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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꽃이 죽어 불꽃이 되리라, 산업재해의 상징 문송면
“기어코 송면이가 죽었다카데.”
“송면이...? 송면이가 누군데...?”
“거 문송면이라고 도장실에서 일하던 충청도 아 있잖어.”
“아, 인사 잘 하고 잘 웃던 곱상하게 생긴 애 말이제. 걔가 왜...? 이제 겨우 열댓살 먹었을까로 보이던데.”
“아, 글쎄 말이여. 이제 겨우 중학교 졸업하고 야간 고등학교 들어갈라고 준비하던 중이라던데. 그 어린 넘이...”
경비실 조 씨가 혀를 차면서 말했다.
“츳 안 됐구먼. 허지만 이런 험한 데서 살다보면 일하다가 죽는 것도 예사지. 안 그런가. 자기가 조심해야지. 죽은 넘만 서럽지. 누구를 탓혀. ”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속이 타는지 조 씨가 뻑뻑 담배를 빨아대며 말했다.
“아, 그런 말 말어! 벌 받어. 그 어린 것이 뭘 안다구. 사람을 부려 먹어도 안전 장치를 해놓고 부려 먹어야지, 수은 중독이 무서운 줄 뻔히 알면서도 그런 데서 밤낮으로 왼종일 일하게 한 넘들이 더 나쁘지.”
“허 참.”
안 됐긴 하지만 그런 일이란 조 씨 말대로 이리저리 돌아가는 당시 산업 현장에서 흔히 벌어질 수 있는 일이었는지 모른다. 잘 살아보세, 구호 아래 앞만 보며, 최대 이윤을 좇아 열악한 환경이나 노동자의 건강 따위는 안중에 없이 달려온 대한민국이었고, 대한민국 기업들이었다. 민주화의 요구가 사회 전반에 걸쳐 폭발적으로 분출되어 나오고 있었지만 이들 현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의 삶은 여전히 위험한 사각지대에 방치되어 있었다. 조 씨처럼 나이 든 자기네들도 그렇게 살아왔던 것이다.
사실 산업재해(산재)라는 말은 노동 현장에서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었다. 그동안 현장에서 사고가 끊임없이 일어나곤 했지만 떨어져 죽거나 기계에 다치거나 해도 약간의 보상금이나 치료비만 지급하면 그만이었다. 거의 대부분이 자신의 부주의를 탓하거나 자신의 불운을 원망할 수밖에 없었다. 기업은 기업대로 정부는 정부대로 산재에 대한 법은 있었지만 자신들에게 유리하도록 적당히 처리하고 넘어가면 그뿐이었다. 산재를 증명할 산재 병원은 턱없이 부족했고, 그것을 증명해 줄 의사도, 의료지식도 없었다. 그런데다 오랫동안 관습에 젖은 관료들의 행정 과정도 까다롭기 짝이 없었다.
“억울하지만 어쩔거여.”
조 씨가 회색빛 우중충한 하늘을 향해 연기를 뿜으며 한숨처럼 말했다.
영등포 소재의 60여 명이 일하던 크지도 작지도 않은 공장. 문송면이 그곳에서 일한 것은 지난 겨울 두어 달 남짓이었다. 압력계와 온도계를 제조하던 곳이었다. 송면이가 주로 하는 일은 시너(페인트를 칠할 때 도료의 점성도를 낮추기 위하여 사용하는 혼합용제)를 섞거나 액체 수은을 온도계에 주입하는 일이었다. 그곳에는 송면이 뿐만 아니라 송면이 나이 또래의 어린 청소년들이 여러 명 같이 먹고 자며 일하고 있었다. 겨울이라 창문을 닫아 둔데다 작업실 안에는 난로까지 있어 공기가 탁했다. 수은을 다루는 곳이라 여기저기 수은 방울이 떨어져 돌아다니고 있었지만 아무도 신경 쓰는 사람이 없었다. 바로 그 탁한 공간 속으로 죽음의 여신인 수은 가스가 서서히 피어올라 가득 채우고 있는 줄 아무도 몰랐다.
송면이는 충청남도 서산의 가난한 농사꾼 집안 출신이었다. 위에 형들이 있었지만 집안 사정 때문에 중학교를 졸업하고 더 이상 진학할 수가 없어, 같은 형편의 친구 몇몇과 함께 야간 고등학교라도 들어가 볼까 하고 무작정 상경하였다. 그래서 찾은 곳이 바로 영등포의 오래된 공장 골목에 있는 압력계와 온도계를 만드는 ‘협성계공’이란 곳이었다. 일은 단순했지만 환경은 열악하기 짝이 없는 곳이었다. 기숙사라고 붙어 있었지만 신참인 송면이가 끼어 살기가 어려워 그냥 공장 작업실 바닥에서 라면을 끓여먹으며 자는 게 예사였다.
그런데 두 달도 채 되기도 전에 두통이 나고 구역질이 나기 시작했다. 밤에 이상한 꿈까지 꾸어서 몸이 천근만근 되었다. 근처 약국을 갔더니 감기 같다며 약을 지어 주었다. 그러나 전혀 차도가 없었다. 증상은 점점 심해져 갈 뿐이었다.
