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내용 바로가기주메뉴 바로가기

글자 크기 조절

한일 굴욕외교 반대 시위 연 사흘째 서울, 부산, 광주 등 전국 11개 도시에서 6만여 명이 참가

서울 26일 서울에서는 경기고, 배재고, 중동고, 동도공고 등 고교생들과 경기대생 등 모두 25,000여 명이 시위를 벌였으며 전국 주요도시의 대학, 고교생들도 잇따라 거리에 나섰는데 이화여대생들은 이날 경비정모금운동을 벌이기 시작했다.
26일 상오 9시 30분경 경기고 학생 1,500여 명은 수송중고교 뒷길에 집결하여 결의문을 낭독하고, 반일·반공·방첩 등 플래카드를 앞세우고 학교를 출발하여 데모에 돌입했다. 경기고생들은 화신 앞을 통과하여 의사당 앞에 집결한 다음 정부에 보내는 결의문을 다시 낭독하고, 을지로 입구 쪽으로 경찰의 에스코트를 받으면서 행진했다. 뉴코리아호텔 앞에서 애국가를 부르기도 했다. 학생들은 “국내매국상인을 규탄한다”, “잔악한 일본의 경제침략을 분쇄”, “이것이 민족적 민주주의이더냐?”, “쪽발이는 물러나라”, “영토의 한 치도 줄 수 없다” 등의 플래카드와 구호를 앞세우고 을지로입구~화신앞~세종로를 돌면서 질서정연하게 시위를 했다. 학생들은 데모 돌입 1시간 30분 만인 오전 11시에 학교로 돌아갔다.
배재고등학교 학생 1,000여 명도 26일 오전 11시 30분경 시청 앞 광장을 지나 미대사관 앞을 행진했다.
동도공고 시위대 800여 명은 26일 낮 1시쯤 중앙청 앞까지 당도하였으나 2개 중대가량 되는 무장군대의 제지에 부딪혀 승강이를 벌이다가 개머리판에 얻어맞아 홍성익 군과 문영섭 군이 입과 코를 다쳐 피를 흘렸다.
마포고교생 800여 명은 26일 1시 반쯤부터 시경 앞에서 연좌시위를 벌이면서 연행된 학생 5명의 석방을 요구하였다. 마포고교생들의 말에 의하면 이날 낮 1시쯤 국회의사당 앞에서 이 학교 변영산 군 등 5명이 택시를 타고 가두방송을 하다가 경찰에 연행되었다.
중동고와 성북고생 각 1,000명도 학교를 나와 국회의사당 앞으로 모여 시위를 했으며, 보성고교생 1,000여 명과 경신고교생 500여 명도 굴욕외교 반대를 외치며 종로5가를 거쳐 국회의사당을 향했다.
보성고 1,000여 명과 경신고 500여 명의 학생들도 26일 오후 1시경에 굴욕외교반대를 외치면서 종로 5가를 거쳐 국회의사당으로 향하며 데모를 벌였다.
광주 26일 상오 8시 전남대학교 300여 학생들은 광주시 계림동 학생버스 정류장에 집결, “최루탄, 곤봉으로 우리의 자유를 막지 못한다” 등의 구호를 외치며 굴욕외교 반대시위에 들어갔다. 역전을 거쳐 도청 앞에 이르렀을 때는 등교하던 학생들이 합류, 9시 30분 현재 약 800여 명으로 늘어났는데 이들은 도청 앞 광장에서 “선열들의 혼이 욕되지 않기 위해 대일굴욕회담을 적극 반대한다”는 요지의 호소문을 낭독하고, “매국외교의 주역 김종필을 즉시 소환하라”는 플래카드를 들고 충장로로 행진했다. 이어 10시 45분쯤 광주제일고 1,500명도 스크럼을 짜고 시위에 합류, 11시 현재 도청 앞 광장에서는 조선대 학생 2,000여 명과 광주농고생 1,200여 명도 “대일굴욕외교반대”와 “이완용김종필을 지칭을 즉각 소환하라”는 등의 구호를 외치며 연좌데모를 했다.
전남상고생 1,000여 명은 하오 1시 10분 도청 앞 광장에서 “한일회담을 즉각 중지하라”는 구호를 외치며 시가를 행진, 광주서중에 있는 학생탑에 참배했다.『전남매일신문』 1964.3.27 1면
