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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최초의 혁신 정치인 조봉암과 진보당
야당 당수에 가해진 최초의 사법살인
1959년 7월 31일 아침, 서대문형무소의 한 독방 앞에서 간수가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조봉암, 나오시오!”
이날 조봉암은 평소처럼 일찍 일어나 방 한가운데 정좌한 상태로 한문 고서를 읽고 있었다. 간수의 말에 조봉암은 동요하지 않고 나직이 중얼거렸다.
“올 것이 왔군.”
그는 천천히 일어나 간수를 따라갔다. 사형 집행장에는 교수대가 설치되어 있었고, 목사가 대기하고 있었다. 형이 집행되기 전, 사형 집행관이 물었다.
“유언을 남기시오.”
이에 조봉암은 담담히 말했다.
“이승만 박사는 소수가 잘살기 위한 정치를 했고 나와 나의 동지들은 국민 대다수를 고루 잘살게 하기 위한 민주주의 투쟁을 했소. 나에게 죄가 있다면 많은 사람들이 고루 잘 살 수 있는 정치운동을 한 것밖에는 없을 것이오. 나는 이 박사와 싸우다가 졌으니 승자로부터 패자가 이렇게 죽음을 당하는 것은 흔히 있을 수 있는 일이오. 다만 내 죽음이 헛되지 않고 이 나라의 민주 발전에 도움이 되기를 바랄 뿐이오. 나는 공산당도 아니고 간첩도 아니오. 그저 이승만과의 선거에서 져서 정치적 이유로 죽는 것이오. 나는 이렇게 사라지지만 앞으로 이런 비극은 없어야 할 것이오.”
“다른 할 말은?”
“술 한 잔과 담배가 필요하오.”
“그건 금지돼 있소.”
“알겠소. 목사님! 제가 교수대에 오르면 예수가 빌라도의 법정에 섰을 때의 그 성경 구절을 읽어 주시겠습니까?”
“네.”
조봉암은 곧바로 교수대를 향해 걸어갔다. 죽음을 앞두고도 한 치의 흔들림 없는 곧은 자세와 당당한 눈빛에서 기품과 위엄이 느껴졌다. 사형 집행관이 조봉암의 얼굴에 두건을 씌우고 올가미를 걸었다. 목사가 누가복음 23장을 읽었다.
“빌라도가 세 번째 말하되 이 사람이 무슨 악한 일을 하였느냐 나는 그 죽일 죄를 찾지 못하였나니 때려서 놓으리라 한대 저희가 큰 소리로 재촉하여 십자가에 못박기를 구하니 저희의 소리가 이긴지라.”
성경 낭송 이후 곧 사형이 집행되었다. 향년 61세, 회갑을 두 달 앞둔 진보당 당수인 죽산 조봉암의 파란만장한 일생은 그렇게 막을 내렸다. 명백한 조작사건이었지만 1심 재판부에서 유병진 판사는 간첩 혐의는 무죄,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는 유죄로 해서 5년 형을 선고한 바 있었다. 훗날 유 판사는 이 일을 빌미로 연말 재임용에서 탈락해 법복을 벗게 되었다.
1959년 7월 30일, 고법과 대법원은 1심 판결을 뒤엎고 간첩죄를 적용해 사형 선고를 했다. 변호사가 재심 청구를 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형무소 측은 재심 청구가 기각된 지 17시간 만인 31일 오전 11시에 전격적으로 사형을 집행했다. 사법제도의 근간을 훼손하는 반헌법적 처사로서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슬픔에 잠긴 유가족이 조봉암의 장례를 치르려 할 때, 한 떼의 경찰이 장례식장에 들이닥쳤다. 경찰서장은 명령조로 말했다.
“공개 장례를 금합니다. 내일 당장 매장하시오.”
“5일장을 하려고 합니다만…….”
“안 됩니다! 조문도 받지 말고 묘비도 세우지 마시오!”
경찰서장은 도끼눈을 뜨며 으름장을 놓았다. 일제강점기에 우리의 민족혼을 짓밟기 위해 들이대던 것이 바로 순국한 독립투사의 공개 장례 금지, 묘비 금지 조항이 담긴 조선총독부령 제120조였다. 해방 이후의 대한민국 경찰서장이 그 악명 높은 조항을 토씨 하나 바꾸지 않고 앵무새처럼 읊어대자 유족들은 할 말을 잃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경찰서장의 지시로 빈소로 향하는 길목마다 정복과 사복 경찰들이 촘촘하게 배치되었다. 그들은 조문객들의 출입을 물 샐 틈 없이 막아 버렸다. 불과 8개월여 뒤에 무너질 운명인 자유당 독재정권의 마지막 발악이었다.
공산주의자라서가 아니라 이승만의 최대 정적이라는 이유 때문에 사형을 당한 조봉암 사건은 대한민국 최초의 ‘사법살인’으로 기록되었다. 이승만 정권이 저지른 야만적인 법살(法殺)에 의해 조봉암과 진보당은 한국 정치사에서 강제로 파묻히고 말았다.
