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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돌아가고 싶지 않은 그곳_ 남영동 치안본부 대공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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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숙 선생, 저어기 보이는 건물이 뭔지 알아요?”

중학교 교사인 동혁이 철길 너머 건물을 가리키며 말했다. 철조망이 쳐진 긴 담장 위로 보이는 검은 건물...

평범하다면 평범하고, 깔끔하다면 깔끔한 7층짜리 벽돌 건물이었다. 특이하다면 5층쯤 되는 자리에 좁고 긴 창문이 이어져 있다는 것뿐이었다. 비라도 내릴 모양인지 하늘이 회색빛으로 젖어있었다. 

“아니. 왜요?”

은숙은 무심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동혁과 은숙은 연인이었다. 둘은 사귄 지 얼마 되지는 않았지만 반말을 적당히 섞어서 사용하고 있었다. 

“저기가 그 유명했던 남영동 치안본부 대공분실이야.”

“치안본부 대공분실?”

“응. 6월항쟁 무렵 박종철 열사가 물고문을 당하다가 죽은 그곳.”“아, 정말...?”

은숙은 자기도 모르게 가볍게 탄성을 질렀다. 

박종철 열사라면...?

초등학교 교사인 은숙이 고등학교 시절에 일어났던 일이었다. 아직 세상에 밝지 못한 때였지만 서울대 학생이 남영동 어딘가로 끌려가 고문을 당하다가 죽었다는 이야기가 파다하게 퍼졌었고, 그해 6월 초여름, 길거리로 수많은 사람들이 쏟아져 나와, “종철이를 살려내라라!”고 외치던 모습을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참혹했던 일이 벌어졌던 곳이 바로 지금 남영역 너머로 빤히 눈앞에 보이는 저 검은 벽돌 건물이었다니 믿어지질 않았다. 1호선 지하철을 타고 가며 무심코 지나쳤던 곳이었고, 어쩌면 지금 회색빛 하늘로 삐쭉 솟은 그 검은 벽돌 건물도 분명히 여러 번 보았을 것이었다. 

그런데 그런 비극적인 일들이 바로 서울 도심의 코앞, 일상적인 출퇴근 전철길 옆에서 벌어지고 있었다니. 한편 놀랍기도 새삼 부끄럽기도 했다.

그런 은숙을 동혁은 알듯 말듯한 미소를 띠고 바라보았다. 모르는 것도 당연하지, 하는 투였다. 세 살 위인 동혁이 대학생 시절에 겪은 일이었다. 박종철보다 한 학번 아래였기 때문에 그 역시 그때 일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가 그렇게 죽음을 맞이했던 현장을 찾아본 것은 최근의 일이었다. 

같은 시절 대학을 다닌 사람으로서 무언가 빚진 것이 있는 것처럼 늘 마음 한쪽이 무거웠었는데 마침 얼마 전 역사강의 실습시간에 학생들과 함께 그곳을 둘러볼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이곳은 박정희 정권 말기인 1976년 당시 내무부 장관 김치열의 의뢰로 건축가 김수근이 설계하여 지어져 치안본부 대공분실로 사용되었습니다. 그러다 1983년에 다시 7층으로 증축되어 지금의 모습이 되었죠.”

안내를 맡은 해설사가 그들을 맞이하여 여기저기 둘러보며 자상하게 설명해 주었다. 그곳을 둘러보는 동안 동혁의 가슴은 자기도 모르게 먹먹한 추억에 잠겼다.

“잘 지어졌죠? 천재의 작품이라니까, 당시에도 아주 고급스러운 건물이었을 거예요.”

해설사가 약간 빈정거리는 듯한 투로 말했다.

건축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동혁의 눈에도 무척 잘 지어진 건물이란 걸 한눈에 알 수 있었다. 까만 벽돌 벽이며 철제와 초록색 파스텔 풍의 내부까지 어쩐지 차갑지만 고급스럽다는 느낌마저 들었다. 

역시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건축가 김수근의 작품다웠다.

이런 건물 속에서 인간의 얼굴을 한 악마들이, 고문 기술자들이 사람을 고문하고 죽였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아무도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었다. 피의자용 나선형 계단, 좁고 긴 창문, 복도에서 제어되는 조사실의 조명과 방음장치. 그는 처음부터 군사정권에 반대하거나 항의하는 사람들을 잡아다 취조하고 협박하고 고문할 목적으로 박정희 정권 치하에서 권력을 누렸던 의뢰자의 뜻에 따라 치밀하게 설계했을 게 분명했다. 

