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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개 대학 5,000여 명 데모

고려대=29일 오전 9시, 1학기말 시험을 보려고 학교에 등교했던 고려대생들은 동교 대강당에 모여 시험을 보이콧하고, 오전 10시 35분경 성토대회를 끝낸 4,000여 명은 ‘한일협정비준 결사반대’, ‘Yankee Keep Silent’학생들은 미국이 한일조약 체결을 추진한 이유를 ① 큰 위기(국제수지 역조로 인한 달러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 적은 이익(한국 시장)을 희생시키지 않을 수 없다는 점, ② 장래 한국시장에 진출할 일본 대기업이 그 이윤을 미국에 분배한다는 점, ③ 일본을 주축으로 하는 대공방위체제를 형성시켜야 한다는 점으로 보고, 이러한 인식을 바탕으로 “미국은 한일회담에 간섭하지 말라”, “Yankee Keep Silent” 등의 구호와 ‘Made in USA 최루탄 화형식’, 개사곡 등으로 미국의 한일문제 개입을 비판했다.(오오타 오사무, 「한국에서의 한일조약 반대운동의 논리」, 『역사연구』9, 2001, 194쪽) 그런데 당시 학생들의 미국 정책에 대한 비판을 ‘반미’로 보기는 어렵다. 한일협정반대투쟁이 종료된 후인 1966년 서울대생 7,000여 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학생들 가운데 45.3%가 미국에 대해 좋은 인상을 가지고 있었다. 한일협정반대투쟁을 통해 고조된 미국에 대한 비판의식이 한국사회 전체가 가지고 있던 미국에 대한 우호적인 분위기를 넘어서지 못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미국을 우호적으로 보는 학생이 절반이 채 되지 못한다는 사실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즉 당시 반외세의 대상에서 미국 역시 자유롭지 않았던 것이다.(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한국민주화운동사 1』, 돌베개, 2008, 473~474쪽), ‘근조 민족적 민주주의’ 등의 플래카드를 앞세우고 “쪽발이 싫소, 짚신 족하오” 등 구호를 외치며 시위에 돌입했다. 학생들이 강당에서 성토대회를 열고 있는 동안 학교 당국은 긴급 교수회의를 열고 방학을 결정했다.
학생들은 11시경 숭인동 로터리까지 나갔으나, 대기 중이던 700여 명의 기동경찰과 충돌하여 경찰이 수십 발의 최루탄을 쏘고 경찰봉을 휘두르자, 투석으로 대항하며 한동안 승강이를 벌이다 11시 10분경 일단 흩어졌다.
분산된 학생 중 50여 명은 낮 1시경 다시 명동에 있는 국립극장 앞에 집결해 한동안 연좌데모를 벌였는데, 뒤따라 온 학생들이 합세하여 300여 명으로 늘어난 학생들은 한때 명동 일대와 경향신문, 조선호텔 앞 등을 3·1절 노래, 교가, 애국가 등을 부르며 행진하다 낮 1시 40분경 반도호텔 앞에서 경찰의 강력한 저지를 받자 만세를 부르며 뿔뿔이 골목으로 흩어졌다.
이날 경찰은 도망가는 학생들과 일반 시민들까지 경찰봉으로 때려 연행했으며, 한때 학생들을 숭인동 로터리와 신설동 로터리 사이에 몰아넣고 포위공격, 경찰봉으로 마구 때리기도 했다. 또한 데모학생을 연행하기 위해 지나가던 시내버스를 세우고 버스 안에 타고 있던 대학생들까지 연행했는데, 연행자 수는 권태열(행정과 4년) 등 60여 명(민간인 수 명 포함)이다.
낮 2시 30분경 50여 명은 파고다공원 안에 있는 3·1독립선언기념탑에 참배구호를 외치다 흩어졌다.『동아일보』 1965.6.29 석7면, 『경향신문』 1965.6.29 석3면, 『고대신문』 1965.8.7 7면, 6·3동지회, 『6·3학생운동사』, 역사비평사, 2001, 193~194쪽. 경향신문에는 성토대회 참가학생 2,000여 명, 시위참가학생 3,500여 명으로 보도
▶명지대=29일 10시 30분부터 명지대 학생 500여 명『동아일보』 1965.6.29 석7면, 『경향신문』 1965.6.29 석3면. 경향신문에는 성토대회 참가학생 300여 명으로 보도은 교정에서 비준반대성토대회를 열고, 11시 20분경 300여 명의 학생들이 “국민의사를 받아들여 매국조인 백지화하라”는 플래카드를 앞세우고 남대문 로터리를 거쳐 중앙산업 앞까지 왔으나, 출동한 기동대에 의해 오전 11시 45분경 일단 해산했다.
▶동덕여대=29일 오전 11시부터 400여 명의 동덕여대 학생들은 동교 3강의실에 모여 한일협정비준반대 성토대회를 마친 다음, “유관순은 살아있다”는 구호를 외치며 데모에 나서려다 학교 측이 교문을 잠그자 교문을 열 때까지 철야농성을 결의하고 교문 앞에서 연좌데모를 벌였다.
▶국학대=29일 오전 11시, 국학대 학생 200여 명이 교정에 모여 한일협정반대 성토대회를 열었다.
▶수도공대=29일 오전 10시 30분경 수도공대학생 150여 명은 한일협정비준반대 성토대회를 가진 후 시위를 벌였으나 마포경찰서 앞에서 저지됐다. 이날 4명의 학생이 경찰에 연행되었다.『동아일보』 1965.6.29 석7면, 『경향신문』 1965.6.29 석3면, 6·3동지회, 『6·3학생운동사』, 역사비평사, 2001, 193~194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