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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술기록으로 보는 충북지역 4월혁명 - 청주

청주시 고등학생 연합시위 계획과 4월 16일 청주공업고등학교 시위

1960년 2월 28일 대구 고등학생들의 시위와 3.15부정선거에 일어난 마산시위에 자극을 받은 청주 시내 고등학생들은 모임을 갖고 시위를 준비했다. 이 때 참가한 학교는 청주공업고등학고, 청주여자고등학교, 청주상업고등학교, 청주고등학교, 청주기계고등학교 등이었고, 학교별로 15~20명 정도의 학생 대표들이 모였다. 학생들은 4월 9일 장면 부통령 후보 연설 때 시위를 하려다 제지당하고, 10일과 12일 각 학교 대표끼리 시위 봉화를 시도하였으나 역시 제지당했다. 13일에는 각 학교 학생 10명이 모여 밤새 전단지를 만들었고, 다음날인 14일 각 학교에 가서 시위를 하려 했으나 사전발각되어 전단지를 다 뺏기고 시위를 하지 못했다.

4월 16일, 청주공업고등학교에서는 청주공고 학생들만이라도 시위를 하기로 결의하고 교문을 가로막는 선생님들을 뿌리치고 200~300명의 학생들이 청주역까지 시위를 이어갔다. 그러나 학생들은 곧 경찰에 의해 해산됐고, 경찰에 밀려가며 북문로 2가까지 200미터 정도 행진했으나 진압됐다. 경찰과 교사들은 학생들의 모자와 책가방을 빼앗아가며 시위를 저지했고, 경찰서에 연행된 30-40명의 학생들은 2시간 후 석방됐다. 청주공고 학생들의 시위 이후 청주시 곳곳에는 삼엄한 경비가 계속됐다.

"인원이 그 ..첫 번 모일 때는 열댓 명. 각 학교별로. 그 다음에는 영화사에서 모였을 때는 한 이십 명도 모이고... 자취방으로 해가지고 거기서 이제 남녀학생들 한 십여 명이 넘게 거기서. 하나는 보초 서고. 이제 밤새도록 삐라를 쓰게 된 거죠. 삐라를 써가지고 인저 변또 대신 밥 대신 삐라를 넣어가지고 데모를 강행하기로 각 학교로 다 갔는데, 그게 사전 발각이 됐어요  3월 16일인가 징집날짜가... 사람이 모이는, 많이 모일 때 거기서 데모하자. 이래가지고 우리 공업학교만 16일 날인가를 우리 청주공업학교만 데모를 하자고 간부들 모여가지고, 인저 내가 학생위원장이니께, 간부들 모여가지고 이제 결의를 해가지고 데모를 결행하려고 하는데 교문 앞에서 선생들이 말려가지고 제지를 당하는데 그래도 그걸 뚫고 한 500명..300명 내지 500명이 역전까지 나갔어요."

4월 18일 청주시 고등학생 연합시위

청주고, 청주공고, 청주상고, 청주농고 학생 대표들은 4월 16일과 17일 저녁에 다시 모임을 가지고 4월 18일 오전 9시에 시위를 시작하기로 결의했으며 3‧15 부정선거를 규탄한다는 내용의 플래카드도 작성했다. 4월 18일 오전 9시, 청주고 학생 400여 명이 교문을 벗어나 시위에 나섰지만 중앙극장 앞을 지키고 있던 경찰과 기마대에 의해 해산당했다.

청주공고에서는 아침부터 3교시까지 청주공고 전교생이 ‘독재정권 물러나라, 3‧15 부정선거 다시 하라, 학원에 간섭하지 말라’ 등의 전단지를 제작한 후 800명 가까운 전교생이 교문밖을 나섰다. 청주공고 시위대열은 철길을 따라 행진을 했고 청주상고에 이르자 청주상고 학생 600여 명과 부근에 있는 청주여상 학생 100여 명이 시위대열에 합류했다. 시위대는 곤봉을 휘두르며 강력하게 막는 경찰과 지프차를 향해 투석전을 벌였고 학도호국단가와 전우가를 부르며 행진을 계속했다. 시위대열의 행진에 청주고와 청주여고 학생들도 참여했고, 시민들 역시 골목골목 모여서 박수치며 시위에 합세했다. 3,000명 정도의 시민과 학생이 참여했다. 시위가 본격화되자 소방차, 기마대, 정·사복경찰관이 총동원되어 시위를 제지했고 700~800명의 학생들은 청주역 뒤 우암산으로 쫓겨 갔다. 학생들은 자정이 되도록 우암산 꼭대기에 횃불을 들고 올라가 시위를 계속했다.

