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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학순 주교의 양심선언

"본인은 1974년 7월 23일 오전 형사 피고인으로 소위 비상군법회의에 출두하라는 소환장을 받았다. 그러나 본인은 양심과 하느님의 정의가 허용치 않음으로 소환에 불응한다. 본인은 분명히 말해두지만 본인에 대한 소위 비상군법회의의 어떠한 절차가 공포되더라도 그것은 본인이 스스로 출두한 것이 아니라 폭력으로 끌려간 것임을 미리 밝혀둔다.
소위 유신헌법이라는 것은 1972년 10월 27일에 민주 헌정을 배신적으로 파괴하고 국민의 의도와는 아무런 관계없이 폭력과 공갈로 국민투표라는 사기극에 의하여 조작된 것이기 때문에 무효이고 진리에 반대되는 것이다."

(지학순 주교의 양심선언 中)

1974년 7월 6일, 해외순방을 마치고 귀국하던 천주교 원주교구 지학순 주교가 공항에서 납치되었다. 지학순 주교가 민청학련사건과 관련하여 중앙정보부에 연행된 사실은 이틀 뒤인 7월 8일에 확인될 수 있었다. 7월 9일 명동성당에서는 주교회의가 개최되었고, 이어 오후 6시 전국의 성직자 200여 명과 수도자 400여 명을 비롯한 1,500여 명이 명동성당에서' 정의 평화와 지학순 주교를 위한 기도회'를 개최하였다. 밤 10시경 지학순 주교는 남산 중앙정보부에서 나왔다. 지학순 주교의 주거는 명동에 있는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원으로 제한되었다.

7월 15일, 지학순 주교는 행방이 묘연하였으나, 오후 3시경 서울 후암동에 있는 동생 지학삼의 집으로 주거가 제한당하여 있다는 사실이 확인되었다. 평상시 당뇨병 등으로 건강이 매우 나빴던 지 주교는 15일에 성모병원에 입원을 하기 위해 수녀원을 나서던 중, 원주교구 교우, 성직자와 수도자, 그리고 외신 기자들을 만나 자신의 입장을 밝히는 성명서를 배부하였고 이로 인해 검찰에 출두한 후 동생 지학삼의 집으로 주거를 제한당하게 된 것이었다.

7월 16일, 지학순 주교는 명동 성모병원 621호실로 옮겨졌다. 지 주교에게는 병실 밖을 한 발짝도 나가서는 안된다는 지시가 내려졌고, 2명의 중앙정보부 요원이 같은 병실에서 기거를 하며 지 주교의 일거수 일투족을 감시하였다. 그날 밤 11시경, 지 주교에게 공소장과  7월 23일에 비상보통군법회의에 출두하라는 소환장이 전달되었다. 공소장의 혐의내용은 자금제공과 내란 선동, 정부전복 등이었다.

군법회의 자체를 인정할 수 없었고, 따라서 소환에 불응하기로 결심한 지학순 주교는 병원에 연금 중이던 7월 18일, 임광규 변호사를 접견하고 자신의 의지를 밝히며 <양심선언>을 작성하기로 하였다. 22일에 지 주교는 임광규 변호사의 도움으로 작성된 한글과 영문의 <양심선언>을 샤르트르 성바오로회의 서정렬 수녀에게 한글 타자 10부를 찍어 달라고 부탁하였다. 이날 밤 9시, 23일로 예정되었던 공판의 무기연기 사실이 지학순 주교에게 통보되었다.

7월 23일 오전 7시 경, 서정렬 수녀로부터 성모병원 7층 계단에서 <양심선언>을  전달받은 지 주교는 오전 8시 20분 경에 병실로 찾아 온 안승길, 계오식, 설리반, 모리스 포레이 신부들과 함께 엘리베이터 입구에서 그들을 제지하는 중앙정보부 요원을 뿌리치고 병원 마당에서 열리고 있는 기도회장으로 향했다.

7월 23일 지학순 주교의 공판연기 사실을 알지 못하고 전세버스로 상경한 원주교구 신자들과 사제, 수도자, 평신도 500여 명은 오전 8시경부터 병원마당에 모여 기도회를 가지고 있었다. 기도회 중에 지 주교는 신부들의 엄호를 받으며 병원 밖으로 나와 기자들과 기자회견을 가진 후 그들 앞에서 <양심선언>을 발표하였다. 미리 준비된 <양심선언>은 내외신 기자들과 기도회 참석자들에게 배포되었다. 양심선언 발표 사실에 당황한 중앙정보부는 낮 12시 15분 경, 신부와 수녀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지학순 주교를 연행하여 구속하였다.

지학순 주교의 구속은 사회참여에 소극적이던 보수적인 교회를 움직였다. 지 주교의 구속을 계기로 결성된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은 이후 한국 교회운동의 새로운 흐름을 만들었다.

지학순 주교는 구속 이듬해인 1975년 2월 17일 민청학련 관련자들과 함께 출옥했지만 그의 <양심선언>은 「양심선언 운동」으로 전개되었고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양심선언>은 사전 또는 사후에 자신의 입장과 사상을 밝힘으로써 당시의 영장없는 연행, 체포, 구속, 가혹한 고문과 협박에 의해 조작 사건의 희생자가 되어야 했던 민주인사들의 진실을 밝히고 수사기관의 고문에 의한 허위 자백을 무효화시키는 방법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