통령은 25일 상오 최두선 국무총리에게 “평화적인 학생들의 데모를 당국이 무력으로 제지하여 학생들이 피를 흘리지 않도록 하라”고 지시했다. 대통령 부인 육영수 여사는 24일 데모에서 수없이 머리를 난타당해 의식을 잃은 채 세브란스병원에 옮겨진 연세대 도서관학과 1년 최하룡의 입원실에 위문의 꽃을 보냈다. 데모학생을 맞은 당국자들은 대체로 학생들의 의견이 반영되도록 노력하겠다고 약속하였다. 24일의 데모 때부터 사회여론은 학생들을 열렬히 지지하고 있었다.(서중석, 「6·3사태: 64년 봄의 한일회담 반대시위」, 『신동아』, 1985년 6월호, 298~299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