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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정권의 선거부정
국정원의 선거개입 등 한국의 민주주의가 다시 시험대에 올랐다. 해방 이후 한국 현대사에 나타난 역대 정권의 권력남용, 특히 선거과정에 나타난 정권의 불법적 선거개입 사례들을 살펴봄으로써 교훈을 얻고자 한다.
1. 이승만 정권의 부정선거와 4.19혁명
8.15 해방 후 이승만은 집권기간 내내 정권유지를 위해 수많은 불법/탈법적인 조치를 취하는데 특히 선거 시기에 자신의 정적을 제거하고 선거에서 이기기 위한 정치술수에 탁월한 역량을 발휘한다. 이승만의 선거 전략은 경찰과 공무원을 동원한 관건선거와 대중동원을 통한 여론몰이로 특징지을 수 있다.
우선 이승만은 정치적으로 궁지에 몰릴 때마다 개헌을 통해 유리한 입지를 확보하려 했다. 이승만은 1952년 최초의 정부통령선거를 자신에게 유리한 직선제로 치르기 위해 부산 일원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출근하는 국회의원 50명이 탄 버스를 크레인차로 헌병대로 끌어가는 부산정치파동을 일으킨다. 그중에서 자신에 반대하는 소장파 국회의원 10명을 국제공산당 간첩사건으로 구속하고 국회에서 기립표결로 개헌안을 통과시키는 폭거를 저지른다. 이것이 이른바 ‘발췌개헌’이다. 그리고 1954년에는 자신의 영구집권을 위한 또 한번의 개헌을 하는데 이것이 이른바 ‘사사오입개헌’이다. 1952년 헌법에 대통령 임기가 1차에 한해 중임할 수 있다고 되어 있어 56년에 대통령 자리에서 내려올 수밖에 없게 되자 자신의 영구집권을 위한 개헌을 추진하는데, 이것이 국회에서 한 표 차이로 부결되자 이를 이른바 사사오입을 적용해야 한다는 해괴한 논리를 동원하여 결과를 뒤집은 것이다. 이 사사오입개헌은 이승만 독재시대의 한편의 정치코미디로 우리 헌정사에 씻을 수 없는 오점으로 남았다.
1954년 국회의원 선거에서 이승만은 자유당 후보(상당수가 친일파였다)들을 당선시키기 위해 이른바 ‘곤봉선거’를 실시한다. ‘곤봉선거’란 경찰이 유권자를 곤봉으로 꼼짝 못하게 했다고 해서 나온 말인데, 경찰들이 얼마나 억압적 분위기를 조성한 채 선거를 치르게 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야당 쪽 후보가 당선 가능성 있는 유력한 인물일 경우에는 마타도어 유포, 선거등록서류 탈취 등으로 선거에 나서는 것부터 원천봉쇄하고, 설사 등록을 하더라도 온갖 방법으로 유세를 방해하여 선거운동을 못하게 만들었다. 1954년 총선거 때 조봉암은 선거등록서류를 탈취 당해 끝내 등록하지 못하고 결국 출마를 포기하게 된다.
이승만의 정치술수가 돋보이는 또 하나의 사례가 관조직과 대중동원을 동원한 여론몰이와 사전선거다. 1952년 부산정치파동 때 이승만은 이른바 백골단, 땃벌떼, 민중자결단 같은 정치깡패를 동원했다. 1956년 대선 때에는 대한노총 등 어용단체를 동원하여 이승만의 출마 탄원서를 제출하게 한다. 지방에서는 경찰이 직접 탄원서를 받으러 다닐 정도였다.
그러나 이런 정권의 술수와 강압에도 불구하고 선거시기에는 민의가 폭발적으로 표출되어 나타났다. 이러한 선거의 위력은 1956년 대선에서 극적으로 나타났다. 당시 야당후보 신익희는 ‘못살겠다 갈아보자’는 구호로 엄청난 인기를 끌었고, 한강 백사장 유세에는 30만의 인파가 인산인해를 이뤘다. 이런 야당의 폭발적인 인기는 선거결과에도 이어져 인기가 좋았던 신익희가 갑자기 서거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조봉암이 216만 여표를 받았고, 신익희의 추모표를 합치면 거의 이승만 표에 육박하였다. 당시의 지독한 개표부정을 감안하면 실질적인 야당의 승리였다. 그리고 부통령 선거에서는 야당의 장면이 자유당의 이기붕을 20만여표 차로 누르고 당선되었다. 이 선거 결과에 놀란 이승만과 자유당이 1960년 3.15 대선에서 엄청난 부정선거를 계획하게 되고 이것이 4.19혁명의 도화선이 된다.