오후 1시 경에는 청주공고 학생 100여 명이 7-8명씩 스크럼을 짜고 시내 북문로 쪽으로 행진하면서 “협잡선거를 물리치고 다시 하라”, “정당한 시위에 경찰은 간섭 말라”는 등의 구호를 외쳤다. 경찰의 제지로 흩어졌던 학생들은 다시 청주상고 교정에 모이기 시작하였고, 오후 2시 20분경 600여 명이 집결하자 2차 시위에 들어갔다. 청주상고 학생들이 중심이 된 시위대는 학도호국단가를 제창하면서 시내 번화가를 관통하여 청주역 앞으로 향했다. 시위대열은 경찰에 맞서며 행진을 계속했지만 경찰의 강력한 저지에 시위대열이 깨지자 시내 곳곳에서 산발적인 시위를 벌였다. 시위는 밤늦게까지 계속됐다.

"3월 달에 졸업을 하고 4월 달엔가 입학을 했죠. 당시 입학식 때 3․15부정선거 때 그 부정선거를 타도하자고 이승만 정부 물러가라고 마산에서부터 데모가 조성이 되었잖아요. 근데 청주는 조금 늦었어요. 아무 소식도 없이 데모 하나마나 하는데 가만히 인제 보니까 그게(3․15부정선거) 안되겠더라고. 그래서 각 학교에 규율부 하는 학생들하고 인저 그 힘을 꽤나 쓰는 학생들하구 소집을 했어요... 그때 교장선생님이 교단에 올라와서 하시는 말씀이... 은근히 이승만 대통령을 비호를 하는 거예요. 대통령이 할 일도 많고 머리도 많이 써야 되고 하니까 그렇게 좀 자제를 해서 도와줘야 되지 않겠냐고 교단에서 이야기를 하더라고요. 그래서 ‘이게 아니다’라는 생각을 하고 16일 날 저녁에 각 학교의 간부들을 소집해서 시작을 했죠. 인제 하자... 다른 데는 데모가 많이 일어나는데 청주만 조용하냐?"

4월 19일 청주농업고등학교 농기구 시위

청주농업고등학교는 4월 18일 고등학생들의 연합시위 정보가 누설되어 시위 현장에 나갈 수 없었다. 그날 저녁, 청주농업고등학교 학도호국단 간부들은 심한 감시로 움직일 수 없었지만, 일반 학생들을 중심으로 시위가 계획됐다.

4월 19일 오전 9시, 청주농업고등학교 학생 전원 600여 명이 농기구를 들고 시위를 감행하였다. 그러나 농기구 시위는 많은 학생들이 다칠 것을 우려한 선생님들의 만류로 이루어지지 않았고, 다만 ‘선호미’라는 농기구를 이용하여 플래카드 양 옆을 묶어 들었다. 이들은 주머니에 돌멩이와 연필로 쓴 삐라를 넣고 6명씩 스크럼을 짜고 구호를 외치고 교가를 부르며 도청을 향해 행진했다. 

1차 집결지는 청주공업고등학교 운동장이었다. 그곳에서 청주상고와 합류하고 도청으로 가기 전에 청주여고, 세광고, 청주고와 중도에서 합류하기로 했지만, 이 계획은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시위대는 교동국민학교 앞에서 트럭에 대기하고 있던 무장경찰과 맞닥뜨려 격렬한 투석전을 벌였다. 시위대가 도청 정문 옆 개천가 도로에 들어섰을 때 전후방에서 시위대를 포위한 경찰이 따발총 쏘듯 최루탄을 발사했다. 시위대는 소방차가 뿜어내는 물과 최루탄에 밀려 동(東)공원으로 이동하다가 경찰관에 포위당했다. 약 1시간 후 청주농고 교장과 경찰 협상으로 시위대는 전원 중앙국민학교 강당으로 이송됐다.

