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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내 대학생 4,500여 명, 굴욕외교에 반대 시위 528명 연행, 11명 구속

13일, 한일굴욕외교를 반대하는 대학생들의 성토대회가 서울 시내 곳곳에서 열렸다. 고려대, 경희대, 연세대, 성균관대, 동국대 등 약 4,500명의 학생들이 “굴욕외교를 반대한다”, “구속학생 석방하라”, “제2을사보호조약을 철회하라” 등의 플래카드를 들고 거리로 나와 시위를 감행했다. 경찰이 최루탄을 발사하고 경찰봉을 휘둘러서 많은 학생들이 중상을 입고 길바닥에 쓰러졌다. 광주에서는 전남대생 일부가 제적학생 징집에 반발하여 성토대회를 열고 농성을 벌였다.
고려대에서는 13일 낮 11시 25분 고대생 1,000여 명이 교정에서 “제2을사보호조약 즉시 철회하라”, “구속학생 즉시 석방하라” 등의 플래카드를 들고 고대 총학생회 및 평화선사수투쟁위 주최로 한일굴욕외교반대 성토대회를 열었다.
총학생회장 유유길선언문을 통해, “우리는 이제 소아병적 영웅심과 시정의 부패로 인한 경제적 파탄의 일시적 구호책으로 일본을 끌어들이려 하는 것은 국민의 여론을 무시, 졸속 저자세로 일관된 치욕적 행위로 규탄하며 한일관계의 모든 가조인이 무효임을 민족의 이름으로 선언한다. 민족의 살길은 평화선을 넘겨주고 얻은 채무나 36년간 수탈의 대가인 몇 푼의 돈에 달려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보고 평화선을 영속적으로 사수하는 데 달려있음을 알고 민족의 생존을 위해 평화선을 사수할 것을 선언한다.”고 발표하고, 12시 10분 교문을 나서 시위에 들어갔다.
고대생들은 성토대회에서 선언문 외에도 궐기문을 발표했는데 주요내용은 다음과 같다.
“굴욕과 저자세로 일관된 치욕적인 한일문제 일괄타결이란 민족사활의 기로에서 민족적 양심과 역사적 소명에 자유·정의·진리의 기수가 되어 총궐기할 것. 호혜평등의 대원칙에 입각한 정당한 민족적 자세를 지닐 것과 120만 어민의 생명선을 사수하고 도이(島夷)후예의 오족(汚足)에 성스러운 영토 한 치라도 용인할 수 없다. 일본의 신제국주의 침략근성을 분쇄하고 치욕적인 제2의 을사조약 가조인의 무효를 선언하라.”
이어 학생들은 스크럼을 짜고 교가를 부르며 안암동 로터리로 나와 12시 25분쯤 경찰이 공세로 나와 학생들을 강제연행하자 투석전이 벌어졌는데 구경하던 시민 일부도 시위대에 합세, 돌을 던졌다.
이 충돌로 고광철(상과 1년), 김정부(법2) 등 17명(민간인 1명 포함)이 경찰에 연행되고 시위대는 잠시 정문 앞까지 후퇴, 교문 안으로 들어갔다.
경찰곤봉에 머리를 맞은 심재범(21. 토목과 2년)은 머리가 6센티가량 찢어지는 중상을 입었다. 일단 교정에 들어가 재집결한 학생들은 낮 1시 35분 “4·19정신은 살아있다”는 플래카드를 앞세우고 스크럼을 짜고 3·1절 노래를 부르며 다시 안암동 로터리 쪽으로 향해 나왔는데 이때 학생 수는 약 2,000여 명이었다. 1시 45분쯤 안암동 로터리 2백 미터 못 미쳐서 경찰기동대 약 100여 명과 충돌하여 총학생회장 유유길 등 20여 명이 경찰에 연행되었다. 1시 50분쯤 잠시 경찰과 대치하던 학생들은 일제히 경찰에 투석, 경찰은 마침내 최루탄 10여 발을 쏘아 반격을 가하자 학생들은 다시 교정으로 후퇴했다.『동아일보』 1965.4.13 석7면, 『고대신문』 1965.4.17 3면. 고대신문에 따르면, 13일 고려대 데모에는 2,000여 명이 참가하였으며, 이중 400여 명은 국회의사당 앞에서 집결하였으나 전원 연행되었다. 이날 데모에서 유유길 총학생회장과 문학진(化4) 구속, 278명은 즉결심판 회부 또는 훈방되었다.