1960년 3.15 부정선거는 4.19혁명을 불러일으켜 결국 이승만정권의 종말을 초래하였다. 1958년 12월 이른바 ‘24파동으로 행정∙관권선거를 하기 위한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고 1959년 3월에 ‘6인위원회’를 가동시켜 국무위원 6명으로 하여금 선거 관련 중요문제를 다루게 한다. 이 6인위원회의 중심 인물 최인규는 내무부장관으로서 부정선거를 총 지휘한다. 투표과정에서의 부정이 극심했는데. ‘4할 사전투표’, ‘3인조∙9인조 투표’ 등이 전국적으로 행해졌다. 민주당 참관인이 도처에서 축출당했으며, 대리투표도 곳곳에서 일어났고, 개표과정에서의 부정도 아주 심했다. 그래서 민주당은 투표 진행 중인 오후 4시30분에 이미 “3.15 선거 전면 불법∙무효”를 선언했다.
이러한 엄청난 부정선거는 학생들과 민중들의 거센 저항을 불러왔고, 마산의 3월 15일과 4월 11-13일 시위, 그리고 4월19일 서울∙부산∙광주 등지에서의 대규모 유혈시위로 수백 명의 사상자를 내고 결국 이승만 대통령의 하야로 이어졌다. 이승만정권의 부정선거는 결국 이승만∙자유당 정권의 붕괴를 초래한 것이다.
2. 박정희 정권의 부정선거와 선거부정
박정희 시대에도 국가권력에 의한 불법 선거개입은 계속된다. 다만 구별되는 특징이라면 방법이 좀 더 교묘해지고, 공작정치의 성격을 띠게 된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1963년 김종필이 조직한 중앙정보부가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 또 하나의 특징은 과거 이승만시대가 관권∙행정선거였다면 박정희시대에 와서는 거기에 더해 선심공약과 금품살포에 의한 금권선거의 양상이 뚜렷해졌다는 점이다.
1967년 6∙8선거는 박정희시대의 대표적인 부정선거로 역사에 오명을 남겼다. 박정희와 수하 장∙차관들은 전국을 다니면서 수많은 지역개발 선심성 공약을 하고 돌아다녔다. 그리고 이때부터 그 이전의 막걸리, 고무신 정도를 넘어 막대한 금품을 뿌리는 선거가 되었다. 이 막대한 선거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박 정권은 중앙정보부를 동원했다. 이 과정에서 불거져 나온 것이 이른바 4대 의혹사건, 한국비료 사카린 밀수사건 등이다. 이런 타락성 때문에 이 선거를 뜻있는 지식인들은 ‘망국선거’라고 불렀다.
그리고 이 6∙8선거 이후 박정권의 공작정치가 본격화 된다. 6∙8 부정선거에 대한 대규모 시위로 위기의식을 느낀 박정권은 안보위기를 고조시켜 국민의 관심을 돌리기 위한 공작차원의 사건들을 발표한다. 그것이 이른바 ‘동백림사건’, ‘3차 민비련사건’이다. 이런 공작 차원의 사건만들기는 박정희 집권 내내, 그리고 전두환∙노태우 정권에서도 이어져 중요 선거시기마다 의례히 엉뚱한 공안사건, 대북사건이 터지곤 했다. 그래서 선거 때면‘북풍’이라는 말이 따라다녔다.
그러나 거듭되는 관권∙금권선거 속에서도 국민들의 조용한 저항이 독재자의 영구집권에 결정적 장애물을 만든다. 그것이 1971년 대선과 총선이다. 1971년 대선에서 김대중은 파격적인 공약과 명연설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고, 4월 장충단 유세에는 30만명 이상이 운집하였다. 이에 위기를 느낀 박정희가 3선 이후 불출마를 선언하는 극약처방을 썼지만 94만표 차이로 힘들게 승리했다. 대선에 이어 그해 5월 실시된 총선에서는 신민당이 89석으로 개헌저지선에서 20석이나 상회하는 의석을 확보하였다. 정치공작으로는 장기집권이 불가능해졌고, 결국 박정희는 일종의 쿠테타, 10월유신의 길로 나가게 되었다. 공작정치와 부정선거로 독재권력을 유지할 수 없게 되자 아예 선거자체를 무력화시키는 선거부정으로 나가게 된 것이다.
