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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개 대학생들과 4개 고교생 1만여 명 매국외교에 반대하며 시위행진

21일, 한일협정 정식조인을 하루 앞두고 서울대, 고려대, 연세대, 경희대 등 대학생들은 성토대회가두시위를 벌였다.
서울대의 각 단과대학은 이날 예년보다 빨리 여름방학을 앞당긴 학교 당국의 조처를 규탄하면서 성토와 데모를 벌였다. 고려대, 연세대, 경희대, 중앙대, 숭실대 등도 각각 “한일회담 즉시중지”를 외치며 끈질기게 시위를 시도했으나, 경찰은 대규모의 기동대를 동원, 곳곳에서 최루탄을 쏴가며 강력히 막았기 때문에 시위는 캠퍼스를 멀리 벗어나지 못한 채 좌절되고 많은 학생들이 연행되었다.
각 대학별 상황은 다음과 같다.
▶서울사대=21일 오전 9시 45분, 약 150명의 학생이 교정에서 학생총회를 열고 “대학 휴교 즉시철회” 등 5개항의 결의문을 채택하고 관철이 안 될 경우 총학장을 불신임하기로 결의했다.
▶서울공대=21일 오전 10시 20분, 800여 명의 학생이 교정에 모여 “정부는 비민주적인 한일회담을 즉각 중지하고 일본의 도덕적 반성 위에 선 평등 호혜원칙 위에 재출발하라”, “정부는 대학을 봉쇄하는 처사를 즉시 철회하라”는 등 5개항의 결의문을 채택한 뒤, 교문을 출발하여 시위에 들어갔다가 육사 앞에서 경찰의 최루탄 발사로 저지되고 20여 명이 연행되었다.
▶서울문리대=21일 오전 10시 55분, 150여 명의 학생들이 4·19기념탑 앞에서 ‘한일회담반대최종대회’를 열고 “즉각 철회 한일회담”이라는 플래카드를 앞세우고, 11시경 교문을 출발하여 시위에 나섰다가 서울대 미대 앞에서 100여 명의 경찰기동대에 저지당하고, 홍영세(지질과 1년) 등 13명이 연행되고 나머지 학생들은 일단 흩어졌다.
▶서울법대=21일 낮 12시 현재 158명이 졸도, 단식 8일째에 접어든 서울법대생들은 지친 몸으로 누워서 “학교당국의 조기방학 조처가 정부의 압력에 의한 것”이라고 분개하고 있다.
▶서울치대=21일 오전 10시 반, 약 100명의 학생들이 동교 강당에서 한일회담반대 성토대회를 벌인 뒤 학교당국의 만류로 일단 해산했는데 일부학생들은 법대 쪽으로 갔다.
고려대=21일 오전 11시, 약 1,000명의 학생들이 교양학부 교실 앞에서 한일회담반대 성토대회를 연 뒤 시위에 돌입,6월 21일 고려대 데모에 참가한 학생수에 대해 동아일보는 약 400명, 고대신문은 800여 명으로 보도, 한편 고대신문은 시위 주체에 대해 구분하여 보도하고 있는데, 오전 11시 시위의 주체는 ‘교양학부생’으로, 12시 20분 집회 및 시위 주체는 ‘천200여명의 학생’이라고 보도.(『동아일보』 1965.6.23 석3면, 『고대신문』 1965.6.26 3면) 신설동 로터리까지 나갔으나 약 300명의 경찰기동대와 충돌, 경찰의 최루탄 발사로 학교로 물러갔다. 이들은 이날 낮 12시 40분경 교내에 있던 학생들과 합세, 약 800명이 교문을 나서 다시 안암동 로터리까지 나갔다가 다시 교문에서 경찰과 대치했다. 한편 이날 고대생들의 시위를 구경하던 경영대학원 이인규(29) 등 3명이 경찰봉에 맞아 중상, 인근 병원에 입원했다.
한편, 고려대 성토대회 때 “데모하자”는 파와 “공부하자”는 파로 나뉘어 학생들은 한동안 옥신각신했다. 이때 한 학생이 “일본 학생이 10시간이면 우리는 20시간 공부해야 한다. 이 자리엔 데모하고 싶은 사람은 몇 안 된다. 있거든 일어서라”고 호통, 이에 “집어치워라”는 야유와 함께 전 학생이 모두 일어서자 그 학생은 어물어물 꽁무니를 뺐다.
