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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노동자대투쟁 - 울산 현대중공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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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 여름 해가 떠오르고 있었다. 동해바다를 타고 온 습하고 더운 바람은 끝이 보이지 않는 드넓은 조선소 위를 지나 노동자 주거지를 뒤덮고 가난한 골목 사이사이로 번져나갔다. 한 무리 젊은 노동자들이 정문 건너편 버스정류장에 내린 것은 6시 반경이었다. 수많은 노동자들이 정문으로 몰려들고 있었다. 휴일도 없이 매일 12시간이 넘게 일해 온 노동자들의 얼굴에는 전날의 피로가 그대로 묻어났다. 거대한 조선소는 인간의 피와 땀을 먹고 사는 괴물처럼 그들을 빨아들였다. 젊은이들은 잠시 맞은 편 상가 골목에 모여 상황을 살폈다. 정문 앞에는 여느 날처럼 경비원들과 노동자들 사이에 승강이가 벌어지고 있었다.

“어이! 이리 와! 머리가 길잖아!”

작업복 차림의 노동자 한 명이 경비원에게 붙잡혔다.

“내 머리가 어때서요? 깍은 지 며칠 되지도 않았구만.”

노동자가 항변했으나 경비원은 거칠게 그의 뒷덜미를 잡아 당겼다.

“뒷머리가 옷깃을 덮잖아? 머리 숙여!”

경비원은 다짜고짜 바리캉으로 뒷머리카락을 반 뼘 정도 밀어 올렸다. 뒤통수에 하얀 자국이 나버린 노동자가 수치와 분노로 표정이 일그러졌다. 그러나 아무 반항도 하지 못한 채 맥없이 현장으로 들어갔다. 경비원들은 또 다른 희생자를 찾기 위해 날카로운 시선으로 노동자들을 훑었다.

“다들 준비 됐어?”

정문의 익숙한 소동을 바라보던 한 노동자의 질문에 다른 노동자들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잠을 못 잔 이들의 눈은 충혈되었고 표정은 긴장으로 굳어 있었다.

“실패하면 우린 끝이야. 가자!”

젊은이들은 우르르 길을 건너 출근 물결에 섞여 들었다. 몇 분 후, 정문 안쪽 사거리에 돌연 긴 플래카드가 활짝 펼쳐졌다. 한 사람이 허리에 둘둘 말아 숨겨 들어간 것이었다. ‘어용노조 물러가고 민주노조 건설하자’는 꾸불꾸불한 글씨는 새벽에 써서 아직 페인트 냄새도 가시지 않았다. 10여 명의 노동자들은 나란히 서서 외치기 시작했다.

“현대중공업 근로자 여러분! 회사에서 어용노조를 만들었습니다. 우리가 민주노조를 만들어야 합니다!”

입을 모아 외치는 소리가 조용히 출근하던 노동자들의 귀를 파고들었다. 그러나 호응하는 이는 없었다. 다들 눈길을 피해 앞만 보며 지나치는 것이었다. 응답은 회사 측에서 먼저 왔다. 5분도 지나지 않아 관리직 사원들이 떼로 몰려와 시위대를 에워싸고 출근하는 노동자들을 향해 고함쳤다.

“이 사람들 외부불순 세력이니까 현혹되지 말고 빨리 현장으로 들어가요.”

관리자들의 고함에 섞여 구호는 잘 들리지도 않았다. 더욱 호응하는 이가 없었다. 시위대의 표정은 점점 어두워졌다. 그런데 7시 30분이 되었을 때였다. 현장 쪽에서 다가온 건장한 노동자 하나가 관리직의 장벽을 뚫고 시위대 편으로 들어가며 소리쳤다.

“들어갑시다, 여러분! 함께 합시다!” “우리도 들어가자! 함께 싸우자!”

기다렸다는 듯이, 뒤따라온 다른 사람들도 관리직들을 뚫고 합류하기 시작했다. 시위대가 걷잡을 수 없이 불어나자 관리직들은 슬금슬금 자리를 떴다. 시위 노동자는 순식간에 15,000명 정도로 늘어났다. 모든 기계는 멈추었다. 현대중공업 창립 이래 최초의 파업이었다. 1987년 7월 28일의 일이었다.