한국 민주주의의 암흑시기라고 할 수 있는 유신체제 하에서도 선거는 계속되었다. 그러나 대선은 통일주체국민회의라는 거수기 조직에서 치르는 체육관 선거로 대치되었고, 국회의원선거는 있었으나 권한도 현저하게 축소되었고, 여당에게 절대 다수를 보장하는 헌법구조 속에서 국회는 절대 독재권력의 부속물처럼 취급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철통같은 유신체제 하에서도 선거는 새로운 돌파구를 만들어냈다. 그것이 1978년 12∙12 국회의원 선거이다.
이 12.12선거에서 신민당은 집권 공화당보다 득표율에서 1.1퍼센트 앞서서 전체 의석은 적었으나 실질적으로 승리했다. 유신체제의 몰락은 12.12 선거에서 나타난 민심이 그 배경을 이루고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3. 전두환∙노태우 신군부 하에서의 선거와 6월항쟁
신군부 정권 시기의 선거 역시 유신체제의 변형, 내지는 연장이었다. 대선은 이름만 바뀐 체육관선거였고, 국회의원선거도 여당에 절대다수를 보장하는 기형적인 제도였다. 그리고 전두환 정권은 ‘정치풍토쇄신위원회’를 발족해 야당 정치인의 활동을 묶어놓고, 일부 선별된 사람들로 하여금 야당을 조직하도록 조종하였다. 의회제 정당정치를 완전히 껍데기만 남겨놓고 허구화시켜버린 것이다. 이렇게 최소한의 민주주의마저 질식된 상황에서 희망의 불씨는 선거를 통해 일어났다. 1985년 2.12총선이 바로 그것이다.
2.12 총선은 공권력과 행정기관을 총동원하는, 야당에게 절대 불리한 조건 속에서 치른 선거였지만 이 선거에서 우리나라 역사상 최대의 바람이 불었다. 급조한 신민당의 이민우 총재의 종로유세에 10만의 인파가 모였고, 유세장마다 야당후보들의 연설이 많은 군중들의 환호를 받았다. 금기시되었던 정권비판이나 광주항쟁에 대한 이야기들도 쏟아져 나왔다. 이 선거 결과 양김의 신민당이 집권 민정당과 거의 대등한 득표율로 일약 2당으로 부상하고, 어용야당 민한당은 완전히 몰락했다. 이 선거로 양김의 이른바 선명야당이 부활하고, 학생∙노동∙농민운동도 활발해졌다. 이 2.12총선을 계기로 6월민주대항쟁으로 가는 길이 열렸고, 전두환 정권은 몰락의 길로 접어들었다.
1987년 6월항쟁은 제도적 자유민주주의를 확립하는 분수령이 되었다. 6월항쟁에 굴복한 전두환.노태우의 6.29 선언으로 대통령직선제를 골자로 하는 민주적 헌법이 16년만에 회복되었다. 물론 그 이후에도 여러번의 선거가 있었고, 선거 시기만 되면 금권∙관권에 의한 부정선거 시비가 끊임없이 이어졌지만(1987년 대선과정에서 일어난 구로구청부정투표함 사건도 그 한 예이다) 그 이전 정권 때처럼 공권력의 개입에 의한 총체적 부정선거는 사라진 것처럼 보였다. 적어도 1992년 문민정부 수립 이후부터는 국가권력이 직접 선거에 개입하여 결과를 조작하는 사례는 없어진 것 같았다.
역대독재정권의 민주주의 억압∙왜곡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민주주의는 조금씩 성장하고 발전해왔다. 무엇보다도 그것은 우리 국민들이 자신의 손으로 대표를 뽑고, 자신의 주권을 행사하고자 하는 민주적 의식을 계속 성장시켜온데 기인한다. 이러한 국민들의 민주의식의 성장은 대개 선거과정을 통해 비약적으로 이루어져왔다. 선거가 민주시민의식의 교육장 역할을 해온 셈이다. 그리고 국민의 선거권을 훼손하거나 제약하는 정권에 대한 국민의 저항은 때로 거대한 혁명적 변화를 가져오기도 했다. 4월혁명이 그랬고, 6월항쟁이 그러했다.
그러나 2007년 이후 우리의 민주주의는 많이 허약해졌다. 전세계적인 신자유주의 물결이 전반적으로 우리 사회의 양극화와 경제만능의 물신숭배 풍조를 부추겼고, 사회 전반적으로 공동체적 유대의식이 약화된 것도 한 요인이 아닌가 싶다. 깊은 성찰이 요구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