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료 콘텐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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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화운동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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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회참여적' 예술가의 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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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관찰하라, 판단하라, 실천하라 - 한국가톨릭노동청년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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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 노동자 한 사람은 온 세상의 금을 전부 합친 것보다 훨씬 귀합니다.
그들이 하느님의 아들, 딸들이기 때문입니다.”- 조셉 까르뎅 -가톨릭노동청년회(이하 JOC)는 1925년 인간의 존엄성과 노동의 소중함을 일깨우기 위하여 까르댕 추기경이 벨기에에서 창설한 청년노동자운동 단체다. 한국에서는 1958년 초 서울대학병원 간호사 박명자 등이 모임을 갖고 JOC 창립을 준비해갔다. 1958년 11월 16일 까르댕 신부가 한국을 방문해 명동성당에서 첫 투사선서식을 진행했다. 한국가톨릭노동청년회가 공식 발족한 날이다. JOC 조직은 성당을 통해 확대되어 갔으며, 각 공장에 직장팀이 결성되었다.
JOC는 인격의 변화를 통한 이웃과 노동 환경의 복음화, 이를 통한 삶의 질의 개혁이라는 나름대로의 목표의식을 갖도록, 노동과 신앙을 통합해서 성찰하는 교육을 꾀해갔다. 노동자들은 더 이상 쓸모없는 존재도, 밑바닥 존재도 아니었다. 노동자는 세상을 만들어가는 귀한 존재이며 사회를 정의롭게 변화시켜야 하는 사명을 지닌 존재다. 노동에 대한 의식의 전환은 구체적으로 작업현장에서 새로운 변화를 일으키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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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학순 주교의 양심선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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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인은 1974년 7월 23일 오전 형사 피고인으로 소위 비상군법회의에 출두하라는 소환장을 받았다. 그러나 본인은 양심과 하느님의 정의가 허용치 않음으로 소환에 불응한다. 본인은 분명히 말해두지만 본인에 대한 소위 비상군법회의의 어떠한 절차가 공포되더라도 그것은 본인이 스스로 출두한 것이 아니라 폭력으로 끌려간 것임을 미리 밝혀둔다.
소위 유신헌법이라는 것은 1972년 10월 27일에 민주 헌정을 배신적으로 파괴하고 국민의 의도와는 아무런 관계없이 폭력과 공갈로 국민투표라는 사기극에 의하여 조작된 것이기 때문에 무효이고 진리에 반대되는 것이다."(지학순 주교의 양심선언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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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해필림 복원
역사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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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리 없이 사라진 조직, 천주교정의구현 전국학생총연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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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5. 4. 11. 김상진의 할복 자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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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술기록으로 보는 충북지역 4월혁명 - 청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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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시 고등학생 연합시위 계획과 4월 16일 청주공업고등학교 시위
1960년 2월 28일 대구 고등학생들의 시위와 3.15부정선거에 일어난 마산시위에 자극을 받은 청주 시내 고등학생들은 모임을 갖고 시위를 준비했다. 이 때 참가한 학교는 청주공업고등학고, 청주여자고등학교, 청주상업고등학교, 청주고등학교, 청주기계고등학교 등이었고, 학교별로 15~20명 정도의 학생 대표들이 모였다. 학생들은 4월 9일 장면 부통령 후보 연설 때 시위를 하려다 제지당하고, 10일과 12일 각 학교 대표끼리 시위 봉화를 시도하였으나 역시 제지당했다. 13일에는 각 학교 학생 10명이 모여 밤새 전단지를 만들었고, 다음날인 14일 각 학교에 가서 시위를 하려 했으나 사전발각되어 전단지를 다 뺏기고 시위를 하지 못했다.
4월 16일, 청주공업고등학교에서는 청주공고 학생들만이라도 시위를 하기로 결의하고 교문을 가로막는 선생님들을 뿌리치고 200~300명의 학생들이 청주역까지 시위를 이어갔다. 그러나 학생들은 곧 경찰에 의해 해산됐고, 경찰에 밀려가며 북문로 2가까지 200미터 정도 행진했으나 진압됐다. 경찰과 교사들은 학생들의 모자와 책가방을 빼앗아가며 시위를 저지했고, 경찰서에 연행된 30-40명의 학생들은 2시간 후 석방됐다. 청주공고 학생들의 시위 이후 청주시 곳곳에는 삼엄한 경비가 계속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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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학생열사, 박현민을 기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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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술기록으로 보는 강원지역 4월혁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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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 3월 15일 정·부통령선거는 이전부터 대대적이고 노골적인 선거부정이 행해지고 있었다. 자유당이 뿌리는 고무신을 받지 못하거나 막걸리를 얻어먹지 못한 사람은 바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뇌물과 금품이 뿌려졌다. 선거에 익숙하지 않고 글을 모르는 노인 등을 대상으로 3인조 또는 5인조 공개투표가 준비되었으며, 선거일 이전부터 민주당 추천 선거위원과 참관인들에 대한 납치와 폭행, 매수가 자행되었다. 각 선거구마다 30~40%씩 이미 이승만, 이기붕을 뽑은 표가 확보되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