이 날 선동에 앞장선 노동자는 후문의 시위대까지 합쳐도 수십 명에 지나지 않았다. 이들의 작은 외침에 2만여 명의 노동자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호응한 것이다. 그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현대중공업은 박정희 정권의 유물인 군사문화로 병영처럼 통제되고 있었다. 작업배치 시간에 반장 앞에서 담배를 피운다고 정강이를 걷어차이고 이를 말리는 사람까지 따귀를 맞는 사건이 일어나고, 쉬는 시간에 고위간부 차가 지나는데 담배를 끄지 않았다고 해서 해고통보를 받은 경우도 있었다. 사무실 관리자들은 자기보다 나이가 많은 노동자들에게도 반말을 쓰는 게 예사였다. 노동자들은 한 시간 일찍 출근해 현장 청소를 하고 군대식 체조를 해야 했으며 점심시간에도 작업을 하는가 하면 화장실 가는 것도 일일이 기록되어 물도 마음대로 마실 수가 없었다.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두발검사였다. 무사히 정문을 통과한다 해도 현장의 조회시간을 넘어갈 수는 없었다. 작업반장들은 아침마다 노동자들을 체조대형으로 넓게 벌리게 해놓고 가위를 들고 돌아다니며 두발검사를 했다. 조금이라도 자기 눈에 거슬리면 여지없이 머리카락을 움푹 움푹 잘라 놓았다. 

임금도 야박했다. 잔업에 휴일특근까지 한 달에 5백 시간을 일해도 급여는 30만원 수준이었다. 임금인상도 관리자들 마음대로였다. 봄철이면 임금을 조금씩 올리는데 시급이 10원 오르는 사람부터 90원 오르는 사람까지 제각각이었다. 성과급도 서로 다 달랐다. 노동자들의 분노와 불만은 쌓일 대로 쌓여 있었다. 현대그룹뿐 아니라 천만 노동자 전체가 마찬가지였다. 누군가 불만 붙이면 폭발할 상황이었다. 이에 불을 당긴 것은 6월민주항쟁이었다.  울산에서 벌어진 6월민주항쟁에 직접 참가했던 현대그룹의 일부 선진적 노동자들은 항쟁이 끝나자마자 자기 노동현장의 민주화투쟁에 나섰다. 7월 5일 현대엔진의 노조결성을 시발로 다른 계열사 노동자들도 잇달아 노조를 결성했다. 다급해진 현대그룹은 7월 24일 현대중공업에 어용노조를 만들어 버렸다. 7월 28일 아침의 시위는 이에 맞선 싸움이었다. 파업은 현대중공업만의 일이 아니었다. 같은 시기, 격렬한 파업농성이 들불처럼 전국으로 번져 나가고 있었다. 강원도 탄광에서 시작해 부산  마산  창원  거제도 등 전국의 주요 공업단지가 노동자의 함성으로 들썩이고 있었다.

현대중공업에서는 다음날부터 매일 대규모 집회가 열렸다. 농성을 위한 다양한 프로그램도 고안되었다. 입사 전에 드럼이나 기타를 다뤘던 노동자들은 밴드를 만들어 노래자랑이며 장기자랑 대회를 주도했다. 노동자들은 서로서로 노래 한 번 하겠다고 줄을 서서 기다렸다. 자유발언 시간이 되면 또 많은 노동자들이 한 마디씩 하려고 마이크 앞에 줄을 섰다. 햇볕에 탄 얼굴은 새까매져서 코끝이 몇 번이나 허물을 벗었지만 8월 중순이 되어도 참가자의 숫자는 줄지 않았다. 오히려 가족들까지 합류해 점심시간이 되면 잔디가 깔린 운동장에 어린아이들까지 오순도순 모여 앉아 도시락을 나눠먹는 모습이 마치 소풍날 같았다. 현대그룹만이 아니었다. 온 나라의 노동자들이 비로소 인간으로 재탄생한 것 같았다. 오랜 군사독재 아래 공돌이, 공순이라 업신여김 당하던 노동자들이 하루아침에 사회의 주역으로 떠오른, 가히 혁명적인 나날이었다.

파업 21일째인 8월 17일 아침, 전날부터 내리기 시작한 비가 멈추지 않고 있었다.

“뭐야 이거?”

노동자들은 굳게 닫힌 정문 앞에 모여 고함을 터뜨렸다. 경비실에는 폐업공고문이 붙어 있고 철문 안쪽에는 거대한 철구조물이 기괴한 형태로 누워 길을 막고 있었다. 회사 측이 밤새 선박 구조물들을 쌓아놓고 용접까지 해놓은 것이다.

“밀고 들어가자! 때려 부셔!”

숫자가 늘어나면서, 노동자들은 더욱 흥분했다. 경비실 유리창이 박살나고, 경비들은 재빨리 달아나 버렸다. 지도부 한 명이 경비실 지붕 위로 올라갔다.

