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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사들의 어머니 - 배은심

1987년 6월 10일, 군부독재를 연장하려는 전두환 정권은 요식적인 절차로 민정당 전당대회를 열기로 했다. 민주화를 요구하며 싸워왔던 민주세력과 야당은 이를 계기로 6월항쟁에 돌입하게 되는데 바로 그 전 날, 연세대학교 학생시위 도중 이한열이 경찰이 쏜 최루탄에 맞아 쓰러져 사경을 헤매는 사태가 일어났다.

소식을 듣고 달려온 이한열의 어머니 배은심은 꼬박 27일간을 세브란스병원 중환자실에서 날밤을 지샜다. 하지만 이한열은 7월 5일 운명했다. 7월 9일 서울시청 앞에서 수십만의 학생, 시민들이 운집한 가운데 장례식을 치르고 광주 망월동에 안장되었다. 전남 순천에서 태어나 열아홉에 결혼하여 평범한 주부로 살아왔던 배은심은 아들의 죽음을 계기로 역사와 사회현실에 눈뜨게 되고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삶을 살게 된다.

 한열의 부친은 아들의 운구행렬이 교문 밖으로 나가면 유혈사태가 일어날까 염려하여 연세대학교 뒷산에 묻자고 주장했다. 부친의 깊은 뜻을 헤아리지 못한 장례위원들은 혹시 정권 측과 모종의 타협이 있었던 게 아닌가라는 오해까지 하던 상황이었다. 5일장을 치렀는데 3일째 되던 날, 남편은 배은심에게 아들을 연세대 뒷산에 묻자고 했다. 그런데 배은심이 밤새 생각해 보니 집은 광주인데 아들을 서울에 묻어두고 가면 보고 싶을 때 가서 무덤의 풀이라도 만져봐야 할 텐데 안 될 일이었다. 그래서 학생회장 우상호에게 아들을 광주 망월동으로 보내달라고 하고 "당신들이 못 보내주면 내가 이고 갈란다."고 나섰다. 한열의 장지(葬地)를 둘러싼 논란은 아들의 무덤이라도 가까이 두고 싶었던 배은심의 모정(母情)이 결정짓게 되었다. 한열의 시신을 실은 운구차가 광주를 향해 가는데 가는 곳마다 왜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길가에 운집해서 운구행렬을 지켜보고 있는지 배은심은 이해할 수 없었다. 

“나 그때까지는 인자 넘 아들이, 우리 한열이가 죽었는디 왜 곳곳마다 사람이 이렇게 많은가. 인자, 참말로 이상한 세상이다.” 

그런데 망월동 묘역에 도착해서는 5월 유가족들과 장지를 놓고 또 한 번 실랑이가 벌어졌다. 이 역시 배은심은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5월 쪽에서는 한열이는 이 쪽으로 와야 된다. 저 우리 연세, 연세대 동문들은 지금 상여를 메고 올라가는디 나는 저 쪽에 새 땅에다 묻을란다, 하니까 …… 인자 광주 시민들 뭐 할 것 없이 거 상여를 막 잡아 땡겨 갖고는 인자 그 3묘역으로 가는 거예요, 인자 그 3묘역에다. 그래서 …… 죽은 내 자식도 내 맘대로 못하게 하는 세상이 어디 있냐, 인자 막 나도 막 악이 나온께 인자 막 그런디”

이처럼 평범한 주부로서는 도무지 이해가 안 되는 상황 속에서 장례식을 치른 후, 배은심은 5월 유가족들과의 만남을 통해 그들을 이해하게 되었다. 

“그 자식을 죽여 놓고도 울지도 못 헌 그 5월 가족들, 그것을 인제 듣다 보니까 나는 죽은 건 똑같이 공통점인데 여기까지 오는 과정만 보더라도 당신들 앞에서 나는 입이 열 개라도 말을 할 수가 없소. 이런 게 온단 말이에요, 내가 인제. …… 그래서 나 거기서 인자 정중히 내 사과를 했어요.”

배은심은 그 해 8월, 전국민주화운동유가족협의회(유가협)를 통해 다른 유가족들과 만나면서 투사로 변해 갔다. 의로운 죽음이 있는 현장에는 그곳이 어디든 그녀는 달려갔다. 특히 강경대의 죽음으로 촉발된 1991년 5월투쟁 당시에 가장 많은 죽음을 겪었다. 

“그 이후에 일어난 이 모든 죽음들의 그 현장에는 내가 다 가 본 사람이고 …… 그래 인제 가서 보면은 인자 입관 직전에 화장해서 딱 옷 입혀서 인자 관 덮은, 덮을 직전의 얼굴만 내 놓고 보라는 그런 시간이 있어요. …… 아이고, 배가 얼마나 배고프냐, 가다가 빵 …… 사먹고 그래라고 인자 돈 만원을 거기다 넣고 …… 가다 뭐 사 먹어이, 배고픈께. 이 말 한마디 할 수 있는 게 어쩌면 내가 그것이 보람이었을 거예요, 거. 그래서 내가 죽고 사는데 대한 그 넘나듦, 이런 것들에 대한 공포가 없어져 버렸는 거, 아니 숨 안 쉬면 죽는 거고 숨 쉬고 있으면 사는 거다. 그 공포가 없어져 버렸어. 그리고 무서운 게 없는 거죠이.”