▶부산 26일 상오 10시 반 굴욕외교반대 데모에 돌입한 부산상고생 1,500여 명 및 교육대, 남고생 1,000여 명이 문을 뛰쳐나와 질서정연한 시위를 했다. 부산대생 2,000여 명도 “평화선을 사수하라” “김종필을 즉시 소환하라”, “야당은 우리들의 거사를 정치도구화하지 말라”당시 학생운동 세력들은 야당 측의 반대운동과는 차별성을 보이기는 했지만, 아직도 한일회담의 주체였던 박정희 정권에 대해서는 입장이 불명확한 상태였다. 학생들의 이와 같은 모호한 태도는 구정치인에 대한 커다란 실망감과 직결된 것이었다. 즉, 별다른 바람직한 대체세력이 없는 상태에서 섣부른 박 정권 퇴진운동은 대대적인 탄압과 아울러 결국 4·19 때와 마찬가지로 보수 야당 정치세력에 이용될 소지가 있었던 것이다. 이에 학생들은 굴욕외교 반대시위 과정에서 “야당은 우리를 이용 말라”는 구호를 외치기도 했다.(홍석률, 「굴욕외교 반대투쟁과 6·3운동」, 『근현대사강좌』 제6호, 1995, 121쪽)등의 구호를 외치고 ‘해방의 노래’를 부르면서 각각 교문을 나섰다. 경찰 백차를 선두로 하고 양쪽에 50~60명의 경찰관 호위를 받으며 질서정연하게 시가행진을 벌였다.
또한 상오 11시 부산시 거제동 소재 교육대학에서도 400여 학생이 “평화선을 사수한다”는 등의 플래카드를 들고 교문을 나와 부산공설운동장을 향해 질서정연하게 행진했다.『부산일보』 1964.3.26 석1면
▶수원 26일 상오 10시 서울대학교 농과대학생 1,000여 명은 “데모가 이적(利敵)이냐, 굴욕이 이적이냐”는 등의 구호를 외치며 굴욕외교반대 데모에 들어갔다. 한편 10시 40분쯤 이곳 수성중고생 700명도 데모에 들어갔다.
▶대전 26일 상오 9시 대전고등학교 전교생 1,500명은 “듣기 싫다 게다소리”, “평화선 사수”라는 플래카드를 앞세우고 한일굴욕외교를 규탄하는 시위를 했다. “굴욕외교 반대”, “평화선 사수하자”, “왜놈의 게다소리 듣기 싫다”등의 플래카드를 들고 거리를 누볐다. 학생대표 신현국은 “평화적인 시위를 마친 후 곧 학교로 돌아가겠다”고 말했다.
한편 26일 낮 12시 20분쯤부터 약 500명의 충남대 학생들도 대일굴욕외교 규탄데모에 들어가 충남도청 광장에서 연좌하였다. 충남도지사가 “학생들 의견을 중앙에 반영시키겠다”는 약속을 받고 1시 반쯤 학교로 돌아갔다.
▶온양 26일 상오 10시 온양중고생 2,000여 명이 교문을 나와 “굴욕외교반대”, “일본은 각성하라”, “평화선을 사수하자”, “1백만 어민을 생각하라” 등의 플래카드를 들고 대일굴욕외교 반대시위에 나섰는데 시위대는 경찰의 경호를 받으며 평화리에 시위를 끝냈다.
▶원주 26일 하오 1시쯤 원주농고생 400여 명과 원주고교생 700여 명, 대성고교생 200여 명은 4시간 수업이 끝나자 각각 운동장에 집결, 스크럼을 짜고 “대일굴욕외교 즉각 중지하라”는 플래카드를 들고 데모에 들어갔다.
▶대구 1,000여 청구대 학생 시위대는 하오 1시 10분쯤 역 광장에서 “제국주의에 대한 민족봉기를 호소한다”, “경찰의 비인도 만행을 규탄한다”는 내용의 결의문을 채택, 문화동 분교에 집결하여 대통령 및 국회의장에 보내는 메시지를 낭독하고 하오 1시 40분쯤 자진해산했다.『영남일보』 1964.3.27 조3면
▶이리 26일 상오 10시부터 이리 남성고 1,500여 학생들은 교문을 나와 “굴욕외교를 반대한다”, “김종필을 소환하라”는 플래카드와 구호를 외치면서 시가행진을 계속하여 역전에 집결하여 시위를 벌였다.
▶여수 26일 낮 12시 반쯤 여수 수산전문학생 450명은 교문 앞에서 40여 명의 경찰 제지를 뚫고 시위에 들어갔다.『동아일보』 1964.3.26 석7면 『경향신문』 1964326 석1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