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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변호사회, 송철원 피납 납치고문사건 조사 착수

26일, 송철원 납치고문사건을 조사 중인 서울변호사회 조사단(현규병, 이용석, 최돈연, 권재찬,이태수 변호사)은 자택에서 요양 중인 송철원을 방문, 지난 21일 새벽 0시 30분경 친구 최 군 집에서 연행된 후 22일 밤 11시 40분 귀가하기까지 경위를 들었다. 조사단은 송 군이 눈을 가리우고 산으로 끌려가 구타당할 때 4명의 괴한들이 “경찰에서 너희들 버릇을 잘못 들였다. 쥐도 새도 모르게 없애겠다”는 등의 말을 한 것으로 보아 괴한들의 신원을 경찰관이 아닌 중앙정보부 원으로 보고 있다. 이 조사단은 송 군이 사건 당일 중부서를 거쳐 린치 당한 산꼭대기 건물, 경찰병원, 치안국 마당, 동대문서, 원남동 소재 모 여관 등을 들렀었다는 진술에 따라 이 장소를 차례로 조사하기로 했다.
송 군은 이날 조사단 앞에서 린치 당시 괴한들이 담뱃불로 지진 손을 내보이면서, 이번 린치의 동기가 “내가 학원사찰조사위원장이었다는 점과 과거부터 잘 아는 문리대 중문과 출신 중앙 정보부원이었던 김덕창(현 석유공사 직원)의 말을 잘 듣지 않았다는 데서 발단된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이날 조사단에서 송철원은 공포의 피납 당시를 회상하며 “납치방법이 아주 지능적이며 교묘했다”고 폭로하면서 친구 최 군의 집을 출발, 중부서-KAL 앞 노상-산꼭대기 콘크리트 건물-경찰 병원-치안국 마당-동대문서에 이르기까지 약 3시간 동안 괴한들과 자동차가 무려 4번이나 릴레이식으로 바뀌었다고 밝혔는데, 맨 처음 연행하던 괴한 4명이 KAL건물 앞길에서 대기 중이던 까만 새나라 택시에 탄 다른 4명에게 인계, 이들에게 이끌려 산꼭대기 건물에서 모진 매와 고문을 당한 뒤 경찰병원으로 옮겨졌고(이때 송 군이 응급치료 후 실신상태에서 깨어났다고 함),경찰병원에서는 또 다른 2명이 지프차에 태워 치안국 마당에서 동대문서 정보계 형사들에게 인계했다고 한다.『경향신문』 1964.5.26 석7면, 『동아일보』 1964.5.26 석3면. 6·3시위를 폭발시킨 직접적인 계기는 서울대 문리대생들의 단식투쟁이겠지만, 송철원 린치사건이 5월 하순 내내, 그리고 6월 2일까지 미친 영향은 학생들에게나 시민들에게나 결코 작은 것이 아니었다.(서중석, 「6·3사태: 64년 봄의 한일회담 반대시위」, 『신동아』, 1985년 6월호, 310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