그 비밀은 이 평화로운 공간 너머 또 다른 숨겨진 공간인 5층에 올라가는 순간 온몸으로 느낄 수가 있었다. 온몸으로 달려드는 공포감, 바로 악마들이 자기 모습을 드러내고 낄낄대는 바로 그곳이었다. 


해설사의 안내에 따라 나선형 좁은 철제 계단을 밟고 올라가면 철제 계단 끝에 5층이 나타난다. 빛이 잘 들어오지 않는 어두컴컴한 복도 양쪽으로 어긋난 각도로 철제문들이 달린 15개의 작은 방들이 감옥처럼 길게 이어져 있는 층이었다.

“이곳 5층이 바로 박종철 열사와 김근태 민청련 의장 등 민주인사들이 주로 고문을 당했던 곳입니다. 보시다시피 창문이 좁고 길지요. 고문을 당하던 사람이 뛰어내릴 수 없게 하기도 하고 또 밖을 내다보거나 밖에서 안을 볼 수 없게 한 것입니다. 그리고 벽에는 방음장치를 해서 소리가 밖으로 나갈 수 없게 했어요.”

해설사의 설명을 듣는 동안 동혁의 귀에는 그때 그들의 입에서 터져나왔을 비명소리가 아련하게 들려오는 것 같았다.

“장의사 사업이 이제야 제철을 만났어. 남민전의 이재문이 어떻게 죽은 줄 아느냐? 속으로 다 부서져 옥중에서 병사했지. 너도 각오해라. 지금은 네가 당하고 민주화가 되면 내가 그 고문대 위에 서줄 테니까, 그때 네가 복수해라.”

그러며 낄낄거리던 자들. 바로 민청련 김근태 의장을 고문했던 고문기술자 이근안이 했던 말이었다. 이미 고인이 되었지만 그이가 이곳에서 20여 일 동안 당해야 했던 온갖 형태의 고문을 생각하면 저절로 숙연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절망적인 비명소리가 밖으로 새어나가지 못하게 했지만 복도엔 더욱 크게 울려 퍼지도록 만들어져 있었다. 그러는 동안 그들은 태연하게 담배를 피우며 일상적인 대화를 이어갔다. 아이가 체력장 시험을 잘 봤는지 모르겠다, 마누라가 얼굴 점을 빼러 갔는데 어떻게 되었는지 모르겠다, 등의 이야기를 나누었다고 한다.

박종철 열사가 절명했던 509호실은 그때의 형태 그대로 보존되어 있었다. 물고문을 당했던 주황색 타일을 두른 검은 욕조와 붙박이 침대와 작은 책상, 그리고 의자 하나. 단출하지만 매우 깔끔했는데 그 깔끔함이 오히려 이상하게 공포감을 만들고 있었다.

윤리성과 역사적 자각이 결여된 천재는 종종 기능적인 악마성을 드러낸다. 나치에 협력했던 수많은 예술가와 과학자같이...

건축가 조 한 교수의 글이 생각났다.

“공간 사옥의 문화적 선구자로서 건축가 김수근의 모습이 본모습인지, 아니면 남영동 대공분실을 설계한 군사정권의 하수인으로서의 건축가 김수근이 진정한 그의 모습인지 모르겠다. 하지만 남영동 대공분실을 걸으면서 이렇게 건축학적으로 아름다운 건물이 처절하게 잔인한 도구로 사용될 수 있다는 사실에 큰 충격을 받았다. 세상의 진리를 얻기 위해 악마에게 영혼을 판 파우스트처럼, 건축가 김수근 역시 자신만의 이상 세계를 구축하기 위해 영혼을 팔아야 했던 것일까?”

밖으로 나오자 기다렸다는 듯 환한 햇살이 비추고 있었다. 마치 지하 깊은 곳에 있다는 지옥에라도 다녀온 것 같았다. 그래도 아이들은 자기네들끼리 떠들며 웃고 있었다. 아이들의 웃음소리에 동혁은 비로소 밝은 세상으로 나온 안도감이 들었다.

글 김영현(소설가)
1984년 창작과비평사 <깊은 강은 멀리 흐른다>로 등단, 소설집 <깊은 강은 멀리 흐른다>, <해남 가는 길>, <내 마음의 망명정부>, 장편 <풋사랑>, 시집 <겨울 바다>, <남해 엽서>등이 있다. 제23회 한국창작문학상 수상, 실천문학사 편집장 역임, 한신대 명지대 등에서 강의하다가 현재는 양평에서 창작과 공부에만 열중하고 있다.