할 수 없이 회사에 휴직계를 내고 송면이는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을 수 없었다. 돌아온 송면이를 본 가족들은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토록 건강하던 애가 반송장이 되어 돌아왔으니 그럴 만도 했다. 그때부터 여기저기 병원이란 병원은 다 쫒아다니고 심지어는 무당을 찾아 굿까지 해보았지만 별무소득이었다. 증상은 있는데 원인을 알 수 없었던 것이다. 늘어가는 건 병원진료비 빚뿐이었다.
“안 되겠다. 한번 서울대병원으로 가보자. 그래도 대한민국에서 최고 좋은 데라니까. 원인은 알아야지.”
송면이 형 근면이 말했다. 그 역시 아직 스무 살 남짓의 힘없는 젊은이였지만 동생의 죽음을 그냥 보아 넘길 수가 없었다. 그래서 마지막 희망으로 찾아간 서울대병원. 그곳에서 만난 의사 김희순은 직감적으로 무언가 집히는 게 있었다. 그런 의사를 만난 것은 불행 중 정말 행운이었다.
“애야, 네가 전에 일하던 곳이 어디였니?”
의사는 송면이가 그동안 어떤 일을 했는지, 작업 환경이 어떠했는지 꼬치꼬치 캐어물었다. 그리고 피와 오줌을 받아 중금속 검사를 했다. 수은중독이었다.
당시만 해도 산재에 무심했던 의사들이 수은중독의 진단을 내리는 것은 어려웠다. 더구나 노동자들의 희생 위에 번창했던 정권은 ‘직업병’이라는 말 자체를 금기시 했다. 그래서 수은중독과 같은 것을 산재로 인정받는 과정은 매우 지난하였으며, 행정상 진단을 증명하는 것은 하늘의 별을 따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서울대병원에서 수은중독에 의한 병이란 진단을 받은 문송면의 가족들은 치료비를 위해서라도 ‘직업병’ 판정을 받기 위해 사방팔방으로 뛰어다니지 않을 수 없었다. 일단 요양신청을 하려고 회사를 찾아갔지만 회사는 예전에 농사일하면서 생긴 농약중독일거라며 도장을 찍어주지 않았고, 노동부는 산재전문병원인 ‘한강성심병원’에서 진단서를 받아오라며 요양신청을 받아주지 않았다. 그러나 어린 노동자 문송면의 딱한 소문은 뜻 있는 사람들의 입과 입을 통해 번져나갔고, 시민공익법률사무소 박석운 소장 등의 노력으로 마침내 신문에까지 나게 되었다. 그러자 노동부에서 부랴부랴 가톨릭의대병원의 소견을 받아 산재 허가서를 내어주었다. 이 과정에서 노동부가 현장 조사를 해 본 결과 문송면 뿐만 아니라 다른 어린 소년 6명이 똑같은 증세로 고생을 하고 있다는 것을 밝혀냈지만 비밀에 부쳐졌다.
88서울 올림픽이 열린다고 전국이 떠들썩할 무렵이었다.
산재 허가가 나고 채 보름도 넘기기 전인 1988년 7월 2일 새벽 2시 30분. 소년 노동자 문송면은 열다섯의 어린 나이로 채 피어나지 못한 채 눈을 감았다. 그의 죽음은 1970년, 불과 22살의 나이로 스스로 몸에 불을 붙여 산화했던 전태일 열사의 죽음 이후 가장 큰 충격을 불러 일으켰다. 전태일 열사는 ‘내 죽음을 헛되게 하지 마라!’ 외치며 죽어갔고, 그의 죽음 이후 산업 현장의 열악한 환경 속에서 신음하던 노동자들에 대한 일대 각성을 불러 일으켰지만 20여 년이 가까워지는 지금, 올림픽이 열린다는 서울 중심부에서 아직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은 아직 가야할 길이 멀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알려주는 것이었다.
그의 억울한 죽음에 대한 이야기는 입에서 입으로 전해졌다.
풀꽃 같은 어린 노동자의 죽음은 곧 거대한 불꽃이 되어 산업재해로 신음하던 모든 노동자의 빛이 되어 돌아왔다. 1988년 7월 17일 일요일 여의도 성모병원을 나서는 운구차 주변에는 흰옷을 입고 흰 띠를 두른 수많은 노동자들이 운집하였다. 노동자뿐만 아니었다. 시민단체 대표와 일반인들도 거리에 서서 마지막 가는 그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의 장례는 ‘산업재해 노동자장’으로 엄수되었다.
‘송면이를 살려내라!’ ‘누가 송면이를 죽였는가?’ ‘이윤보다 건강한 삶을...!’ ‘노동자도 사람이다!’ 는 구호가 쓰인 만장이 펄럭였다.
그것은 이후 벌어질 원진레이온 사건과 삼성 반도체 백혈병 문제로 이어져 장차 산업재해추방 운동으로 표현되는 노동자 건강권 운동의 시작을 알리는 힘 찬 종소리였다. 915명이 이황화탄소에 중독되어 무려 231명이 희생된 최악의 사건인 원진레이온 사건이나 초대기업인 삼성전자의 반도체 공장에서 일하던 여성 노동자에게서 연이어 발생했던 백혈병은 이 땅의 모든 사람들이 인간다운 삶을 살아야 하는 이유에 대한 물음이자 직업병에 대한 일대 각성을 불러 일으켰다.
그것은 노동운동의 획기적 전환을 뜻하는 것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곳에는 언제나 문송면이 자리잡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