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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전문(電文)에 나타난 3.1민주구국선언

3.1민주구국선언

1972년 10월유신으로 유신체제가 들어선지 4년 뒤인 1976년 3월 1일. 명동성당에서 열린 3.1절 기념미사에서 한 문건이 낭독된다. 3.1민주구국선언으로 알려진 이 사건은 초헌법적 비상조치로 발단된 박정희 유신독재에 반대하는 저항의 외침이었다.

문익환은 1976년 2월 12일 함석헌에게 유신반대에 관한 "민주구국선언문"을 작성했다고 밝혔다. 함석헌은 3월 1일 이 선언문을 낭독하겠다는 문익환에게 그 뜻에 함께 하겠다고 말했다. 그리고 1976년 3월 1일 오후 6시, 명동성당에서 3.1절 기념미사가 열렸다. 미사가 끝나자 2월 16일 전주에서 있었던 기도회의 보고형식을 빌려 이우정 교수가 "민주구국선언"을 낭독했다. 신앙과 양심의 자유의 위축을 지적하고 민주주의를 다시 세우자는 내용이였으며 당시에는 별탈없이 선언 낭독을 마무리했다.

3.1민주구국선언 10일 후 보고

3.1민주구국선언 직후 독재정권은 이우정 교수를 필두로 김대중까지 연행하였고 9일에는 윤보선 전 대통령이 면담조사를 받았다. 그러나 3.1민주구국선언을 시민들이 알기는 어려웠는데 정작 세간의 주목을 받게된 것은 검찰이 발표하면서부터였다. 당시 검찰은 3.1민주구국선언 관계자들이 반정부 인사를 규합, 종교단체나 사회단체를 가장한 불법단체를 조직하여 정부전복을 선동하였고, 정권퇴진 요구 등으로 민심을 현혹시켜 시위를 촉발, 현정부를 전복한 뒤 정권 탈취를 기도했다고 발표하였다.

미 대사관은 3.1민주구국선언 발표 10일 뒤 미 국무부에 검찰이 체제전복을 꾀했다는 이유로 '김대중 등 10명을 체포하고 조사중'이라는 제목으로 서울지검의 발표를 번역하여 송부하였다. 3.1민주구국선언과는 10일이라는 시간차를 두고 한 보고였지만 검찰의 발표를 빠르게 미 국무부에 송부했다.

김대중 체포에 대한 반응의 공문

미국의 주된 관심사는 김대중의 구속이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미 국무부는 '김대중 체포에 대한 반응'이라는 제목으로 미국 내 한국 민주화운동그룹이 한국국장을 만난 것을 주한미대사관에 알렸다. 

3월 12일 김재준 목사와 김대중의 처남 이성호를 포함한 미국의 한국 민주화운동 관련 그룹이 한국국장을 만나서 한국 내 정치상황을 설명하고 3월 1일 성명에 참여한 김대중 및 10인의 체포에 대한 미국 정부의 조치를 요구하는 서한을 전달했다. 한국국장은 서한을 접수했지만 언론대변인을 통해 미 정부는 한국의 인권상황에 대해 관심을 표명했다고 밝혔다. 

3.1민주구국선언의 사례를 보면 미국은 한국 민주화운동 소식을 신속하게 접수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미국 내 소식을 한국 미 대사관에 전달하여 상황을 공유하였다. 그러나 미국은 한국 내 민주주의 활동에 대해 적극적인 해결책을 마련하지는 않았다. 미국은 한국 내 민주주의 상황에 방관자적 입장을 취했던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