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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준무효화 학생시위 전국으로 확대 박정희 정권 타도 구호 다시 나타나

23일, 개학과 더불어 일기 시작한 한일협정비준을 규탄하는 대학가의 시위열풍은 당국의 강력한 저지에도 불구하고 일부 지방의 대학과 고교생에게까지 파급, 전국적으로 번졌다. 이날 오전 서울 시내 연세대, 외국어대, 동국대, 경희대, 한양대, 중앙대, 숭실대 및 지방의 전북대, 제주대, 충남대오산고교생 등 1만여 명의 학생들은 거리로 뛰쳐나와 “한일협정비준 무효화하라”, “일당국회 해산하고 총선거 실시하라”는 등 구호를 외치며 시위를 벌여 곳곳에서 경찰과 충돌했다. 경찰은 이날 최루탄을 쏘고 경찰봉을 휘두르며 강력히 저지했고, 일부 학생들은 투석으로 대항했는데, 이로 인해 쌍방 간에 수명의 부상자를 내고 100여 명의 학생들이 연행되었다. 한편 이날 건국대, 명지대, 전남대생 1,000여 명도 성토대회를 열었다.
연세대=23일 오전 10시 40분경 연세대생 2,000여 명은 교정에서 성토대회를 연 뒤 “한일협정비준을 무효화하라”는 등 플래카드를 들고 “나라 팔고 축배 드는 매국정권 물러가라”며 1964년 6·3항쟁 이후 사라진 박정희 정권 타도를 외치며 시위,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한국민주화운동사 1』, 돌베개, 2008, 461쪽 아현동 로터리에서 경찰이 4발의 최루탄을 쏘며 저지하자 낮 12시 10분경 해산되었고, 34명의 학생과 3명의 민간인이 연행됐다.
이날 데모로 쌍방 간에 수명의 부상자를 냈으며, 낮 12시 15분경 방독면에 집총한 무장군인 400여 명이 20여 대의 지프와 트럭에 분승, 서대문 로터리와 신촌 로터리 일대를 돌며 시위하기도 했다.
▶중앙대=23일 오전 10시경 중앙대생 2,000여 명이 시위에 돌입하여, 남한강파출소 앞까지 나갔다가 경찰과 충돌하였다. 경찰이 10여 발의 최루탄을 쏘자 학생들은 투석으로 맞서다 낮 1시경 해산했다. 이 과정에서 64명의 학행이 연행되었다.
▶한양대=23일 오전 11시 15분경 한양대생 2,000여 명이 시위를 벌였다. 학생들은 성동서 앞에서 최루탄을 쏘며 경찰봉을 휘두르는 경찰과 투석으로 응전하다 16명의 학생이 연행되고 일단 학교로 후퇴했다.
▶동국대=23일 오전 10시 20분경 동국대생 2,000여 명이 교정에서 성토대회를 연 뒤 시위에 돌입했다. 학생들은 을지로 4가 앞까지 나갔다가 200여 명의 경찰이 최루탄 20여 발을 쏘며 양면에서 협공자자 일단 해산했다. 이 과정에서 70여 명의 학생과 20명의 민간인, 3명의 고교생이 연행되었고, 10여 명이 부상당했다.
▶전남대=23일, 전남대생 1,000여 명은 “한일협정 체결의 주범은 바로 미국이다”, “우리들은 월남의 사태에 양키들의 총알 방패가 될 수 없다”고 외치며 시위를 벌였다.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한국민주화운동사 1』, 돌베개, 2008, 462쪽. 같은 책에 의하면 바로 이러한 학생들의 구호가 반국가적 반미적 내용을 담고 북한의 주장을 대변하고 있으므로 내란죄와 반공법을 적용하여 시위학생들을 구속시키겠다는 24일 치안국장 담화의 구실이 되었다.
▶이 밖에도 23일 오전에 외국어대생 500여 명, 숭실대생 500여 명, 경희대생 600여 명, 서울대 사범대생 40여 명, 전북대생 1,000여 명, 제주대생 100여 명, 오산중고교생 300여 명도 각각 캠퍼스를 벗어나 시위를 벌이다 곳곳에서 경찰과 충돌했다.『동아일보』 1965.8.23 석3면, 『경향신문』 1965.8.23 석7면, 『전남매일신문』 1965.8.24 3면, 『동대신문』 1965.8.27 1면, 『연세춘추』 1965.9.6 1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