배은심과 유가족들은 어떤 투쟁현장에 가더라도 항상 앞장을 섰다. 최루탄을 마시고 수도 없이 연행되어 구류를 살고, 두들겨 맞고, 닭장차에 실리고, 길가에 내팽개쳐졌다. 배은심은 1988년 6월, 유가협 산하에 호남지역의 열사 유가족들을 묶은 호남지회를 만들었다. 모든 활동을 서울로 집중하던 관행에 제동을 걸었던 것이다. 이후 영남지회, 수도권지회 그리고 의문사지회까지 결성되면서 지회가 유가협의 조직적 근간이 되었다.

 “우리 어머니들이 지방에서도 그때는 투쟁 현장이 많으니까 꼭 서울에 올라올 것이 뭣이 있냐? 다 올라올 것이 뭣이 있냐? 해 가꼬는 그 뭐 지회를 하나 만듭시다, 하고 인자 제안을 했죠. … (서울 가는) 경비도 많이 들지, 또 어머니들이 다 올 수도 없지.”

김대중 대통령이 취임한 1998년 봄, 이른바 화해 차원에서 전두환, 노태우를 석방하는 결정을 내렸다. 배은심을 비롯한 유가족들은 끓어오르는 분노를 참지 못해 안양교도소로 달려갔다. 그런데 그들은 벌써 그곳에 없었다. 분노를 참지 못한 박정기(고 박종철의 부친)는 안타깝게도 전경의 방패에 머리를 들이받아 피가 솟구치는 지경에 이르렀다. 

“대통령 당신이 화해 차원에서 그 사람들 석방을 한다는 거를 우리들은 도저히 이해를 할 수가 없는 거예요. …… 그럴 때 마다 아니 마음 아픈 사람은 따로 있는데 권력자들 당신만, 당신들만 화해를 하면 화해가 되는 거냐. …… 그래 그래서 마음 아픈 사람들한테는 물어나 봤냐? 그러면. 으응? 그렇게 수월하게 화해를 할 수 있도록 그 전직 대통령 두 사람을 석방을 할 수 있도록 해서 뭣을 얻어 냈냐?”

배은심은 1997년 11월부터 유가협의 회장을 맡았다. 유가협은 1998년부터 의문사 진상규명을 위한 대국민 홍보에 힘을 쏟았고 1999년까지 이어진 422일간의 국회 앞 농성을 통해 마침내 민주화운동명예회복및보상에관한법률과 의문사진상규명특별법을 쟁취했다. 

“뭐 가정이 뭐 어째서 또 뭐 뭐시 어째서 뭐 어째 여자관계 어째 이렇게 마 오도를 해서 가꼬 범법자를 만들어 버린께 이 사람들을 그래서 우리는 이 그 굴레를 인자 벗어야 한다. 우리 어머니 아버지들이 살아계실 때 이 범법자라는 이 굴레를 우리는 어 벗겨줘야 한다. 이 사람들을 그 지금 어 언론이 뭐 뭐시니 희니 빨그니 해싼디 이것들 그 사람들이 하는 소리지 그런 사람 하나도 없거든요.” 

그러나 이 두 법의 운용과 집행에 대해서 너무 아쉬운 점이 많았다. 

“첫째 잘못헌 게 있습니다. 이 모법에는 기여도라는 게 없어요. 기여도라는 것이 우습게 나왔지. 이 프로티(percentage) …… 도 없고 기여도라는 이런 우리 단어도 몰랐고 ……그것 그게 진짜 잘못된 거거든요. …… 두 번째는 …… 의문사 42명에 대한 …… 이 사람들이 완전히 해결이 돼서 똑같은, 우리 위치에 같이 동등허니 있어야 하는데 그것이 안 돼 있기 때문에 인제 그 부분. …… 이야기를 하자면 이거 뭐 가슴도 아프고” 

배은심에게 유가협은 하나의 단체가 아니라 삶의 근거이자 이유이며 이한열은 여전히 가슴 속에 살아있는 자식이다. 

"유가협이 없었으면은 저는 이미 죽었을 거고, 이 싸움이라는 것은 …… 혼자 싸울 수가 없는 거고 그래 이 유가협은 …… 이 죽음이 모여서 많은 대중들 하고 이렇게 우리가 연대를 하면서 싸운 거고 그러나 이 죽음들 자체가 어 자기의 그 이익이나 욕심을 이리 부리거나 권력을 휘두르거나 이런 죽음이 아니기 때문에 많은 대중들 하고 이렇게 어울린 거다. …… 나는 어디를 가면 나 혼자 간다고 안 해요. 나는 반드시 우리 한열이하고 둘이 간다. …… 그렇게 둘이 어디를 가든지 둘이 임하기 때문에 두렵고 무서운 것은 없다, 그래요."

글 차성환  부산민주항쟁기념사업회 이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