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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술기록으로 보는 충남대전지역 4월혁명 - 충주, 공주, 대전
1960년 4.19를 전후하여 대전, 충청지역에서는 3.8민주의거를 필두로 4월 26일 충남대학교까지 총 9개 학교에서 학생 시위가 벌어졌다. 3월 8일 대전고등학교의 시위와 3월 10일 대전상업고등학교의 시위를 통틀어 일컫는 3.8민주시위와 3월 10일 충주고등학교, 4월 16일부터 19일에는 청주지역의 청주공고, 청주고, 청주농고의 시위가 벌어졌다. 4월 26일에는 공주지역 학생연합시위가 벌어졌다. 또한 4월 18일과 19일에는 청주대학교 시위, 4월 26일에는 충남대학교와 대전 고등학생들의 연합시위가 벌어졌다.
3월 10일 충주고등학교 500여 명 1, 2차 가두 시위
충주에서는 3월 9일 민주당 부통령후보 장면과 강순천의 강연은 장소 허가가 나지 않아 아시아극장 앞 거리에서 벌어졌고, 경찰은 이를 해산시키기에 여념이 없었다. 한편, 3월 10일 충주고등학교는 시험을 단축하고 1, 2학년 학생 500명을 강당에 집결시켜 충주 출신 자유당 홍병각 의원의 강연을 듣게 했다. 정치 강연이 아니라 교양 강연이라고 강조하던 교감 선생님의 말과는 달리 중간쯤 되자 ‘위대하신 이승만 박사, 조병옥은 올챙이 배’라는 내용의 강연이 진행되었고 학생들은 ‘정치 강연 집어치워라’라고 소리를 지르며 강당에서 모두 나왔다. 약 300명의 학생들은 학교 교문을 나와 ‘학생을 정치도구화 하지마라, 학원에 정치적인 중립을 보장하라’는 구호를 외치며 한일양조장 앞까지 약 1.5킬로미터를 시가행진하였다. 하지만 경찰의 제지로 인해 시위대는 즉시 해산되고 20여 명의 학생이 경찰에 연행되었다.
오후 8시, 또 다시 시위가 벌어졌다. 준비 없이 진행되었던 1차 시위와는 달리 2차 시위는 연합시위를 계획하고 질서정연하게 준비됐다. 충주지역 남녀 학생으로 구성된 약 200명의 시위대는 충주시 교현동에 집결하여 “학원의 자유를 달라”고 외쳤다. 그러나 학생들은 중앙시장 앞 로터리 부근에서 경찰의 제지로 해산되고 그 중 15명이 경찰에 연행되었다. 같은 날 두 차례에 걸쳐 시위를 벌인 충주고등학생 시위는 비교적 중심에서 떨어진 곳에 위치한 지역임에도 불구하고 대도시보다 더 이른 시간에 일어났다는 점에서도 의의가 크다 하겠다.
"각 반의 반장들한테 만약에 정치 강연을 하면은 우리 준비한 건 아무것도 없으니까 일단 내가 신호를 하겠다... 중간쯤에 가니까 뭐 ‘위대하신 이승만 박사,’ 그러구 뭐 ’조병옥 씨는 올챙이배’, 이게 나와요 그래서 앞에서 벌떡 일어나가지고 나왔는데... 결국은 인제 중단을, ‘집어치워라 정치 강연 집어치워라’ 소리 지르면서 전부들 나와 버렸죠... 프랑카트고 뭐 이런 건 준비를 못했죠. 갑자기 시험기간 동안에 중단하고 정치 강연을 한 것이기 때문에... 그때 구호는 ‘학생을 정치도구화 하지 마라.’ 그리고 또 ‘학원에 정치적인 중립을 보장하라’..."
4월 26일 공주 학생 700여 명 연합시위
4월혁명을 전후한 공주 분위기는 야당의 대표였던 신익희와 조병옥의 급서거와 부정선거 등으로 술렁이기는 했지만, 이렇다 할 시위 활동은 나타나지 않았다. 특히 공주대는 당시 사범대학이라 졸업과 동시에 학교로 발령이 나기 때문에 사회에 문제의식을 표출하는 행동이 적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보니 정부나 경찰의 눈에 띄는 탄압이나 감시는 거의 없었다.
