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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문의 죽음 31년째, 중앙대 총학생회장 이내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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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문의 죽음

1989년 8월 15일 오후 6시 30분경 거문도에서 한 남성의 시신이 떠올랐다. 수심이 얕아 가족 단위의 관광객이 자주 찾던 유림해수욕장 바닷가 부근에서 인근 주민에 의해 발견된 것이다. 그는 중앙대학교 총학생회장이던 27세 이내창이었다.

이내창은 1962년에 태어나 85년에 군을 제대한 후 86년에 중앙대학교 조소학과에 입학한 늦깍이 대학생이었다. 88년에 조소학과 학생회장을 맡고, ‘민족미술연구회’ 학과 동아리를 창립하여 ‘청년미술대학 여름한마당’을 개최하는 등 민족미술운동에 관심이 많았다. 그리고 89년 중앙대학교 안성 교정 총학생회장을 맡아 반독재민주화운동과 통일운동에 앞장섰다. 

죽음을 둘러싼 의혹

이내창 사망 사건은 89년 8월 16일자 한겨레신문에 "중대 안산캠퍼스 학생회장 해수욕장서 주검으로 발견" 되었다고 보도되면서 세상에 알려졌다. 다음날 "변사 중대생 남녀 동행자 2명 있다"는 내용의 배를 태워준 선장의 제보가 있어 경찰이 소재 파악에 나섰다는 보도가 잇따랐다.

8월 19일 이내창의 사체 부검이 이루어졌다. 사체를 부검한 국립과학수사연구소 서재관 박사는 “수압으로 인한 고막 파열로 생기는 추체골 출혈이 있는 것으로 봐 익사로 추정된다"고 밝혔다. 학생과 교수, 유족 등의 추천으로 부검에 참여한 서울대 의대 이정빈 박사도 '익사'로 추정했다. 경찰의 수사도 별 진전이 없어 실족 사건 또는 자살 사건인 것으로 결론지으려 했다.

이에 중앙대생들로 구성된 ‘사인진상규명 공동대책위원회’(공대위)는 8월 22일 기자회견을 통해 그의 죽음에 수사기관이 관련되어 있을 가능성이 높으므로, 검찰과 경찰은 이번 사건의 명확한 증거와 내용을 조속히 발표할 것을 촉구했다. 


"본 공동대책위에서는 이번 사건의 모든 정황과 현지 조사결과에 의해 단순익사(즉 자살 혹은 실족사)가 아닌 타살임이 명백하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1. 실족사 혹은 자살 익사일 경우 하의는 그대로인채 상의가 완전히 탈의되고 신발은 그대로 신고 있었다는 점이다.

2. 당시의 현장 상황 조수 간만의 차, 지형의 문제로 결코 실족사 혹은 자살할 시간도 맞지 않는다.(중략)

3. 거문도 소재 거문리에 있는 상호 다방에서 남녀 한쌍과 고 이내창 총학생회장이 만났다는 점.(중략)

이에 공대위에서는 앞으로도 고 이내창 총학생회장의 타살 근거를 계속적으로 수집, 발표할 것이며 검찰과 경찰에 이번 사건의 명확한 증거와 내용을 조속히 발표할 것을 강력하게 촉구한다."

국립과학수사연구소는 1차부검을 한 후 이씨의 장기 등을 채취하여 정밀조직검사를 마치고 9월 1일 최종부검결과를 경찰에 통보했다. 그러나 경찰은 공대위쪽의 거듭된 요청에도 부검결과를 유족과 학생대표 등에 공식적으로 통보하지 않았다.
치안본부가 국정감사 자료로 9월 29일 국회에 제출한 최종부검 감정서를 1차 부검에 참여했던 중앙대 의대 장임원 교수, 서울대 의대 이정빈 교수 등이 정밀 검토했다. 장 교수는 “이씨의 사체 7군데에서 발견된 ‘피하출혈’은 이씨가 사망 전에 외상을 입었다는 것을 뜻한다”고 말했다. 또 다른 의혹이 제기되었다. 이내창이 사망하기 직전에 마지막으로 동행한 남녀 두 사람 중 여성이 안기부에 근무하고 있다고 밝혀지면서 안기부에 의한 타살 의혹이 확신으로 흘러갔다.

죽음 그 이후

이내창 열사 장례는 1989년 10월 6일 서울 중앙대 대운동장에서 전대협장으로 치러졌고, 7일 광주 망월동묘역에 안장됐다. 그리고 2014년 8월 15일 경기도 이천시에 있는 민주화운동기념공원으로 이장했다. 

1980년대 대표적인 학생 의문사 사건으로 꼽히는 ‘이내창 사망 사건’과 관련하여 2004년 제2기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는 "민주화운동을 한 사실이 인정되지만 위법한 공권력의 직,간접적인 행사에 의한 것인지 명백히 밝힐 수 없다"고 설명하며 진실 규명 불능 결정을 내렸다고 밝혔다. 그러나 2009년 7월 6일 제 276차 ‘민주화운동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심의위원회’로부터 민주화운동 관련성을 인정받았다. 

이내창이 사망한지 31년이 지났다. 그러나 아직까지 그의 죽음은 정확한 사망 경위와 원인을 알 수 없는 '의문사'로 남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