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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대학에서 계속 단식 및 성토대회

30일 오전, 문교부에 보고된 바에 의하면 서울에서는 연세대, 건국대, 동덕여대, 경기공전, 감리교 신학대 등 5개교가 지방은 대전대, 충남대, 대전초대 등 3개교 600여 명이 단식농성을 벌였다.
홍익대=30일 오전 10시부터 홍익대생 200여 명은 동교 교정에 모여 30분 동안 한일협정비준반대 성토대회를 갖고 “재일문화재 3분의 2는 어디로 갔나, 정부는 국민에게 밝혀라”는 등 3개 항목의 결의안을 채택했다.
연세대=30일 낮, 일제상품 보이콧을 외치며 단식에 들어간 연세대생 236명(의대생 221명)이 단식을 계속했다. 이날 오전 8시경 종교인 함석헌 씨가 단식학생들을 방문, “혼의 힘으로 하는 비폭력적인 단식투쟁은 이기기 마련이다. 때가 되면 나도 단식에 동조하겠다”고 밝히고, 약 30분간 학생들을 위로하는 연설을 했다.
단식학생들은 7월 1일 정오에 단식을 일단 끝내고 의대 현관 앞에서 학생들과 교수들이 수집한 일제물건을 불태우는 한편, 학생들이 가두에 나서서 일제상품 불매 동맹 백만인 서명운동을 벌이기로 했다.
건국대=30일, 단식 3 째인 건국대 축산대학생 260여 명은 동교 축산대학 기숙사에서 모든 일본 상품을 보이콧하기로 결의했다. 이들은 지난 28일 한일협정비준반대와 전 국민들의 각성을 촉구하면서 무기한 단식에 들어갔었다.
한편 이들 단식학생들은 30일 오전 단식으로 절약된 식사대 6,320원을 농촌에 보낼 양수기 구입기금에 보태달라고 동아일보사에 가져왔다.
서울여대=30일 오전 8시, 서울여대생 500여 명은 강당에 모여 성토대회를 열고 “한일협정비준을 국민투표에 붙이라”는 등 결의문을 채택한 뒤 단식을 결의했다. 학생들은 강당에서 단식농성을 하다 오후 1시에 해산했다. 학교 측은 이날 긴급 교무회의를 열고 이날부터 방학에 들어가기로 결정했다.
동덕여대=30일, 한일조약비준을 반대하고 29일 오후 2시 30분부터 단식에 들어갔던 동덕여대생 80여 명은 동교 제3강의실에서 단식을 계속했다.
▶명지대=30일, 한일협정반대를 내걸고 29일 오전 11시부터 48시간 단식에 돌입했던 명지대생 10여 명은 동교 132강의실에서 단식을 계속했다.『동아일보』 1965.6.30 석3면, 『경향신문』 1965.6.30 석7면. 경향신문 보도에 의하면 30일 오전 현재 단식농성 학생수는 연세대 212명, 동덕여대 90명, 건국대 210명, 경기공전 20명, 감리대 10명, 대전대 26명, 충남대 6명, 대전초대 15명 등이다.
▶대구 청구공전=30일 오후, 대구 청구공전 학생 약 300명은 학교 교정에서 한일협정조인반대를 외치고 시위를 하려다 경찰의 제지로 학생 5명이 연행된 데 대해 “연행된 학생을 석방하라”고 요구하면서 연좌데모를 했다.『경향신문』 1965.7.1 석3면
▶가톨릭의대=30일 오후 6시부터 가톨릭의대생 130여 명은 한일협정비준 저지를 목표로 동교 제3강의실에서 무기한 단식에 들어갔다. 단식에 들어가기에 앞서 학생들은 한일협정비준반대 성토대회를 열고 “조인된 한일협정은 일체 무효로 돌리고 민족의 주체성을 확립한 후 새로운 자세로 협상을 재개하라”는 선언문을 채택했다.『동아일보』 1965.7.1 석7면, 『경향신문』 1965.7.1 석3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