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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옥에 갇힌 변호사 강신옥

1974년 7월 9일은 민청학련사건 관련 결심공판이 있는 날이었다. 전날부터 부슬부슬 내리던 비가 끈적끈적 습도를 높이며 법정의 공기를 무겁게 가라앉히고 있었다. 피고인 한 사람 건너마다 헌병이 1명씩 끼어 앉아있어 분위기는 더욱 살벌하고 숨 막혔다. 이날 이철, 김지하 등 7명에게 사형이 구형되었고, 무기징역 7명, 징역 20년 12명, 징역 15년이 6명이나 되었다. 이후 구형대로 선고판결을 받아 ‘정찰제 판결’이라는 이름을 얻은 이 사건은 기소자들의 형량 합계가 1,650년이나 되어 단일 사건으로 세계 사법사상 신기록을 수립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법정에서 변호사가 변론 도중 구속되는 기록도 남겼다. 학생들의 민주화운동에 사형까지 구형하자 비상보통군법회의 공판정에는 실소가 터져 나왔다. 김지하 외에 9명의 변론을 맡은 강신옥 변호사의 변론은 준엄한 선언이었다. 

“법은 정치나 권력의 시녀가 아닌가 생각한다. 지금 검찰관들은 나라 일을 걱정하는 애국학생들을 내란죄, 국가보안법, 반공법 위반 등을 걸어 빨갱이로 몰고 사형이니, 무기니 하는 형을 구형하고 있다. 이것은 법을 악용하는 ‘사법살인’행위가 될 수 있다.”

“유신헌법은 비민주적인 악법이다. 지금 나의 심정은 피고인석에 있는 저들과 함께 서서 재판을 받고 싶을 정도다.”

강변호사의 고뇌에 가득 찬 최종변론이 계속되는 동안 재판관에게 쪽지 하나가 전달되었다. 그러더니 갑자기 휴정을 선포하였고 그들은 퇴정을 해버렸다. 곧바로 정보부 요원들이 들이닥쳐 홍성우 변호사와 강신옥 변호사를 연행해갔다. 그날은 결심공판일로, 피고인들의 최후진술을 남겨놓고 있었기 때문에 두 사람이 끌려간 걸 보고 모두 놀라고 흥분하기 시작했다. 변호사가 변론 중에 구속되는 듣도 보도 못한 사태가 벌어진 것이었다. 사형을 구형받은 이철의 최후진술은 피를 토하는 구호가 되었다. 

“유신체제에는 끝까지 반대할 것이다. 그 자체가 반민주 반민족적인 것이다. 반유신을 이유로 빨갱이로 몰지 말라. 나는 떳떳이 죽겠다.”

그리고 김병곤이 외쳤다.

“사형구형을 받아서 영광입니다!”

두 변호사는 군사법정에서 가까운 빈 방으로 연행되어 조사를 받았으나 곧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늦은 저녁식사를 하며 강신옥은 아내에게 말했다.

“아들놈은 행여 법대에 보내지 말아야겠어. 더러운 직업이야.”

자정 무렵 쉽게 잠을 이루지 못하고 뒤척이고 있는데 초인종 소리가 후덥지근한 밤공기를 갈랐다. 이미 조사를 받고 나왔지만 설마 했던 예상은 틀리지 않았다. 문 밖에 검정색 지프차가 기다리고 있었고, 강신옥은 남산 중정으로 연행되고 말았다. 지하 취조실에서 한참을 구타당한 강신옥은 다만 “법이 법 같지 않으니 그렇게 말했을 뿐”이라는 진술만 되풀이 하였다.  

결국 그는 구속되었지만 신문에는 한 줄도 보도되지 않았던 그의 죄목은 긴급조치 4호 위반과 법정모욕죄였다. 이 사상 유례없는 변호사 구속사건은 1974년 7월 미국의 ‘뉴욕 타임스’ 1면 기사로 보도되면서 국내에 알려졌다. 

1936년 경북 영주에서 태어난 강신옥은 서울대를 다니는 동안 사법고시와 행정고시를 모두 패스하고 판사가 되었다. 그러나 법복을 벗고 미국으로 유학을 다녀와 변호사가 된 이래 그는 쭉 정의의 편에 서있었다. 그가 인권변호사의 길로 들어서게 된 것은, 1967년 통혁당사건으로 사형선고를 받은 신영복의 변론을 맡아 무기징역으로 감형을 시킨 데서부터 시작되었다. 1973년 서울대 학생이었던 손학규, 신금호의 반공법 위반사건에 변호사로 나서 이례적으로 무죄를 받아내기도 했다. 그가 1974년 민청학련사건의 변호인이 된 데는 이러저러한 시국사건 변론으로 유명해졌기 때문이었다.