그러던 날 서울에서 일어난 4‧19혁명의 소식과 김주열의 사망 소식을 들으며 공주고등학교와 6개의 고등학교가 연합하여 시위를 결의하였다. 그러나 사전에 정보가 새어나가 4월 19일 벽보 부착 계획과 장날인 4월 21일 금강 백사장 시위 계획은 무산되었다. 학생들은 다음 장날인 4월 26일을 시위날로 다시 결의하고 준비에 들어갔다. 4월 26일, 공주고등학교 학생들은 1교시를 마치고 3학년을 선두로 “이승만 정권은 물러가라”, “3·15부정선거 원흉 처단하라”, “김주열 열사 만세” 등의 구호를 외치며 시가행진을 하였다. 학생들은 중동 사거리를 지나 시장을 관통해 제민천을 지나치고, 공주극장 옆길을 따라 공주경찰서까지 진출하였다. 한편 백사장에 모인 공주지역 고등학교 연합시위대는 뚝방길과 시장을 통과하여 공주경찰서 앞에서 공주고 시위대와 합류하였다. 시가지에 나온 시민들의 호응은 대단했고, 일부 시민들은 행진에 동참하여 경찰서 앞에 모였을 때는 700명 정도가 되었다. 이승만 대통령이 이미 하야성명을 발표한 뒤라 경찰의 특별한 제재가 없었다. 이들은 경찰서장의 사과성 발언을 듣고 오후 1시 경 해산하였다. 또한 공주고등학교 학생들은 4월 27일부터 30일까지 4.19 희생자 및 부상 학생을 위한 모금운동을 펼쳐 당시 돈으로 약 7,000환 정도를 모금하였다. 이 돈은 각 언론사로 보내졌다.
"4월 18일 고대 한 뒤로다가 ‘야 우리가 이렇게 있을 수가 없다. 우리도 연합 시위를 하자, 그래 가지고 21일 날로 잡았습니다. 21일 날이 장날이기 때문에... 우리가 외부에서 하는 것은 공주 금강 백사장이 있는데 거기서 모여서 올라올 거니까 올라오고, 니들은 교내에서 학교에서, 애들한테 코스를 정했죠... 갱지로 50여 매에다가 붓을 갈아가지고 썼어요. 그 벽보 내용은 ’3.15 선거는 부정선거다... 벽보를 이제 19일 날 붙이기로 했었어요... 그렇게 상의를 하고서 행동 당일인 그 4월 19일 날 저녁 7시에 그곳에서 이제 모이기로 해서 했는데, 이것이 사전에..."
4월 26일 대전지역 대학생 고등학생 연합시위
4.19시위로 서울에서는 학생들이 많이 희생되고 있었다. 충청남도청에서 당시 교육감 역할을 병행하던 학무부에서 학생대표들의 회의를 소집하였다. 충남대, 공주사대, 한남대를 위시한 대학교와 고등학교의 간부급의 학생들 50~60명 정도가 모였다. 학무과에서 나온 간부는 4‧19혁명은 공산당의 조정으로 일어난 것이니 현혹되지 말고 공부나 열심히 하라는 교화를 하였다. 그러나 이 모임은 오히려 학생대표들을 한자리에 모이게 하여 연합시위를 할 수 있게 한 기회가 되었다. 그 자리에 모였던 학생들은 4월 25일에 한밭중학교에서 연합시위를 하기로 하였다. 한밭중학교는 운동장이 넓어 모든 학도호국단 행사 등 전체 학생 행사가 열리던 곳이다. 그러나 시위정보도 흘러나갔고 시일이 너무 촉박하여 시위 일정은 하루 뒤인 26일로 연기되었다.
4월 26일 한밭중학교에는 이미 경찰과 군인들이 무장을 한 채 지키고 있었지만, 학교 안팎에 모여 있는 학생 약 500여 명은 시위를 감행했다. 학생들은 학교를 벗어나서 대전역을 지나 시청과 도청으로 행진하였다. 시위대열은 시민들의 합유로 수천명으로 불어났다. 도청 앞 광장에 모인 학생들은 연좌시위에 들어가며 각 학교에서 학생대표 1명씩을 선출하여 대표단을 구성하였고 3.15부정선거의 책임을 묻는 면담을 통해 충남지사, 경찰국장, 대전시장의 사퇴를 확약받았다.
한편 이기붕이 유성온천으로 피난왔다는 소문에 일부 시위대가 대전부터 30리나 떨어진 유성온천으로 가 유성온천을 샅샅이 뒤지는 일이 벌어졌다. 대전 시내에서 밤까지 계속된 시위에서 자유당 충남도당 당사와 경찰서, 파출서 등이 파괴되기도 했다. 시위가 점점 과격해지자 학생들은 선무공작대가 등장하여 귀가할 것을 호소했고, 대부분의 학생들은 해산하였다. 그러나 계속된 시위는 27일 새벽이 되어서야 종료되었다.
"구십몇 프로라고 중앙에 보고를 했는데. 충남… 그러니까 사전투표했다는 이런 얘기야. 지사도 시인을 한 거야... “난 그만한 인원이 투표했다고 보지 않는데. 난 취합한 거뿐이다. 나에게 책임을 지라면 어떤 책임이든 지겠다”.... “경찰국장, 나와라.” 이거여. 이제 한풀이 하는 거여. 당신 경찰 앞세워가지고 얼마나 괴롭혔느냐 말이야. 당신, 왜정시대에 경찰이여, 완전 한풀이여. 오늘부로 나는 모든 공직에서 물러나겠다. 용서해달라고 하더라고. 그게 충남에서 제일 먼저 일어난 거여. 전국에서... “이기붕 씨가 유성에 와 있다는데. 이기붕이 왔다는 소식을 알고 있지 않느냐.” 하니까. “그거는 보고받지 못했다.” 그러니까 쳐들어가자 이거여. 그래서 군인휴양소엘 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