▶연세대=21일 낮 12시 50분경 약 2,300명이 대강당에서 한일회담반대 성토대회를 열고 “우리는 정부의 일방적이고 굴욕적인 한일회담을 전면 거부한다는 등 3개항의 결의문을 채택한 뒤, “누구 위한 조인이냐? 3천만은 통곡한다”는 등의 구호를 외치며, “한일회담 분쇄하여 팔려가는 조국 찾자”는 등 플래카드를 들고 교문을 출발하여 시위에 나서 1시 15분경 이대 입구까지 진출했으나, 대기 중이던 약 400명의 경찰기동대와 충돌, 경찰이 약 25발의 최루탄을 쏘는 바람에 흩어졌다. 이 시위로 김두환(경제과 2년) 등 20여 명이 경찰에 연행되었으며 연세대 부근에서는 한때 투석전이 벌어졌다.6월 21일 연세대 데모에 대해 연세춘추는 참가 학생은 3,000여 명, 연행된 학생은 66명으로 보도하고 있다. 한편 이날 데모에는 연세대 의대 학생 200여 명도 흰가운을 입고 참여하였다.(『연세춘추』 1965.6.28 1면)
▶서울대 농대=21일 오전 하기방학 휴교령이 내린 서울대학교 농과대학 남녀학생 약 800명은 동교 강당에 모여 국민의 여론을 무시한 한일조인과, 정치바람에 대학의 존엄성을 잃고 내려진 휴교령을 성토했다.
▶중앙대=21일 낮 12시 반 약 500명의 학생들이 교정에서 한일회담반대성토대회를 연 뒤 24시간 단식투쟁에 들어가기로 결의했으나, 1시경 동 결의를 철회, “매국 을사조인 즉시 철회하라”는 등 플래카드를 들고 시위에 들어갔다. 이들 학생들은 교문 앞 200미터 지점에서 대기 중이던 경찰기동대와 대치, 한동안 옥신각신하다가 일단 흩어지고 김문덕(국문과 4년) 등 10명이 연행되었다.
▶숭실대=21일 낮 1시경 약 400명이 시위에 돌입, 노량진 역 앞까지 나왔다가 경찰 저지로 흩어지고 일부 학생이 경찰에 연행되었다.
▶동국대=21일 오전 11시 반, 약 500명의 학생들이 교정에서 한일회담반대성토대회를 연 다음 시위에 나서려 했으나, 학교 측의 만류로 12시경 해산했다.
▶외국어대=21일 한국외국어대학교에서는 대의원회와 외교학회가 이제까지의 산발적이고 다수학생의 호응을 받지 못하는 시위를 넘어 거교적 호응을 받는 단체시위를 결의하고, 이를 총학생회에 통고한 후 정식 수락을 얻어 간부급 학생들이 앞장서 데모를 벌였다. 오전 11시경부터 700여 명의 학생들이 모여 성토대회를 가진 후에 교문을 통과, 100여 명의 경찰과 대치하여 투석전을 벌였다. 이 과정에서 학생회장 신용철을 비롯하여 57명의 학생들이 경찰에 연행되었다.『외대학보』 1965.6.25 1면. 6월 21일 외국어대 데모에 참가한 학생 규모에 대해 동아일보는 300여 명으로 보도.(『동아일보』 1965.6.21 석3면)
▶경희대=21일 오전 11시 반경 약 1,200명의 학생들이 교정에서 한일회담반대성토대회를 연 뒤 그중 400여 명이 시위에 나섰다가 회기동 입구에서 경찰기동대의 저지를 받아 일단 흩어지고 19명이 경찰에 연행되었다.『동아일보』 1965.6.21 석3면
▶건국대=21일 건대생 약 400명은 하오 2시 50분 교문을 나와 한일회담 반대 시위에 들어갔다. 이들은 하오 3시에 한양대학교 문 앞에 까지 진출, 출동한 경찰기동대와 충돌했다.
▶성균관대=21일 하오 성대 정외과 학생 50여 명은 한일회담 반대 단식투쟁에 들어갔다. 이들은 동교 2205강의실에 누워 “한일회담을 즉각 중지하라”고 요구하면서 농성했다.
▶숭실고=21일 낮 1시 반경 약 650명의 숭실고 학생들이 교문을 나서 한일회담 반대데모에 돌입, 남산 육교 밑에까지 나갔으나 경찰기동대에 의해 흩어지고 이학근(3년) 등 97명이 경찰에 연행됐다.
▶대광고=21일 오전 11시 대광고 학생 약 300명이 교정에 모여 한일회담 반대성토대회를 벌인 뒤 잠긴 교문을 뛰어넘어 시위에 나섰다가 신설동 로터리에서 100여 명의 경찰기동대와 한동안 대치, 경찰이 최루탄을 쏘는 바람에 일단 학교로 물러났다.
▶양정고=21일 하오 2시 40분쯤 양정고교생 약 300명도 교문을 박차고 시위에 들어갔다. 이들은 하오 3시 서대문에서 경찰과 충돌, 서울역으로 향했다.『동아일보』 1965.6.23 석3면, 『경향신문』 1965.6.21 석7면, 『외대학보』 1965.6.25 1면, 『고대신문』 1965.6.26 3면, 『연세춘추』 1965.6.28 1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