강신옥이 구속되자 99명의 변호사들이 변호인단을 구성해 변론에 나섰다. 군법회의법 제28조에 따르면 “변호인은 재판에 관한 직무상의 행위로 인하여 어떠한 처분도 받지 않는다”라고 명시되어 있었다. 하지만 이를 근거로 변호인단이 낸 공소기각 신청은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재판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강신옥 변호사가 구치소로 들어가자, 방 하나 건너마다 최소한 한 명씩은 있었던 민청학련사건 관련자들이 환영의 함성을 질렀다. 수감된 이들이 자유로운 몸으로 제자리로 돌아오게 하기 위해 동분서주해야 할 변호사 입장에서 그들 함성이 그저 반갑지만은 않았다. 그래도 몸은 갇혀있을망정 그들과 함께 있다는 게 든든하게 느껴졌다. 무엇보다 구치소 내에서 동지들과 통방을 자유롭게 할 수 있어서 위안이 되었다. 

가족 면회가 안 되어 마음 한 구석이 무거워지는 건 피할 수 없었다. 같은 9사에 김동길이 있었다. 그의 누나인 김옥길은 동생에게 물건을 차입해줄 때마다 늘 두 개씩 넣어서 강신옥에게도 들어가게 했다. 강변호사의 부인이 김옥길과 같은 학교 출신이어서 더 가까워졌는지, 네 명이나 되는 아이들에게도 도움을 많이 주곤 해서 강신옥은 한결 시름을 덜 수 있었다. 

감옥은 강신옥에게 도서관과 같은 곳이었다. 그는 그동안 바빠서 읽지 못했던 책을 실컷 읽으며 혼자 생각하는 시간을 많이 가져 마음이 순화되는 걸 느끼기도 했다. 교도관 전병용이 날마다 그의 방을 들러 밖의 소식을 전달해 주고 또 그의 소식을 밖으로 보내기도 했다. 그래도 그가 심혈을 기울였던 일은 재판에 대비하는 일이었다. 백낙청을 통해 필요한 책을 공급받을 수 있게 되자 그는 항소이유서를 작성하기 시작했다. 그가 옥중에서 쓴 장문의 항소이유서는 훗날 변호사를 비롯한 법조인들이 꼭 읽어봐야 할 명문으로 유명해졌다. 그의 해박한 지식으로 대통령 긴급조치의 위헌성, 변호사의 사명과 윤리, 법률상의 저항권 등 법철학 이론에 대한 다양한 예를 들어가며 설명했다.

“저항권이나 자연법이 실정법보다 우선하다는 이론은 일찍이 희랍의 비극 소포클레스의 ‘안티고네’라는 작품에서 인정된 바 있다. 크레온이란 왕이 테베를 침략하다가 죽은 포리나케의 시체를 누구든지 묻어서는 안 된다고 명령을 내렸는바, 당시의 희랍 종교에 의하면 죽은 자의 가족은 죽은 자를 위하여 장례를 치러 주어야 할 절대적인 의무가 있고, 이 의무에 반하면 후세에 재앙을 당하는 것으로 되어 있었다. 이 비극의 주인공 안티고네는 죽은 자의 누님으로서 왕의 법에 고의로 복종하지 않고, 하느님의 법을 지켰다. 왕이 말하기를 ‘왕의 명령은 적든 크든, 옳든 그르든 복종되어야 한다고 하였고, 안티고네는 ’왕의 명령이라고 하더라도 불문으로 되어 있지만 언제나 인간이 지켜야 하는 하느님의 법을 이길 힘을 가진 것으로 믿지를 않는다‘고 하였다. 이 비극은 안티고네가 인간의 법에 저항한 것이 옳았다고 자신 있게 규정하면서 끝을 맺고 있다.”

1974년 9월 20일 강신옥은 징역 10년에 자격정지 10년을 선고 받았다. 그리고 항소가 기각되어 대법원에 상고한 재판이 지루하게 계속되던 1975년 2월 15일 대통령의 특별조치로 구속집행이 정지되어 석방되었다. 하지만 그의 변호사 자격이 복권된 건 10월26일 박정희 대통령이 부하 김재규의 총탄에 쓰러진 뒤였다. 

그가 변론을 맡아 구속되면서까지 혼신의 힘을 다했던 민청학련사건과 인혁당재건위사건은 그에게 천추의 한으로 남아 있었다. 여정남을 비롯해 사형을 당했던 8명의 사형수는 재심을 통해 32년만인 2007년에 무죄를 선고받았다. 그리고 강신옥의 법정모독죄 역시 14년 만인 1988년 무죄가 되었다. 

글  박민나(자유기고가) 
'가시철망 위의 넝쿨장미-여성노동운동가 8명의 이야기' 출간(2004년 )과 한국여성노동자회 계간지 '일하는여성'에 '박민나의 삶이야기'를 연재하면서 많은 여성노동자들을 만나 글로 옮기는 일을 하였다. '여성의 삶과 문화' 공저, 한겨레신문 '길을 찾아서 이총각 편' 연재, 뮤지컬 메노포즈 번안 등 다양한 글쓰기를 이어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