▶연세대의 경우 낮 12시 50분쯤 1,200여 명의 학생들이 교내 대강당에서 ‘평화선 사수 연세대 투위 발기대회’와 ‘한일회담반대성토대회’를 마치고 “매국외교 피로써 막아내자”, “데모가 불법이냐 폭정이 불법이다” 등 플래카드를 들고 스크럼을 짜고 시위에 나섰다.
시위대가 1시 15분쯤 이대입구에 이르자 최루탄과 곤봉으로 무장하고 대기 중이던 약 500여 명의 경찰과 충돌하고, 곤봉세례를 받고 일단 흩어졌는데 그중 이훈구(법2) 등 20여 명이 연행되었으며, 3명이 경찰봉에 맞아 중상, 호송차로 연행되었다.
이날 이대입구에서 학생들의 시위를 막던 연대 학생처장 김대준 씨도 경찰곤봉에 맞고 발에 차여 상처를 입었는데 중상자는 한진국(법2), 이헌구(법2), 유경열(정외1) 등이다. 유경열은 이대 입구에서 경찰봉에 맞아 실신하였는데, 구경을 하던 인근주민들이 부근 병원에서 응급처치를 한 후 세브란스 병원으로 옮겼다. 시민들은 시위학생들에게 박수를 보냈다.『동아일보』 1965.4.13 석7면, 『연세춘추』 1965.4.19 1면, 연세춘추의 보도에 의하면, 연세대 정법대학 학생들이 주도한 13일 데모에는 1,500여 명의 학생들이 참가하였으며, 연행된 학생은 59명이고 이 중 구속은 3명, 8명은 불구속입건, 48명은 즉심에 회부되었다. 한편 경찰 곤봉에 맞아 실신한 학생은 김재곤(화공1)이다.
▶경희대의 경우 13일 오전 10시 55분쯤 학교 안 ‘문화세계의 창조탑’ 앞에서 900여 명의 학생들이 한일회담반대성토대회를 열고 11시 15분쯤 교문을 박차고 나섰으나 홍릉임업시험장 앞길에서 200여 명의 기동경찰대와 대치, 옥신각신하다 경찰저지선을 뚫고 홍릉 버스 종점까지 나아갔다.
이 지점에 이르러 더 나아가지 못하고 정비된 경찰기동대에 몰려 낮 12시 15분쯤에는 대부분의 학생들이 학교와 홍릉 산 쪽으로 쫓겨 갔고 50여 명의 학생은 경찰에 연행되었다.
▶동국대는 13일 오후 1시쯤 800여 명이 동교 교정에서 대일굴욕외교반대성토대회를 열고 낮 1시 40분쯤 교문을 부수고 거리로 나왔는데 이들은 충무로 4가에서 경찰의 제지를 받아 퇴계로~쌍림동으로 빠져 중심부로 나오자 숨어있던 경관 100여 명이 곤봉으로 마구 때려 박송남(경4) 등 10여 명은 이마가 깨져 길에 쓰러지고 70여 명은 경찰에 연행됐다.『동아일보』 1965.4.13 석7면, 『동대신문』 1965.4.16 1면. 동대신문에 따르면, 13일 데모에 참가한 동국대 학생은 1,000여 명이며, ‘동국대학교 평화선사수 투쟁위원회’ 이름으로 “오늘 또다시 조국수호의 대오를 정비하여 민족의 염원과 역사적 사명에 부응한다”라는 요지의 선언문을 발표하였다. 또한 “반민족적 가조인을 전면적으로 거부, 무효임을 선언한다”는 등의 7개 항목의 결의문도 발표하였다.
▶성균관대에서는 13일 낮 2시쯤 성대 학생위 주최로 동교 문리대 교정에서 500여 명이 모인 가운데 한일회담반대성토대회를 열고 “순결무구한 사고와 행위가 승리와 영광으로 될 때까지 우리는 피와 땀을 역사의 제단에 바친다”는 선언문을 채택하고 시위에 돌입했다.
▶국학대 학생 400여 명은 13일 낮 11시 2층 강의실에서 한일회담반대 성토대회를 열고 “36년간 흘린 백의민족의 고귀한 피의 대가를 제2의 을사보호조약으로 갚으려 하는가” 등 4개 항목의 결의문을 채택한 후 해산했다.
▶숭실대 학생 600여 명도 11시 45분 영등포구 상도동 숭실대 강당에서 한일회담반대성토대회를 열고 구속학생을 석방할 것과 한일회담 중단을 요구하는 결의문을 채택했다.『동아일보』 1965.4.13 석7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