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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백림의 추억
베를린에서 제법 오래 살았으니 이른바 동백림사건에 대해 남다른 기억을 가질 수밖에 없는 것은 아니냐고 묻는다면 대답은‘노’다. 동백림사건이 일어났던 지난 1967년부터 20년 동안 그곳에 거주해서인지, 정작 베를린에서 그 사건의 흔적을 발견하기란 쉽지 않다.
필자가 다른 도시에서 서베를린으로 옮길 당시만 해도 서베를린은 ‘동독이란 바다 가운데 떠있는 외딴 섬’과도 같은 곳이었다. 서독의 어느 지역에서 서베를린을 방문하려면 동독의 고속도로를 경유하거나 비행기를 타야만 했는데, 동독 경찰이 여권을 샅샅이 조사하고 별도의 허가증에 도장을 찍어줘야 통과가 가능했었다. 냉전의 상징으로 동·서 베를린을 갈라놓았던 삼엄했던 장벽도 통일독일이 되면서 사라졌다. 그 베를린에 윤이상 선생이 있었다. 숲으로 둘러싸인 호젓한 호숫가에 위치한 선생 댁에 몇 차례 가서 그의 작품에 대한 해설을 들었다.
그가 직접 LP판으로 자신이 작곡한 <광주여 영원히> 등을 들려주며“나는 아무래도 CD보다는 레코드판으로 듣는 게 더 좋다.”고 했던 말이 생각난다. 그의 음악은 난해했고, 전통적인 화성(和聲)에 익숙한 필자의 귀엔 몹시도 불친절하게 다가왔다. 하지만 당시 내겐 음악 보다는 그가 온몸으로 맞았던 역사성에 더 관심이 많았다. 카리스마와 권위가 몸에 베인 예술가로 내게 남아 있던 그는 서울에서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동백림사건으로 사형선고를 받았던 물리학자 정규명 선생(유럽민협 의장 역임)은 운동을 하며 가깝게 모신 분이기에 많은 기억이 있다. 그는 생계유지를 위해 조그만 두부공장을 운영했는데, 작업장에서 넘어져 오랫동안 마비된 몸으로 병상 생활을 하다가 2005년 겨울 프랑크푸르트 근교에서 쓸쓸하게 생을 마감했다. 눌변이되 무겁고 아버지처럼 품이 넉넉한 분이었다.
그리고 뮌헨대학교 부설 연구소에서 일하며 1980년대 말과 90년대 초에 필자와 자주 알프스 등반을 했던 안석교선생(범민련 유럽본부 의장 역임)은 겨울등반 중 실족으로 벼랑에서 떨어져 운명을 달리하였다. 자신에게는 냉혹할 만큼 엄격하되 후배들에겐 격식 없이 모든 것을 내어주는 분이었다. 평생을 곤궁하게 살면서도 북한에 홍수로 아사자가 속출하자 얼마 되지 않은 전 재산을 팔아 그것도 익명으로 기증을 했던 이였다. 정규명 박사와 안석교 박사는 박정희 대통령이 핵물리학을 연구하라고 국비로 유학을 보낸 영재들이었는데, 동백림사건으로 그들의 운명은 송두리 째 바뀌었다.
또 필자가 편집인 노릇을 했던 신문 민주조국의 제자 (題字)를 써주신 이응노 화백은 이미 입관되어 관 뚜껑이 닫히기 직전 파리의 영결식장에서(서양에선 관에 안치된 시신에게 예를 갖출 기회를 주기도 한다.) 처음이자 마지막 인사를 드렸다. 그가 세상을 뜨기 몇 년 전에 일시 귀국 할 기회가 있었는데 마침 충남 홍성엘 들를 거라고 했더니, 그의 조카 이희세 화백( 6·15공동선언추진 유럽 대표 역임)이 삼촌 생가가 아직 그대로 있는지 확인해 달라고 부탁하기에 수덕사 입구에서 여관으로 바뀐 그곳에 다녀왔다.
