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료콘텐츠
민주화운동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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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술기록으로 보는 2·28민주의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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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정된 대통령 부정선거, 5개월 앞당겨 치룬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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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학생열사, 박현민을 기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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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술기록으로 보는 강원지역 4월혁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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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 3월 15일 정·부통령선거는 이전부터 대대적이고 노골적인 선거부정이 행해지고 있었다. 자유당이 뿌리는 고무신을 받지 못하거나 막걸리를 얻어먹지 못한 사람은 바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뇌물과 금품이 뿌려졌다. 선거에 익숙하지 않고 글을 모르는 노인 등을 대상으로 3인조 또는 5인조 공개투표가 준비되었으며, 선거일 이전부터 민주당 추천 선거위원과 참관인들에 대한 납치와 폭행, 매수가 자행되었다. 각 선거구마다 30~40%씩 이미 이승만, 이기붕을 뽑은 표가 확보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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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술기록으로 보는 충북지역 4월혁명 - 청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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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시 고등학생 연합시위 계획과 4월 16일 청주공업고등학교 시위
1960년 2월 28일 대구 고등학생들의 시위와 3.15부정선거에 일어난 마산시위에 자극을 받은 청주 시내 고등학생들은 모임을 갖고 시위를 준비했다. 이 때 참가한 학교는 청주공업고등학고, 청주여자고등학교, 청주상업고등학교, 청주고등학교, 청주기계고등학교 등이었고, 학교별로 15~20명 정도의 학생 대표들이 모였다. 학생들은 4월 9일 장면 부통령 후보 연설 때 시위를 하려다 제지당하고, 10일과 12일 각 학교 대표끼리 시위 봉화를 시도하였으나 역시 제지당했다. 13일에는 각 학교 학생 10명이 모여 밤새 전단지를 만들었고, 다음날인 14일 각 학교에 가서 시위를 하려 했으나 사전발각되어 전단지를 다 뺏기고 시위를 하지 못했다.
4월 16일, 청주공업고등학교에서는 청주공고 학생들만이라도 시위를 하기로 결의하고 교문을 가로막는 선생님들을 뿌리치고 200~300명의 학생들이 청주역까지 시위를 이어갔다. 그러나 학생들은 곧 경찰에 의해 해산됐고, 경찰에 밀려가며 북문로 2가까지 200미터 정도 행진했으나 진압됐다. 경찰과 교사들은 학생들의 모자와 책가방을 빼앗아가며 시위를 저지했고, 경찰서에 연행된 30-40명의 학생들은 2시간 후 석방됐다. 청주공고 학생들의 시위 이후 청주시 곳곳에는 삼엄한 경비가 계속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