일제하 독립운동가에서 걸출한 야당 지도자로 우뚝 서다
조봉암은 1899년 경기도 강화에서 빈농의 아들로 태어났다. 스물한 살 때인 1919년 3.1운동에 가담하여 1년간 투옥된 뒤부터 항일독립투사가 되겠다는 결심을 했다. 일본으로 건너가 중앙대학 정치과에서 공부하던 조봉암은 무정부주의자 박열과 더불어 흑도회를 조직했다가 탈퇴한 뒤 상해, 만주, 러시아 등에 진출하여 볼셰비즘과 관련을 맺었다.
1923년 모스크바 동방노력자공산대학을 졸업한 조봉암은 국내에 들어와 조선공산당을 창당해 활동하다가 일경에 체포되었다. 신의주 형무소에서 7년 동안 복역할 때 혹독한 고문과 살을 에는 강추위로 동상에 걸려 손가락 일곱 마디를 잘라내야 하는 시련을 겪기도 했다.
해방 후 박헌영을 비판함함으로써 공산당에서 제명된 조봉암은 공산주의 이념 대신 민족적 민주사회주의 노선을 견지하게 되었다. 정치인으로서 뜻을 펼쳐나가던 조봉암은 1948년 제헌 국회의원에 당선되었고, 초대 내각의 농림부 장관에 취임했다. 1950년부터 1954년까지 두 번에 걸쳐 국회부의장을 지냈으며 제2대, 제3대 대통령 후보에 출마했다. 1956년 5월 15일 제3대 대통령 선거 결과 5백만 표를 얻은 이승만에 이어 조봉암이 216만 표를 얻음으로써 강력한 야당 지도자로 떠올랐다.
자유당의 관권, 금권을 동원한 부정선거로 얼룩진 대통령 선거 이후 외신은 “조봉암은 선거에서 이겼지만 개표에서는 졌다.”라고 표현했다. 이 선거에서 무려 30%의 지지율을 얻은 조봉암은 이때부터 이승만에게는 최대의 라이벌, 눈엣가시가 되었다.
조봉암은 제3대 대통령 선거에서 국민들이 보여준 지지율에 고무되어 진보당 창당에 들어갔다. 창당 활동을 벌이는 당원들에 대해 폭력배를 동원해 구타하는 등 자유당 정권의 방해 공작은 집요하고 치밀했다.
1956년 11월 10일 오전 10시 30분, 서울 시립극장에서 전국 대의원 대부분이 참가한 가운데 한국 최초의 사회민주주의 정당인 진보당 창당대회가 열렸다. 감격스럽고 장엄한 분위기 속에서 국민의례가 있은 뒤, 시인 박지수가 “피땀 흘리고 가신/인민의 대열과 목자의 영령에/알뜰히 다듬어 새긴 반만 년 배달의 성서를/땀으로 지키며 이어온 겨레의 횃불”로 시작되는 묵념시를 낭송했다. 뒤이어 조봉암 위원장이 연단에 올라 개회사 겸 창당사에 준하는 연설을 했다.
“우리들은 지금 이러한 새 이상과 새 사고방식의 기초 위에서 혁신적인 정치 활동을 하려는 대중의 전위로서 진보당을 조직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인류의 새 이상을 파악하고 이론적으로 뭉친 정당은 필연적으로 광범한 근로 대중을 사회적 기반으로 하는 피해 대중의 당이 되는 것이고, 또 그러한 대중의 정당이라야 비로소 이 나라 안에서의 역사적 과업을 수행할 수 있는 것으로 믿는 것입니다.”
창당사에서 밝힌 것처럼 피해 대중의 전위를 표방하는 진보당은 사회민주주의적인 색채가 강했고, 그 강령 가운데 하나가 바로 ‘평화통일론’이었다. 하지만, 당시 ‘북진통일론’을 부르짖고 있던 이승만과 자유당은 조봉암의 평화통일론에 경기를 일으켰다.
“조봉암을 가만두지 않겠어.”
이승만이 부하들 앞에서 벼르던 일은 현실로 나타났다. 진보당의 주요 간부들을 모조리 검거한 경찰은 1958년 1월 13일 조봉암을 구속시킨 뒤 1959년 간첩죄로 사형에 처했다.
33년이 지난 1992년, 여야 국회의원 86명이 조봉암의 사면복권을 요청하는 청원서를 국회에 제출하면서 그를 복권시키자는 움직임이 일어났고, 2007년 9월 18일 진실화해위는 진보당 조봉암의 처형 사건에 대해 “민간인에 대한 수사권이 없는 육군 특무대가 조봉암을 간첩 혐의로 수사에 나서 재판을 통해 처형에 이르게 한 것으로 인정되는 비인도적, 반인권적 인권유린이자 정치탄압 사건이다.”고 결론을 내렸다.
2011년 1월 20일, 대법원은 재심을 통해 조봉암의 무죄를 선고했다. 그에 대한 사형 집행이 정치탄압을 위한 ‘사법살인’이었음을 인정한 셈이다.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지 실로 52년 만에 간첩 누명에서 벗어난 조봉암의 진보 정치가 햇빛을 볼 날은 언제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