주인 없는 고택 뒤란의 바위에 고암(顧菴) 선생이 새겨 놓은 암각화며 단아한 그의 첫 부인도 얼결에 뵙고 조카의 안부를 여쭸더니 무척이나 반가워하셨다. 이응노 선생은 6·25때 헤어진 북의 아들 소식을 확인하기 위해 동베를린 소재 북한대사관을 방문했다고 한다. 그 댓가로 그는 2년 반의 옥고를 치렀다. 그때가 어느 때인가. 군사독재의 시퍼런 서슬로 모두가 숨죽일 때였는데, 간첩혐의를 썼던 동백림의 ‘거두’들을 겁도 없이 두루 만나 뵌 셈이었다. 또 한 분이 생각난다.
21살의 나이에 연루되어 사형을 구형받은 당시 기센대 유학생이었던 최정길 선생. 튀빙엔 대학 박사과정에 적을두고 있던 1982년 경 필자는 그를 아주 우연하게 그곳 한인교회에서 만났다. 그이야말로 북에서 음악을 하던 아버지 최상옥(그는 윤이상 선생의 고향 친구이기도 했다.)을 만나고 아버지로부터 유학비를 받은 죄밖에 없는데, 부인의 말에 따르면 아직까지도 고문 받는 꿈을 꾸며 진땀을 흘리며 시달린다고 했다.
그 외에 프랑스 슈트라스부르크의 정성배 교수는 사건당시 자신의 구명운동을 해준 외국 부인과 결혼하여 신체 장애자인 그녀를 평생토록 간호하며 살아가고 있다. 그는 1980년대 초 김대중 구명운동을 국제적으로 펼친 데에 대한 답례로 김대중 정부 때 초대되어 일시 귀국한 바 있다.
독일과 프랑스에서 동백림사건으로 연루된 이들은 그들 국가의 강력한 요구로 사건 후 몇 년 안에 다시 되돌아 왔지만, 정작 당사자들인 그들의 몸과 영혼은 회복할 수 없는 상처를 받은 뒤였다. 앞서 열거한 이들은 대부분 그 후 자연스럽게 해외에서 반독재운동과 통일운동에 나섰지만 최정길 선생 같은 분처럼 그때 받은 정신적 육체적 충격으로 인해 한국인들을 전혀 만나지 않으며 거의 숨어 지내다시피하는 이들도 있었다.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는 해외지역의 한국민주화운동사 정리 준비사업의 일환으로 독일지역 민주화운동 기초조사사업과 사료수집을 진행한 바 있다. 그 중 하나가 동백림사건 관련 독일지역 사료이다. 독일 외무성 정치문서고(문서철 37)에 보관된 1 만 여 장에 이르는 총 18권의 서류철과 구 동독 국가안전부 문서고(문서번호 MfS-ZAIG 10468)에 보관중인 500쪽의 자료, 독일국립도서관 신문 문서고에 보관중인 당시 주요 신문에서 발췌한 사건 관련기사들과 <슈피겔>지 온라인 문서고의 자료들이 그것이다.
독재정권 시절 간첩사건은 많은 경우 기본적인 사실 몇 개에다가 고문과 덧칠, 키움과 비틀기 등 갖은 연출을 통해 그들을 ‘프랑켄슈타인’으로 만들곤 했는데, 김형욱 당시 중앙정보부장과 박정희 대통령이 국제법을 위반해 가면서까지 사건을 키운 이유는 무엇인가?
이에 대해 2006년 1월 26일 국정원 과거사진실위원회는 <동백림사건>은 중앙정보부가 당시 6·8 부정선거를 무력화하려는 정치적 목적을 위해 대규모 간첩사건으로 과대 포장한 것이라고 밝혔다.
진실위는 그 근거로 검찰에 송치한 66명 가운데 23명 에게 간첩죄를 적용했지만 대법원은 단 한 명도 간첩죄를 인정하지 않았던 점을 들었다. 또 중앙정보부가 당시 대표적인 학생 동아리인 <서울대 민족주의 비교연구회 사건(민비연사건)>으로 수사를 무리하게 확대한 뒤, 수사 도중 7차례나 조사 결과를 발표한 점도 이유로 들었다.
진실위는 특히 해외에 거주하던 예술가와 교수, 유학생 등 30여명이 국내로 불법 연행됐으며, 수사 과정에서 각종 고문이 자행된 것으로 추정했다. 진실위는 또 중정이 이 사건 재판 도중 검찰과 재판부에 금품 로비를 하려 했다는 내부 문서를 발견했다고 밝혔다. 이에 따라 진실위는 정부가 사건 관련자들에게 포괄적으로 사과해야 한다고 권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