“우리가 얼마나 무서우면 회사가 이렇게 우리를 막겠습니까? 근데 우리가 누굽니까? 쇠를 만지는 노동자 아닙니까? 저까짓 거 번쩍 들어내 버립시다!”

수백 명의 노동자들이 함성을 지르며 정문을 넘어 들어가더니 각자 자기 현장에서 지게차며 산소 절단기를 끌고 와 철구조물 해체에 들어갔다. 지게차로 들기 어려운 구조물은 수십 명씩 달라붙어 ‘영차! 영차!’ 들어 날랐다. 구조물이 해체되는 데는 30분밖에 걸리지 않았다.

“뚫렸다! 만세!”

정문이 활짝 열리자 빗속에서 노래와 구호를 외치던 노동자들은 일제히 함성을 지르며 밀려들어갔다. 운동장에서의 집회는 최고조로 격앙되었다.

“월급쟁이 사장은 아무 힘도 없습니다! 정주영 회장과 정부를 향해 싸워야 합니다!”

“가두로 진출합시다! 우리의 힘을 보여줍시다!”

즉석에서 가두시위가 결의되었다. 목적지는 울산시 외곽의 공설운동장이었 다. 16km나 되는 거리였다. 장대한 시위행렬이 꾸려져 대열의 끝이 보이지 않았다.

“노동자도 인간이다! 인간답게 살아보자!”

가두시위에는 중공업뿐 아니라 현대그룹의 다른 계열사 노동자들과 가족들까지 속속 참가해 시간이 갈수록 인원이 불어났다. 사만 명이 넘는 대열 앞에 경찰은 속수무책이었다.

가두시위는 다음날인 18일에도 벌어졌다. 이날 경찰은 울산시내로 넘어가는 남목고개에 진을 치고 행진을 막으려 했다. 노동자 대표가 일단 노동자들을 도로 위에 앉히고 경찰서장과의 담판에 나섰다.

“길을 터주십시오. 우리가 흥분하면 무슨 짓을 할지 모릅니다. 꼭 샌딩머신의 위력을 보시겠습니까?”

샌딩머신은 고압으로 모래를 뿜어 철판의 녹을 제거하는 기계로, 시위대의 맨 앞에 배치되어 있었다. 실상 분사된 모래알은 몇 미터만 날아가면 힘을 잃어 먼지바람이 되고 만다. 게다가 정문에서 경찰들에게 겁을 주려고 시범을 보이느라 압축공기를 다 써버린 상태였다. 그러나 경찰은 긴장하고 있었다. 노동자대표는 다그쳤다.

“꼭 여기서 제2의 광주사태를 맞아야겠습니까? 우리는 갑니다. 10분 여유를 줄테니 즉각 비키십시오.”

“야, 이 사람아! 그걸 내가 여기서 결정하나? 청와대에서 결정할 일이지!”

경찰서장은 버럭 화를 냈다. 그러나 예고한 10분이 지나 노동자들이 길바닥에서 일어서자 재빨리 철수명령을 내렸다. 폭염 속에서 방석복에 방패며 방석모까지 갖춘 전투경찰들은 무거운 몸을 돌려 철수하기 시작했다.

“와! 경찰이 도망친다!”

노동자들은 함성을 지르며 따라갔다. 경찰과의 거리는 30미터, 전경들은 노동자들에게 잡힐까봐 땀을 뻘뻘 흘리며 달아나기 바빴다. 경찰이 노동자들에게 쫓기는 형상이었다. 

권위주의 통치가 무너지는 현장은 민중의 축제장과 같았다. 노동자들이 행진하는 도로변의 주택과 점포에서는 너도 나도 큰 통에 물을 받아 나눠주고, 무료로 음료수와 막걸리를 내놓았다. 열렬한 박수와 환호성도 끊이지 않았다. 현대그룹 노동자들이 가두시위를 벌이던 무렵, 대파업은 절정에 이르고 있었다. 파업에 참가한 사업장은 4,170개에 이르렀고 참가인원은 122만 명이 넘었다. 1987년 노동자대파업이라 불리는 이 역사적인 사건은 경제발전의 주역이면서도 인간 이하의 대접을 받아온 노동자들을 역사의 전면으로 부각시킨 기념비적인 민주주의 투쟁이었다.


* 이 글은 울산대학교 출판부에서 간행한 《1987년 울산노동자대투쟁》을 참고하였습니다.

글 안재성

1989년 장편소설 <파업>으로 전태일문학상을 수상하며 등단했다. 이후 대표작으로 <사랑의 조건>, <황금이삭>, <경성트로이카>, <연안행>,등의 장편소설과 <이현상 평전>, <박헌영 평전> 등의 인물평전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