"이제 저 도청 앞에서 인저 구호를 외치면서 소리를 질렀죠. 지르니까 그 쪽에서 이제 뭐냐면 도청 보면 현관, 그 옥상 있습니다. 현관 옥상에 이제 경찰들이 저 쫙 올라서면서, 그 당시는 기관총인줄 알았죠. 기관총 같은 것을 배열하면서 뭐냐 하며는 우리를 향해서, 인제 저 겨누는 거야. .. 거기를 향해서 돌을 던지는데 우리 힘으로는 거까지 가질 않았었어요. 그 앞에 경찰 병력이 쭉 있었으니까 근데 경찰 병력이랑 싸우니까 그 때 이제 학교 교감 선생하고 이제 몇 선생 서넛 선생님은 그냥 저 쏘지 말으라고, 학생들 다친다 말이지. 쏘지 말라고 하고 이랬을 적에 아니나 다를까 그때서부터 그냥 막 우당탕탕 소리 나더니 바닥에 막 떨어지고 그러는 거야 최루탄이 그냥. 근데 그때는 그 최루탄이란 걸 우린 몰랐으니까."

4월 18~19일 청주대학 시위

청주지역에서는 4월 18일 시위 이전 13, 14, 15일에도 산발적으로 고등학생들이 시위를 했다. 졸업 후 교사 취직이 예정돼 있던 학생들은 시위에 참여할 경우 취직에 불이익을 주겠다는 협박에 선뜻 시위에 나서는 학생이 많지 않았다. 그러나 4월 18일, 청주대학 학생 600여 명은 강당에 모여 시위를 결정하고 미리 준비해 둔 벽보와 전단지를 들고 시내로 진출했다. 시내에는 이미 청주공고, 청주상고, 청주여자기술고 전교생과 청주여고, 청주고 일부의 학생들이 나와 시위를 하고 있었다. 시위 진압과정에서 경찰은 곤봉을 사용하였고, 소방차에 구정물을 담아 학생들에게 쐈으며, 학생들은 투석전을 벌였다.

4월 19일, 2차 시위가 진행되었다. 청주대학 학생 600여 명은 청주농고의 시위가 진행 중인 오전 11시 경부터 학교에서 2킬로미터 지점인 동문로5가 대창제재소 앞까지 행진했지만 경찰에게 포위되어 강제해산됐다.

"...‘니가 데모 주동했다며?’ 그러기에 ‘내가 주동했습니다.’ 그랬더니 아 금테를 한 아주 흉골이 좋은 경찰관이, 상당한 계급인 거 같은데 ‘너는 이 자식아 오늘 저녁에 대전으로 이송돼갖구 넌 총살이야, 자식아’ 이렇게 얘기를 하더라구요.. 아 그러니 이 순진한 생각에 재판도 없이 그냥 총살시키는 것인 줄 알았어요... 경찰국에 데모했다가 붙잡혀 들어간 사람들이 한 5, 60명 정도가 잡혀 들어갔는데 벽 쪽을 바라보고서 죄 무릎을 꿇어앉혀놨어요.... 근데 그 당시에 최루탄을 쏘들 안하고, 이게 하수구지. 이게 지금 복개를 해가지고 도로인데, 아주 시궁창이 청주시내 물이 다 이리로 흘러내려 가는 거야. 그러니 그냥 그 썩은 물이 여기까지 푹푹 빠지는 그냥 하수군데, 소방차에다가 그 물을 싣고서 그걸 갖다가 죄다 쏴댔으니 사람 꼴이 뭐가 되었겠느냐고. 시커멓게 썩은 물에 냄새는 냄새대로 나지, 입안에까지 썩은 모래가 다 들어갔지... 청주 시내가 생긴 이래에 학생들이 데모한 게 처음 아닙니까. 거기다가 대학생이고 고등학교 학생들이고 다 청주시내 학생들이니까 시민들이 다 자기 자식 붙잡혀 들어갔나 걱정이 돼가지고 그새 경찰국을 그냥 그 에워쌌더라구요 시민들이. 허옇게 그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